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과거의 시각으로 보아야 한다 – 전 세계가 겪고 있는 ‘역사 전쟁’

일러스트=토끼풀

 
세계사나 미국에 대해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1세기 전 미국은 물론 전 세계를 덮친 경제 대공황에 대해 모를 리 없을 것이다. 수많은 은행과 기업이 몰락하고, 엄청난 수의 실업자가 길거리에 나앉았던 미국 역사상 가장 암울했던 시기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기를 겪은 미국인들은 경제 대공황 시기를 떠올리며 오히려 “Good-Old-Days” 라 회상한다고 한다. 어째서 그들은 미국 역사상 가장 어려웠던 시기인 경제 대공황 시기를 겪고도 덤덤하게 “그때가 좋았지” 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옛날이 좋았지>

 
비교적 최근인 2009년, 워털루 대학교의 리처드 아이바크 교수 등은 이 문구를 인용하여 <Good-Old-Days bias> 라는 용어를 제시했다. 즉, “좋았던 옛날 편향”이라는 말은 간단하게 “요즘 애들은 버릇이 없다”와 같은 추억보정이나, 소위 “꼰대의 마음”을 설명하는 심리학적, 사회학적 용어이다. 고대 수메르나 이집트, 중국 등지에서의 기록물에서도 심심치 않게 나타난다는 이러한 어른들의 마인드가 학술적으로 연구하여 비슷한 패턴, 언행을 포착하지 못한다면 그것이 오히려 더 이상할 것이다.

다만 경제 대공황의 경우는 반드시 이러한 편향에 매몰된 것만은 아니다. 당시를 좋은 기억으로 회상한 사람들은 “비록 힘들었지만, 정부와 이웃이 힘을 합치고 이 위기를 점점 극복해나가는 시간을 잊을 수 없다”고들 말한다. 경제 대공황 당시 커다란 사회적 혼란이나 폭동이 전무했던 점은 해당 과거를 겪은 어르신들의 “나때는 말이야”가 꼭 틀리지는 않았다는 것을 시사한다.

다만 편향의 적용 범위는 매우 넓어서, 국가를 가리지 않고 정치에도 인용되고 있다. 예를 들어, 도날드 트럼프의 등장을 본 일부 시민들은 “선조가 이룩한 미국을 짓밟는다”며 한탄했고, 조 바이든은 “미국이 돌아왔다”며 트럼프 이전의 기존 미국 정치의 복원을 선언했다. 그러나 트럼프와 고보수주의 일원들은 반대로 오바마 등이 미국의 근본을 훼손시켰다며 “Make America Great Again”을 외쳤다는 것은 모두 아는 사실이다.

상반된 두 진영이 바라보는 미국 정치의 “옛날 시절”은 어떨까? 진보주의자들은 노예를 해방시킨 링컨이나, 1960년대에 마틴 루터 킹이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를 외치며 피부색, 성별과 관계없이 동등하게 대우받을 수 있는 국가를 꿈꿨던 시절을 바라볼 것이고, 보수주의자들은 낯선 이 땅에 자유로운 민주국가를 만들고자 맨손으로 개척해 나간 기독교 백인 남성들의 치열한 투쟁 혹은 나치와 소련 등 악의 세력에 맞서 승리를 쟁취했었던, 미국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승리들을 떠올릴 것이다. 그들은 “옛날 시절의 미국이 진정 올바르다”며 떠들며 과거로의 회귀를 바라지만, 그 옛날의 시점도 평가도 모두 제각각인 것이다.
 

미국의 “옛날 시절”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기념물

 


 
<역사 전쟁, 한국만이 예외가 아니다>

 
이렇듯 모두가 옛 시절에 대해 대체적으로 좋은 평가를 내리는 것은 같으나, 이들이 모두 같은 시각으로 역사를 바라보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성향 때문에 과거에 대한 증오와 부끄러움으로 인해 기존의 알려진 역사를 청산하려는 무브먼트가 있다. 미국의 보수주의자들은 200여년 전 맨땅을 개척해나가던 자유민들의 정신을 본받고 계승하려 하지만, 진보주의자 입장에서는 그들은 침략자로 인식될 뿐이다. 콜롬버스부터 시작해서 원주민들을 몰아내고 미국 땅을 넓혀갔던 장군, 탐험가들의 동상이나 기념비를 훼손하는 움직임이 대표적이다.

우리도 최근 정율성 기념공원 논란과 홍범도 재평가 논란을 통해 때아닌 역사 전쟁을 겪었다. 정율성의 경우는 광주 시민에게조차도 잘 알려지지 않았기에, 기념공원 조성 이후 뒤늦게 행적이 주목받아 논란이 된 이례적인 사건이지만, 우리에게 이미 잘 알려진 홍범도의 경우는 미국에서 벌어지는 역사 논쟁의 패턴과 상당히 흡사하다. 항일 무장투쟁의 실제 전과나 검증에 대한 새로운 연구결과들이 끊임없이 나오며 새로운 행적이나 성과가 밝혀지는 문제 정도가 아니라, 정체성 논란까지 합쳐지며 “자유 민주주의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예전처럼” 홍범도에 대해 기념할 수 없다는 움직임이 발생한 것이다. 다만 이는 한국에서는 드문 사건일지 몰라도, 지구촌으로 확대해 보면 드문 움직임은 아니다.

이는 행동은 반대로지만 “상징정치”가 보여주는 패턴과 굉장히 유사하다. 상징정치는 정치적인 권위를 가지고자 어떠한 이념이나 인물을 상징으로 내세워 선전하는 행위인데, 프랑스의 극우정당인 “민족전선”이 해마다 잔다르크를 숭배하며 당의 상징으로 삼는다던가, 혹은 단식투쟁을 하던 이재명 대표에게 이순신 장군이나 유관순 같은 역사위인들의 영혼이 붙어 응원하는 포스터를 공유하는 것이 좋은 예이다.
 


 

독립운동가 홍범도(왼쪽)
작곡가 정율성(오른쪽)

<역사는 과거의 기준으로 평가되어야>

 
이러한 역사 논쟁이 불거지는 원인은 과거에 대해 현재의 가치를 적용시키려는 잘못된 접근법으로부터 탄생한다. 이러한 접근법은 수많은 논란과 오류를 불러오기 마련이다. 일제 당시, 사회주의 사상을 수용한 항일 및 민족운동가들은 지금 대한민국의 정서에 따라 모두 서훈을 박탈당하고 저평가당해야 하는 것일까? 세종대왕이나 이순신 장군일지라도 예외는 아니다.

한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두 위인에게 이런 식의 접근법을 시도할 개인이나 단체가 있겠는가 싶었으나, 마냥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뿐만 아니라 지금 동학농민운동에 참여한 농민군들을 독립운동 유공자들로 포함시켜야 된다는 민주당의 움직임도, 자신들이 독립운동가의 정신을 계승한다는 쇼맨십을 보여주기 위한 잘못된 상징 정치의 결과물일 것이다. 이처럼 잘못된 역사 접근법은 이념을 가리지 않으며, 당연히 이에 대한 피로는 고스란히 국민들에게 전가된다.

우리는 “좋았던 옛날 시절”을 말할 때, 과거에 머물러 있던 정서와 감성을 그대로 대입시켜 추억을 회상한다. 어릴 때 가지고 놀았던 재미있던 장난감을, 어른이 된 지금도 그 때처럼 즐길 수는 없지 않겠는가? 반대로 이러한 역사 논쟁에서는 현재와 과거의 사회문화, 정서, 정치적 환경을 아무렇게나 섞은 혼잡한 틈에서 어떻게든 유리하게 점유율을 차지하려 한다. 그렇기에 이러한 상징정치에 휘말리지 않고 과거를 통찰할 수 있는 시각이 중요해지고 있다. 프랑스의 극우 정당이 잔다르크를 상징화한다고 해서 잔다르크가 반 좌파가 아닌 것처럼, 특정 정당이 역사인물을 현대 정서를 대입시켜 자기 진영의 상징이나 반국가 대상으로 낙인찍으려는 시도는 엄연히 배제되어야 할 것이다.
 


 
Refer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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