개개인이 존중받는 공동체를 위하여

일러스트=토끼풀

 
개인이 공동체를 위해 희생하는 일은 허다하다. 공동체가 그것을 바라기도 하고 개인이 공동체를 위하는 마음에 자발적으로 희생하기도 한다. 하지만 지금까지 공동체가 개인을 위해 희생하는 일은 보지 못했다. 개인에게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고 전적으로 희생하는 공동체는 본적이 없다.
 
공동체를 위해 자신의 목소리를 죽인 모든 사람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참으로 고생이 많았다.”
 
공동체를 믿고 자신의 목소리를 낸 모든 사람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마음이 힘들다면 그것은 공동체가 못난 것이지 당신의 책임이 아니다.”
 
교회에서 교육전도사로 일했을 때였다. 내가 담당하고 있는 청년들이 교회 전통 때문에 취업에 필요한 일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주일성수(일요일에 예배를 드려야 함)라는 전통 때문에 일요일에 치러지는 영어시험을 보지 못해 소위 말하는 스펙을 관리하지 못하고, 세속적인 음악보다 교회에서 봉사하는 것이 옳다는 주의를 듣고 꽤 이름 있는 밴드를 그만두는 경우도 있었다. 심지어 먹고 사는 일에 대한 직업적 가치를 아예 부정당하기도 했다.

교회 전통 탓에 하고 싶은 일을 못하는 청년들을 보면서, 교회가 청년을 부속품처럼 소모한다고 생각했다. 이전에는 신앙에 의한 자발적 선택이라 여겼던 것들이 실상은 공동체의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강요된 폭력이었고, 개인은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했던 희생일지도 모른다는 의문이 들었다. 비단 기독교 뿐 아니라 오늘날 많은 종교와 공동체들이 자신들의 교리 또는 규범과 전통을 마땅히 따라야 하는 진리라 여기며 이를 지키지 않는 개인을 정죄하는데 거리낌이 없다. 그리고 공동체 바깥, 자신들과는 구별된 사회를 향해 이러한 잣대를 들이댈 때면 더욱더 적의를 서슴없이 드러내기도 한다.
 



1. 공동체가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는 이유.

교회의 청년들처럼, 때로는 공동체를 위해 자신의 주장이나 가치관, 심지어 삶까지 포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개인의 생각을 존중하여 그를 억압하는 규범을 포기하는 공동체는 거의 없다. 다름을 인정하는 공동체를 찾기란 쉽지 않다.
 
흔히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는 원인을 공감 부족에서 찾지만, 그보다 공감 과잉이 더 문제가 되기도 한다. 내 편에게만 과하게 공감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 또는 집단에게 공감하지 못하는 것이다. 실제로, 공통 신념이 강한 공동체일수록 편 가르기도 심하다. 종교나 정치집단에서부터 작은 취미 동아리까지 모두 마찬가지다.
 
주로 개인 정체성이 약한 사람이 공동체에 더 맹목적으로 동조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런 경향을 ‘내집단 편향’이라고 부른다. 내집단 편향이 강한 사람은 온갖 당위성을 내세우며 자신이 속한 집단의 잘못은 옹호하는 한 편, 다른 집단의 의견에 공감하는 구성원을 배신자로 낙인찍기도 한다. 조직 보위와 진영논리가 지배하는 집단에서 이런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심한 경우, 내집단 편향이 강한 사람은 적대 집단의 구성원이 겪는 고통을 보며 기쁨을 느끼기도 한다. 이를 독일어로 ‘샤덴프로이데’라 하는데, 그 대표적 사례가 사회적 참사 앞에서 일부 집단이 희생자를 능욕하는 극단적 행위다. 편향적인 공감이 사람을 잔인하게 만드는 것이다. 공감을 하지 못하는 것보다 공동체라는 집단을 통해 나타나는 편향적인 공감이 우리 사회에 더 독이 되어 돌아온다.
 
내가 있었던 교회는 청년들의 의사를 존중하지 않았다. 그들의 삶을 전적으로 책임질 수 없음에도, 봉사와 헌신을 강요하며 청년들의 미래를 가로막았다. 이런 부당한 일들이 서슴없이 일어나는 이유는 지나친 공감, 내집단 편향이 교회 공동체를 완고하게 만들면서 시간이 지나며 마땅히 바뀌어야 하는 낡은 규칙들을 유연하게 바꾸지 못하도록 막았기 때문이다.
 
내집단 편향에 빠지지 않은 건강한 교회라면, 청년들이 스스로 삶을 살 수 있도록 지원하고 응원했어야 했다. 설사 그것이 오랫동안 이어져온 전통을 부정하는 것일지라도 말이다. 건강한 교회 공동체였다면 청년들은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펼치며 교회와 행복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2. 타인과 개인, 객관성과 주관성의 충돌

그렇다면, 공동체는 어떻게 내집단 편향에 빠지지 않고 생각이 다른 개인들을 포용 할 수 있을까?
 
아래는 우치다 타치루의 책 [구조주의 강의]의 일부이다.
 
레비스트로스는 사르트르에게 “‘나는 생각한다’의 죄수”가 되었다고 빨간 줄을 긋는다.
 
우리는 모두 자기가 보고 있는 세계만이 ‘객관적’이라고 과대평가하고 타인이 보는 세계는 ‘주관적으로 왜곡된 세계’라고 생각한다.
 
레비스트로스는 1952년 카뮈와 사르트르의 논쟁에서 사르트르가 ‘역사’라는 잣대를 들어 ‘역사적으로 옳은 결단을 내리는 인간’과 ‘역사적으로 잘못을 저지르는 인간’을 구별하는 것은 ‘멜라네시아의 야만인’이 그들의 잣대로 ‘자기들’과 ‘주변 사람들’을 구별하고 있는 것과 동일한 행위라고 말한다.”
 
시대와 역사적 상황에서 결단을 내리고 그에 대한 책임을 지는 개인에 대한 실존주의와 사르트르의 주장처럼, 나 또한 개인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지며 살기위해 부단히 애써왔다. 하지만 레비스트로스의 비판처럼 말 그대로 “나는 생각한다”의 죄수가 되어 그 생각에 맞게 행동하는데 골몰하는 삶을 살아온 것은 아닌가 싶었다. 이러한 생각들은 끊임없이 나와 타자를 가르는 선이 되었고 잣대가 되었으며, 그 행위의 이면에는 스스로를 틀 안에 가두어 나를 더 높은 위치에 두고자 하는 오만한 마음 또한 들어있었다. 객관화라고 생각했던 일들이 주관성을 갖게 된 것이다.
 
우리는 모두 내 안에 신화를 설정하고 결국 그 안에서 사고하고 만다. “당신의 사고는 오류이고 그 안에서만 생각한다.”고 말하면서 그 반대의 것을 주장하는 사람들 또한 결국 자신들만의 패러다임 속에 갇히는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결코 객관적일 수 없는 자신의 신화만 존재하는 왜곡된 세계를 넘어설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레비스트로스는 다소 생뚱맞은 결론을 내렸다. 그것은 바로 ‘사람들 간의 희생으로 이루어진 공동체’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희생으로 이루어진 공동체’라는 단어를 보았을 때 한 인물이 떠올랐다. 율법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던 구약시대 당시, 옳고 그름의 잣대가 아닌 지극히 작고 천한 자에게 먼저 손을 내밀며 자신의 길을 겸손하게 묵묵히 걸어갔던 2000년 전 예수의 모습이었다.
 
바리새인의 지식이 아닌 예수의 사랑과 희생, 혁명적인 생각과 행동이 우리에게도 필요하다.
 
한 사람만 희생한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힘들고 불공평한 일이 된다. 하지만 공동체 구성원이 서로를 생각하며 조금씩 희생한다면 그때부터 희생은 더 이상 희생이라 불리지 않는다. 그것을 우리는 사랑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러한 사랑을 실천하는 공동체는 다름 아닌 가족이다. 가족은 이상적인 공동체인 셈이다. 다시 말해, 레비스트로스가 말한 사람 사이의 희생으로 이루어진 공동체를 가족 안에서 볼 수 있다.
 
가족의 모습은 다양하지만 변하지 않는 가치는 비슷하다. 그것은 애정과 신뢰다.
 


 
3. 애정과 신뢰 연민과 환대, 우리가 만들어 갈 좋은 공동체

나는 나의 자녀들을 동거인이라 여기고 한 인격체로 존중한다.(동거인이라 선을 긋는 이유는 혹시라도 자녀를 소유물처럼 여기는 우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다.) 유아기에는 부모의 희생적인 돌봄을 통해 아이들이 자란다. 하지만 아이들은 점차 크면서 자신의 길을 찾아가고 부모는 그들을 도와주며 지지한다. 부모 또한 꿈을 위해 노력하며 자신의 일을 해 나갈 때 자녀들은 부모의 뒷모습을 보고 배우며 자라게 된다. 어릴 때는 가정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을 맡아 하지만 성인이 되면 스스로의 길을 찾아 밖으로 나아가며 부모는 그 길이 무엇이든 자녀를 기꺼이 응원해 준다.
 
이 관계 속에는 왜곡된 자아가 끼어들 틈이 없다. 만일 나만의 잣대를 들이댄다면 부모와 자녀의 관계는 결코 순탄치 않을 것이다. 물론 성숙한 부모라면 자신의 잣대를 자녀에게 들이대는 어리석은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자녀는 부모의 소유물이 아니다. 또한 자녀가 독립된 한 개인으로 우뚝 서기를 누구보다 바라는 이들이 바로 부모이기 때문이다. 애정 안에서 서로 신뢰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다.
 
이런 건강한 가족의 가치를 따른다면, 공동체도 더 성숙해 질 수 있지 않을까?
 
최근 한국은 언론부터 정치, 직장과 가정에 이르기까지 스스로의 목소리를 자유롭게 내는 것에 두려움을 갖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다. 누구에게나 환영받는 의견은 존재하지 않으며 아무리 좋은 의견이라도 반대하는 사람이 한명은 있기 마련이다. 만일 우리 사회가 어떤 의견이건 존중받고 들을 수 있는 준비가 되어있다면 스스로의 의견을 말하는 것에 거리낌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 사회는 사소한 주장 하나 하나에 양분해서 싸우는 일에 익숙하게 길들여졌고, 그러한 대치에 지쳐가며 자신의 목소리를 자신 있게 드러내는 것을 포기하고 있다. 의견이 다른 타인을 용납하지 못하는 일이 비일비재한 지금, 서로를 인정하고 자신의 의견이 타인과 다르더라도 서슴없이 말할 수 있는 안전한 공동체는 존재할 수 있을까?
 
대부분의 부모는 자녀가 실패하고 돌아와도 언제든지 문을 열어놓고 품어줄 준비를 한다. 자녀를 환대하고 응원함으로 또다시 힘을 내 꿈을 향해 도전할 수 있도록 돕는다. 이러한 것이 가족의 애정이고 신뢰다. 그의 길을 응원하며 어깨를 내어주고 언제나 돌아올 곳이 있다는 안정감과, 실패해도 괜찮으며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무한한 격려와 애정을 주는 사람들의 환대가 있는 곳,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받아들여지는 경험을 할 수 있는 안전한 공간, 이런 곳이 건강한 가족과 같은 이상적인 공동체의 모습이다.
 
어떤 이는 건강한 가정과 같은 공동체를 만드는 것은 이상주의에 불과하고 이룰 수 없는 꿈일 뿐이니, 현실에 맞추라고 우리를 종용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우리가 상상하고 꿈꾸는 공동체를 만들 수 있다는 마음을 포기하지 못한다.
 
한국의 많은 진보주의자들이 버니 샌더스가 주장하는 민주사회주의를 꿈꾸는 것처럼, 나 또한 좋은 공동체를 만드는 일에 민주사회주의가 필요하다고 믿는다. 착취적인 경제구조와 부패한 정치권의 변화가 가장 시급하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는 민주사회주의는 특정한 정책보다는 사람간의 관계를 맺는 방법과 조화로운 의사결정 구조에 더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알게 모르게 우리는 독재적이고 소수가 지배하는 사회구조에 순응해왔고 그런 의사결정 방법에 더 익숙해져 있다. 다수 또는 나와 다른 의견, 다른 모습의 사람을 환대하기보다 배척하는 것에 익숙해져 버린 것이다.
 
나는 3세부터 청년까지 교육을 했던 교육자로써 지금까지 학생들에게 많은 것을 배워 왔다. 모든 관계는 쌍방이며 동등해야 하고, 위계에 의한 상하가 존재하더라도 결코 그것을 권리로 여겨서는 안 된다. 부모와 자녀가 상하관계가 아닌 동등한 인격적 관계이듯, 공동체 또한 그래야 한다. 모두가 동등하다면, 각자는 어떤 의견이든 자유롭고 안전하게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선생이 학생에게, 부모가 자녀에게 도리어 배우기도 하는 것이 건강한 관계이다. 서로 상호보완적인 관계가 되는 것이 좋은 공동체를 만드는 기초다. 신뢰와 애정, 환대하는 마음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여러 의견 충돌이 있음에도 기꺼이 그 소용돌이에 뛰어들어 의논하자. 당장 필요한 이들의 곁에 있자. 불가능처럼 보여도 계속 그 자리를 지키며 마땅히 해야 하는 옳은 것을 해야 한다고 말하자. 나보다 타인이 옳을 수 있음을 인정하자. 잘못을 깨달았을 땐 행동으로 고치자. 우리는 미완성의 존재라는 것을 인지하고 성숙을 향해 끊임없이 노력하자. 타인을 함부로 재단하지 말고 개인의 인격을 존중하자. 누군가에게 상처주지 않도록 노력하자. 무엇보다, 연민과 사랑을 갖자. 우리가 서로를 조금만 인정하고 여유로운 마음을 갖는다면 누구나 환대하는 건강한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 결코 꿈으로만 그치지는 않을 것이다.
 

글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