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回歸)를 부정(不定)하는 방법

 
<회기부정> 작품 링크 : https://brunch.co.kr/@proshuniv17/58
 
*에디터주 : <회기부정>은 본지에서 예술비평 칼럼을 연재하는 황지웅 작가의 작품으로, 대학문화상 소설 부문 가작 수상작이다. 작품은 마지막 변호사 시험을 끝낸 주인공이 대학시절 선배를 고향에서 만나 일어나는 이야기이고, 안개를 통한 은밀한 욕망의 표출과 감춤을 표현했다.
 
황 작가 본인이 자신의 작품에 대한 소고를 3편으로 연달아 에디터팀에 투고한 바 있으나, 본지의 김태희 작가 또한 같은 작품에 대한 짧은 비평을 작성하였고 그것이 본 칼럼의 내용이다. 황 작가 본인의 소고는 아래 링크에서 확인할 수 있다.
 
[<회기부정>에 관한 소고1]
[<회기부정>에 관한 소고2]
[<회기부정>에 관한 소고3]
 


 

일러스트=토끼풀

 
‘김’형의 교수 임용 소식 때문에 고향으로 돌아온 ‘나’는 끝내 ‘회귀’를 부정하고 서울로 돌아간다. ‘회귀부정(回歸不定)’이라는 제목은 이 소설의 내용을 명확히 관통하고 있다. 이 글에서는 ‘회귀부정(回歸不定)’의 내용전개 순으로 ‘나’가 고향을 대하는 태도와 내ㆍ외부 사건을 통해 어떠한 ‘부정(不定)’이 일어났는지를 다루어보려고 한다.
 
“다들 첫사랑은 못 잊는다고 하지 않는가. 나도 ‘고향’이라는 첫사랑을 못 잊었기 때문에 다시 돌아왔다.” ‘나’는 ‘김’형의 교수 임용 소식 때문에 고향 ‘안지’를 방문하게 된다. 기차 안에서 사랑을 나누는 청춘을 보고서 곧 닿을 ‘첫사랑’에 대해 생각한다. 덜컹이지 않는 기차에서 ‘나’는 ‘고향’을 ‘첫사랑’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저 문장에서 ‘첫사랑’은 ‘사랑’의 풋풋한 감정보다는 쓸쓸함이 더 짙게 남아있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사랑’은 지독한 무언가이다. 잊으려야 잊을수 없는…” ‘나’는 사랑을 이렇게 표현한다. 보통 잊지못하는 대상은 ‘후회’나 ‘그리움’같은 감정으로 남는 경우가 많다. 이는 ‘첫사랑’의 반대로 낯 뜨거운 사랑의 공세를 이어가는 ‘커플’을 통해, 그 감정을 더욱 부각하고 있다.

고향 ‘안지’는 ‘안지댐’ 때문에 안개가 많이 끼는 곳이다. 눈앞이 흐리고 운전이 힘들다는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안지 사람들은 안개를 싫어하지만, ‘나’는 그 반대로 생각한다. “안지의 안개는 ‘욕망’의 결정체다. 그래서 나는 안지의 안개를 긍정한다.” ‘나’는 안개를 ‘욕망’으로 보며, 겉으로 드러나있는 사람들의 ‘욕망’을 긍정한다. ‘나’는 뒤에 숨은 ‘무언가’를 싫어하는 태도를 보인다. ‘김’형에게 받은 안지의 특산품을 ‘의도 상자’라 생각하며 꺼리고, “타인에게 무엇을 받는다는 것은 ‘의도’를 받는 것 같아 기분이 썩 좋지 못하다.”라고 말한다.
 
안지의 ‘안개’는 하나의 ‘상징’으로 볼 수 있다. 상징은 “하나의 구체적인 보편으로서 글자 그대로의 의미와 비유적 의미를 동시에 지니는 이미지이다.”1) 안지의 ‘안개’는 ‘안지댐’ 때문에 끼는 자연현상이기도 하지만, ‘나’는 ‘안개’를 ‘욕망의 결정체’로 보며 지속해서 욕망에 대한 생각을 뻗친다. ‘안개’, 즉 ‘욕망의 결정체’를 부정하는 안지사람들을 “고고한 대가람(大伽藍)을 소유하고, 자신의 대가람에 한구석에 동상을 세우고 싶어하는 사람들로 생각했다.”라고 생각하며, 그들이 싫지만은 않다고 말한다. 서울사람과 다르게 어리숙한 미(美)가 있기 때문이다.
 
작중의 서울사람과 안지사람들의 차이는 무엇일까? 서울사람들은 욕망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그렇기에 안지의 ‘안개’처럼 욕망의 결정체를 볼 일도 없다. 서울사람들은 ‘눈 뜨고 코 베이면’ 역정을 낸다. 자신의 욕망이 훼손되거나 빼앗기면 그 자리에서 훼손되고 빼앗긴 감정에 충실히 한다. 고고한 대가람 속에 욕망을 숨기는 안지사람들과는 다르다. 그들은 ‘눈 뜨고 코 베이면’ 그들은 쭈뼛거리는 모습을 보인다. ‘나’는 이를 아름다움으로 느낀다.
 
안지와 서울의 다른 점은 사람뿐만 아니라 초밥 가게에서도 드러난다. “안지의 초밥은 서울과 다르다.”, “주방장은 초밥을 편안하게 자신의 템포로 만들려나 보니 빨리 먹으면 그들은 헛기침하거나 자신들의 타이밍에 맞지 않게 먹어서 곤란한 내색을 보였다.” 사람 많은 서울에서는 주방장이 여유로울 수 없다. 계속해서 빈자리를 꿰차는 손님들이 있고, 그 손님들은 초밥을 먹고 싶다는 ‘욕망’을 감추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서울에 있었을 때보다 맛있는 초밥을 천천히 먹었다. 하지만 “씹어먹으면서 타지에 온 듯한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왜 불쾌한 기분을 느꼈을까? 시간에 쫓겨야 하는 서울에서는 입에 들어갈 음식조차도 빠르게 씹어 위로 던져넣어야 한다. 서울에서 초밥을 먹을 때는 단 몇 번만 씹고 넘기겠지만, 안지에서는 그렇지 않다. 자신들의 타이밍에 맞추어주기를 원하는 주방장이 있고, 서울의 초밥보다 맛이 있으므로 음식이 입에서 머무르는 시간이 길다. 거기에서 오는 거북함과 더불어, ‘나’는 북적거림과 오랜 대기시간이 있는 서울에 익숙해졌기에 고향인 안지를 ‘타지’로 느낀다. 이 부분부터 ‘부정’의 징조가 올라오기 시작한다.
 
젊은 애들에게 시비를 걸렸던 ‘김’형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요즘 애들’보다 ‘요즘’이 더 무섭다”고 생각한다. ‘나’는 ‘요즘’이라는 단어에 빠진 나머지 자신을 “미지의 세계에 혼자 있는 사람” 이라 느끼고, “‘이곳은 나의 고향인데 왜 이렇게 멀게 느껴지는가?”, “나는 왜 나의 고향에 돌아왔음에도 이방인이 된 것인가?”라는 생각까지 한다. ’나‘는 고향 사람과의 대화보다도 서울에서의 일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며, 스스로 ’안지 사람‘ 즉 ’고향인‘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이미 ‘나’는 고향을 ’첫사랑’으로 그리고 있는 만큼 고향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며, 스스로 고향에서 ’벗어났다‘고 여긴다. 그렇기에 안지로 돌아와도 받을수 있는 느낌은 ’안정‘과 같은 편안함이 아니라 이방인이 된듯한 어색함과 불쾌함뿐이다.
 
“사실 나는 로스쿨을 수석으로 졸업했지만, 변호사 시험을 ’4번‘ 떨어졌고, 이번에 마지막 변호사 시험을 보고 안지로 내려왔다.” 어색함과 불쾌함을 느끼는 이유는 하나 더 있다. 스스로 고향에서 나왔다고 생각하지만, 새로 발붙인 서울에서 못 이룬 일이 있기 때문이다. “4번의 낙방은 나를 피폐하게 만들었다.” ’나‘는 계속된 낙방으로 심신이 지친 체 ’김‘형의 교수 임용 소식을 빌미로 고향에 내려왔고, 자위를 멈춘 체 현실을 직시한다.
 
만약 ’김‘형이 주선해준 일자리에서 일한다면, “생각해보면 서울에서의 삶보다 편하다. 부모님과 함께 오순도순 살고, 월급도 나름 나쁘지 않게 받고, 마음에 드는 여자와 결혼도 하고…” 위 조건에 부합하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속이 또다시 울렁거리기 시작해 구토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이미 안지에서 자신을 ’이방인‘이라 느끼는 와중에 위 조건에 부합하는 삶이 맞을 리가 없다.
 
’나‘는 ’김‘형에게 이렇게 말한다. “형 진짜 부러워요. 저는 벌써 4번 떨어지고 올해가 마지막인데, 형은 형이 원한 교수도 되고, 이쁜 사모님도 계시고, 좋은 차도 있고, 자기 집도 있고 진짜 너무 부러워요.”. 자신이 생각한 조건들의 삶을 ’김‘형에게 대입하고, 그에 모두 부합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김‘형’에게 부럽다는 말을 한다. 하지만 ‘김’형은 안지의 사람이기에 고향에 대한 이질감을 느끼지 못한다. 그는 안지의 안개에 몸을 맡기고 응큼하게, 혹은 발 빠르게 살아가고 있는 인간이며 ‘나’는 그저 그런 인간의 성취를 부러워할 뿐이다. ‘김’형은 “야! 그래도 나는 이제 여기서 평생 살아야 해. (중략) 계획대로 안 된다고 해서 너무 좌절하지 마. 나는 오히려 네가 부럽다 임마.”라고 말한다. ‘나’는 버티기 힘듦에도 고민은 털어놓지 않고 쓴웃음만 짓는다.
 
진토닉을 마시면서 ‘욕망’을 복기하는 동안, ‘나’는 ‘김’형이 추천해준 전통주를 기반으로 한 술을 마시지 않았다. “여태까지의 ‘나’를 부정하는 느낌”이 들어서 였다. 대신 “서울에서 자주 마셨던 글렌피딕 12년 산”을 시켰다. 전통주를 거부하고 ’서울’에서 자주 마시던 술을 시킴으로써 고향에 대한 확신을 다시 세운다. 여태까지의 ‘나’는 안지가 아닌 서울에서 사람 많은 초밥집에 들러 위를 채우고, 전통주가 아닌 위스키를 마시며 고향이 아닌 타향을 긍정한다. 고향으로의 회귀가 부정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정장에서 ‘김’형의 트레이닝복으로 갈아입고 산책을 하던 도중 ’나‘는 쓰레기장 근처의 거울을 보았다. 거울에는 순간 정장 입은 남자의 모습이 지나갔고, ‘나’는 “남자를 특별한 옷을 입은 남자로 생각했다.” ’나‘는 또 울렁거리는 속에 도망치듯 ’김‘형의 집으로 뛰어갔다. “’어쩔 수 없어 나는 편하게 살 거야. 편안하게 살 곳이 고향일 뿐이야.’” ‘나’는 ‘어쩔 수 없다’라는 생각을 한다. 지금 살아가는 데는 서울이 아닌 안지가 걸맞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마음은 그렇지 않다. 정말 그렇게 느꼈다면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뛰었을 리 없다.
 
‘김’형은 ‘나’를 조교직으로 취직시켜주었지만, 안개가 자욱이 낀 도로에서 하필 ‘김’형의 단과대학 ‘학장’과 접촉사고가 났다. ‘김’형은 학장이 떠나가자 찌뿌뚱한 몸과 안개를 핑계로 운전을 맡긴 ‘나’에게 화를 내기 시작했다. 그때 ‘나’의 눈앞에 현수막이 보였다. “살기 좋은 ‘안지’ 가족같은 ‘안지 대학교’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이 현수막은 ‘나’의 마음을 정확히 반대로 적어놓았다. “살기 싫은 ‘안지’ (가)족같은 ‘안지 대학교’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야’, ‘너’로 ‘나’를 부르는 ‘김’형, 욕망의 결정체가 지천에 깔린 고향, 고향에서 이방인이 되어버린 ‘나’. ‘나’는 정장으로 갈아입고 ‘김’‘교수’에게 마지막 인사를 올린다. 기차에 올라 안개가 걷힌 도시를 보고, 법무부 홈페이지에서 합격자 발표결과를 보았다. ‘나’는 씩 웃었다. 웃음의 의미는 ‘회귀부정’에 성공했다는 뜻이다. ‘나’는 변호사 시험에 합격했고, 더는 안개가 지천에 깔린 고향 ‘안지’로 돌아갈 이유는 사라졌다.
 


 
ㅡ참고문헌ㅡ
1) 로이스 타이슨. (2012). 비평이론의 모든 것: 신비평부터 퀴어비평까지 (윤동구, 역). 앨피. (원본 출판 2006년). p.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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