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in Movie] 16세기 베네치아의 ‘명예로운 매춘부’ 베로니카 프랑코

 
《베로니카, 사랑의 전설(Dangerous Beauty)》은 16세기 베네치아의 유명한 고급 매춘부이자 재능 있는 시인이었던 베로니카 프랑코(Veronica Franco)의 삶을 이야기한 영화다.
 

《베로니카, 사랑의 전설(Dangerous Beauty)》(1998) / 이미지=wikipedia

 
‘코르티자나 오네스타’, 명예로운 매춘부

 
매춘은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직업 중 하나다. 흔히 매춘은 단순히 물질적 대가를 받고 신체를 파는 행위로 여겨진다. 그러나 육체적 상품 이상의 지적 자산을 보유하고 이를 판매한 고급 매춘부들이 있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 사원과 그리스 신전의 여사제, 한국의 일패 기생, 일본의 오이란이 그들이다. 또한, 고대 그리스에는 아름다운 외모와 정치, 철학, 예술, 문학, 음악 등 다양한 분야의 지적 소양을 갖추고 당대의 지도층, 혹은 지식인 남성들과 교유했던 고급 매춘부 헤타이라(hetaira)가 있었다.
 
헤타이라 출신으로, 아테네 정치가 페리클레스의 애첩이었던 아스파시아는 자신의 집에 소크라테스 같은 철학자나 저명인사들을 초청하여 연회 겸 세미나를 열었으니, 이것이 유럽 살롱의 기원이다. 16세기 베네치아는 헤타이라의 르네상스 버전이라고 할 수 있는 ‘코르티자나 오네스타(Cortigiamna Onesta)’로 유명했는데, 그 의미는 ‘명예로운 매춘부’다. 당시 베네치아에서는 재능 있는 귀족 부인들이 살롱문화를 꽃 피우웠지만, 지성과 미모를 겸비한 고급 매춘부, 즉 코르티자나 오네스타가 중심이 되어 책, 음악, 문학을 토론하는 문화살롱도 있었다. 그들은 어떤 여성들일까?
 
15~16세기 베네치아는 지중해의 패권국으로서 국제무역의 중심지였다. 베네치아는 다른 유럽국가들에 비해 훨씬 더 세속적이고 개방적인 사회였다. 성산업이 호황이었고, 쾌락을 위해 유럽 각지에서 여행객들이 몰려들었다. 1360년에서 1460년 사이에 베네치아 정부는 합법화된 매춘 시스템을 구축했다. 도시의 매춘부는 세 단계의 계급체제로 분류되었다. 중산층을 대상으로 하는 매춘부인 코르티자나 디 루메(빛의 창부)와 리알토 다리 아래에서 몸을 파는 메레트리체(하층 창부), 그리고 지성과 미모를 겸비한 고급 매춘부 코르티자나 오네스타가 그것이다.

코르티자나 오네스타 중에는 가끔 귀족이나 부유한 상인가정 출신도 있었고, 모두 고등교육을 받았으며 외국어도 유창하게 구사했다. 이들은 매우 아름다운 외모를 가졌을 뿐만 아니라 예술에서 음악, 정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제에 대해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그들 중에는 학자, 예술가, 시인, 음악가 등 지식인도 많았다. 높은 교양을 갖춘 코르티자나 오네스타는 사회 최고계층의 고객만 접대했다. 종종 후원자의 법적인 배우자를 대신해 공적 행사에 참석하기도 했다.
 
한편, 그들은 베네치아의 패션 트렌드를 이끄는 멋쟁이들이었다. 금발로 염색하고, 밝은 색의 사치스러운 의상, 목 부분이 레이스로 장식되고 가슴이 깊게 파인 드레스, 금 단추가 달린 벨벳 코트, 값비싼 모피 외투를 입었다. 화장품과 미용술에 대한 전문서적도 출판했다. 뛰어난 외모로 유명한 매춘부들은 화가들의 그림 모델이 되기도 했는데, 흔히 그리스 로마신화의 인물이나 비너스 여신으로 묘사되었다.
 
이들은 거리의 매춘부와는 여러 면에서 구분되었다. 보다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었고 상대적으로 특별한 대우를 받았다. 이들 중에서 가장 유명한 여성 중 하나는 베로니카 프랑코(Veronica Franco)다.
 

틴토레토, ‘베로니카 프랑코’, 1555년, 프라도 미술관, 스페인 마드리드

 
이 영화의 여주인공 베로니카는 젊은 시절 상원의원의 아들 마르코 베니에와 사랑에 빠지지만, 신분의 차이 때문에 결혼할 수 없었다. 상심한 그녀는 코르티자나 오네스타가 되기로 결심한다. 그녀의 할머니, 어머니 모두 고급 매춘부 출신이었다. 베로니카는 코르티자나 오네스타가 되기 위해 다방면의 집중적인 훈련을 받고, 마침내 베네치아 최고의 창부가 된다. 그녀의 고객은 상원의원, 추기경, 학자, 심지어 프랑스 왕에 이르는 최상위층이었다. 그녀는 도시의 지식인들과 베네치아 궁정의 저명한 인물들과 관계를 맺었다. 시집을 출판할 정도로 문학적 재능이 있었던 그녀는 침실에서 맺은 베네치아 특권계급과의 사적 관계를 활용하여 문화예술계에서도 엄청난 명성을 얻었다.
 
실제 역사적 인물 베로니카 프랑코는 베네치아의 치타디노(시민) 가정에서 태어났고 공화국 시민이라는 법적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귀족계급에 비해 그녀가 누릴 수 있는 부와 권력은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에 자신의 삶에 만족할 수 없었던 것 같다. 1560년대 초, 그녀는 의사인 파올로 파니차와 중매결혼을 했지만 곧 이혼했다. 그 후 영화에서처럼 프랑코의 어머니는 그녀에게 고급 매춘부 직업을 권유했고, 직접 실질적인 훈련과정을 지도했다. 코르티자나 오네스타는 실제로 최상층 사교계 인사들과 어울리며 후원자에게서 받은 재정적 도움으로 엄청난 부를 소유할 수 있었다.
 
베로니카는 지성과 재치로 남성들을 매료시켰으며, 무엇보다도 침대에서의 사랑의 기술이 비상했다고 한다. 또한, 자선사업에 참여하여 다른 창부와 그 아이들을 도왔다. 대부분의 여성이 남편에 충실한 정숙한 아내가 되거나 수녀의 길을 선택하는 16세기 가부장 사회에서, 그녀는 드물게도 여성의 권리를 주장하는 페미니스트이기도 했다. 도메니코 베니에(Domenico Venier)의 유명한 베네치아 문학 살롱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그는 남성 작가들뿐만 아니라 많은 여성 시인들에게 문학적 멘토 역할을 했다.
 
그러나 현실 속에서의 그녀의 삶은 영화와 달리 장밋빛이 아니었다. 영화에서는 연인 마르코가 마법 혐의로 종교재판소에 넘겨져 사형을 당할 위기에 처한 베로니카를 구하고 오래오래 행복하게 산다는 스토리다. 실제로도 그녀는 종교재판을 받았다. 그런데 연인의 영웅적인 활약 때문이 아니라 막강한 고객들의 인맥을 통해 풀려날 수 있었다. 한편, 1575~1577년엔 베네치아를 휩쓸었던 흑사병으로 서둘러 도시를 떠난 탓에 재산 중 많은 것을 약탈당했고, 돌아온 후에는 예전처럼 부유한 생활을 하지 못했다. 매독에 걸렸다는 악의적인 루머에 시달리기도 했다. 이런 일련의 나쁜 소문으로 인해 베로니카의 명성은 크게 훼손되었고 사업에서도 이전의 영광을 되찾지 못했다. 그녀의 가장 큰 후원자인 도메니코 베니에가 사망한 이후, 베로니카는 재정적으로 한층 어려움을 겪었다. 일설에 따르면, 그녀는 빈곤한 상태에서 4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고 한다.
 


 
르네상스 이탈리아의 지식인 여성들의 삶

 
인구의 10~12%만이 읽고 쓸 수 있었던 문맹의 시대에 베로니카 프랑코는 단연 두드러진 지식인 여성이었다. 시인이자 음악가, 수필가였던 그녀는 오늘날 우리가 최초의 페미니스트 활동가라고 부를 만한 독립적이고 자의식이 높은 여성이기도 했다. 이들 코르티자나 오네스타는 16세기 유럽의 전통적이고 가톨릭적이며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여성에게 요구되었던 성 역할에서 벗어나 있었다. 16세기 여자로 사는 것은 전혀 자유롭지 않았고 그다지 행복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르네상스 시대에 상류층 여성은 엄격한 가부장체제에서 남성에게 구속된 삶을 살았다. 여성으로 태어났다면, 그녀는 기본적으로 남편의 그림자로 살아야 했다. 그들은 남성 보호자 없이 혼자서는 공공장소에 자유롭게 나다닐 수 없었고, 늘 정숙하고 수수한 옷을 입어야 했으며, 딸, 아내, 어머니로서의 의무를 다해야 했다. 자신의 의견이나 목소리를 내지 못했고 남편에게 순종하는 것이 좋은 아내의 조건이었다. 가정이라는 굴레가 싫으면 수녀가 되는 다른 길이 있었다. 이런 사회에서 매춘부라는 직업은 가장 자유롭게 살 수 있는 선택지였다. 16세기 이탈리아에서 ‘코르티자나 오네스타’의 위대한 문화는 그들에게 비범한 자유를 주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코르티자나 오네스타가 아닌 일반 지식인 여성들의 삶은 어땠을까? 15세기 무렵부터는 귀족 가문이나 상위 중산층 가정의 소녀들 역시 인문주의자 오빠나 아버지에게 상당한 정도의 지적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가정 밖에서의 정식교육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고, 사회에서도 유식한 여성을 위한 공적 자리는 전혀 없었다. 르네상스 이탈리아에서 ‘배운 여성’은 보편적으로 세계에 대한 위협으로 인식되었다. 여성의 교육은 자연 및 사회 질서에 어긋난다고 여겨졌고, 동시대 남성들에게 경계심과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자신의 주체적인 목소리를 가진 여성은 사회적, 정치적 위협으로 간주되었다.
 

라우라 세레타(Laura Cereta) / 이미지=wikipedia
이소타 노가롤라(Isotta Nogarola) / 이미지=wikipedia

15세기 이탈리아에는 라우라 세레타(Laura Cereta)나 이소타 노가롤라(Isotta Nogarola) 같은 독립적이고 야심 찬 인본주의자, 페미니스트 여성작가들이 있었다. 그러나 전통적이고 가부장적인 르네상스 사회에서, 그들은 자신들을 일탈적 존재로 보는 남성들의 시기와 적대감에 봉착해야 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업적을 질투하고 비판하는 많은 남성, 심지어 여성들의 비난을 받았다. 그런 사람들은 여성이 교육을 받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억압받는 처지에 있던 동시대 여성들도 그들을 동맹군으로 보지 않았고, 오히려 남성들의 편에 서서 더 매섭게 비판했다. 남성과 여성 모두 가부장적 질서에 어긋나는 그들을 혐오하고 배척했던 것이다.
 
노가롤라는 한 편지에서 “왜 여자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내 말과 행동이 남자들로부터 멸시를 받아야 합니까? 나는 외로움 속에서 이 질문을 합니다 … 온 도시에서 나와 같은 처지에 있는 여자들이 나를 조롱합니다. 나는 모두에게 공격을 받고 있어요.”라고 썼다.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에 반기를 든 여성은 종종 가혹한 비판의 희생자가 되거나 부도덕과 음행에 대한 무고로 정신적, 사회적으로 상처를 입었다. 라우라 세레타와 노가롤라 역시 근친상간, 동성애, 음탕한 행위를 저질렀다는 익명의 제보로 사회적 지탄을 받았다. “유식한 여자는 결코 순결하지 않다”는 것이 그 무고의 요지였다. 이렇듯, 출중한 지성과 재능을 가진 여성들은 사회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되어 조리돌림을 당했다.
 
반면, 코르티자나 오네스타는 남성들과 지적인 교류를 하며 자유롭게 시도 쓰고 출판도 하는 지식인 여성으로 대우받았다. 그렇다면, 그들은 일반 지식인 여성들과 달리 여성의 권리를 누렸을까? 물론 아니다. 그들 역시 완전히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그들의 인생은 부유하고 강력한 남성의 후원에 기생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후원자의 재정적 도움이 없는 그들의 삶은 급격히 무너졌다. 프랑코의 삶에서 여실히 볼 수 있듯이, 그들이 누린 자유는 쉽게 위협받을 수 있는 그런 것이었다.
 
매춘은 사회의 필요악으로 인식되었다. 매춘은 결코 존중받는 직업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들의 지성이 높이 추앙되었지만, 실제로는 고급 매춘부들에게도 아름다움이 가장 중요한 자질이었다. 베로니카 프랑코가 그토록 성공한 것도 육체적 매력이 제일 큰 요인이었다. 베로니카 프랑코가 베네치아 사회에서 명성을 유지하는 데 있어 미모가 절대적으로 중요했다는 사실은 당시 사회에서 여성의 지성이 액세서리에 불과했다는 것을 방증한다. 다시 말하면, 여성의 지적 능력은 그녀들의 외모에 호감을 가진 남성 권력자의 호의와 후원에 의존하지 않고서는 독립적으로 빛을 발휘할 수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의 지성은 남성 후원자에게 보다 품격 있는 성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한 부가적 옵션이었다.
 
오늘날 그녀가 탁월한 시를 쓴 시인이나 페미니스트의 모습으로 남아 있지 않은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영화가 보여주듯이, 베로니카 프랑코는 그저 16세기 고급 매춘부 스캔들로 기억되고 있을 뿐이다.
 

일러스트=강동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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