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 사안의 판단을 거부한다” – 혼란한 세계에서 ‘판단 거부’의 미학

일러스트=토끼풀

 
 요즘 뉴스들 보면 흉흉한 소식들이 많습니다. 출구가 안 보이는 인플레이션, 기후변화로 인한 극단적인 기상현상, 필수의료의 붕괴, 인구 감소와 고령화, 서이초 사건, 대림역 흉기난동 사건 등. 해외라고 좋은 소식들이 들어오지는 않습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끝날 가망이 없고, 독일을 포함한 몇몇 유럽 국가에서 극우가 득세하고 있으며, 이스라엘의 민주주의 후퇴, 중국의 확장주의적 행보는 우리를 당황스럽게 합니다. 기후 변화로 고생하는 지역들도 많습니다.

 분명히, 우리 사회는 해결해야 할 여러 문제에 직면했습니다. 그러나 인터넷 문화는 이 문제들을 해결하기는커녕 더 악화시킵니다.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구조적인 문제는 뒷전이고 범인부터 찾으려는 태도, 본질적인 해결책보다는 대증요법만을 요구하는 태도, 엉뚱한 사람을 범인으로 몰고가는 무고한 신상털이, 한쪽 편을 무비판적으로 드는 진영논리, 찬반의 대상이 다닌 것마저 정치적 찬반토론으로 만드는 만물의 정치화, 극단적인 사람들끼리 똘똘 뭉쳐 극단성을 자가증식하는 필터 버블, 차별과 혐오의 레토릭으로 인한 담론장의 황폐화 등. 이런 문제들 때문에 지식인들은 현대 온라인 문화를 위험하다고 판단합니다.

 이런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제대로 살아가려면, 그리고 더 나아가 세상의 문제를 제대로 된 해결책으로 극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는 스스로 자주 쓰는 한 가지 행동방식을 제안하고 싶습니다. 바로 특정 사안에 대해 “나는 사실 판단이든 주관적 의견이든 특정 사안에 대해 판단할 의무나 역량이 없으므로 사안을 판단하지 않겠다”는 ‘판단 거부’의 태도입니다. 모든 사건에 대해서 일일히 판단하는 것을 거부하며, 많이 알고 관심 가질 수 있는 것에만 확실한 의견을 가지는 태도이지요.

 한 예를 들자면, 저는 촉법소년의 범죄 문제에 대해 판단을 거부합니다. 저는 청소년들의 범죄를 연구하는 학자나 연구원이 아니고, 경찰/검찰 혹은 법무부 고위직에 있지도 않아 촉범소년 범죄를 책임질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는 청소년 형사정책에 대한 지식이 아예 없기 때문에, 촉법 소년 사안에 한해서는 의견을 가지지 않거나 설령 의견을 갖더라도 외부에 표현하는 것을 거부합니다. 촉법소년 범죄에 대한 판단을 거부한 저는 이 사안만큼은 전문가들의 결론을 존중할 생각입니다.

 흔히 커뮤니티에서 말하는 “중립기어를 놓는” 사람들과 비슷해 보이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물론 중립기어를 놓는다는 사람들은 지금 이 순간에는 판단을 하지 않으므로 ‘판단을 거부’하는 사람과 공통점을 가집니다. 하지만 중립기어를 박는다는 사람들은 판단을 보류할 뿐이지, 제대로 된 정보가 들어오는 순간에는 판단을 아끼지 않는다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반면에 ‘판단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제대로 된 정보가 들어오더라도 판단을 하지 않습니다. 애초에 이 사안은 추가 정보와 무관하게 내가 판단할 일이 아니라고 선언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립기어를 놓는다”는 사람은 사건을 적극적으로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섣부르게 판단하다”고 비난하는 경향이 있는데, ‘판단 거부’는 그런 비난조차 거부합니다. 애초에 담론에 끼지 않기로 선언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판단 거부’ 선언은 현대 사회에서 많은 미덕을 드러내는 태도입니다. 판단 거부를 한다는 것은, 첫째, 이해를 위해 전문성이 필요한 분야를 함부로 재단하지 않겠다는 이야기입니다. 나는 이 분야를 모르기 떄문에 해당 분야를 섣불리 판단하려 들었다간 잘못된 결론을 낼 수 있으니, 해당 분야 종사자와 전문가들에게 판단을 위임하는 것이 낫다는 것이 ‘판단 거부’의 요지입니다.

둘째, 해당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과 전문가의 판단을 존중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결론이 어떻게 나오든 존중하기 때문에, 결과가 내 마음에 들지 않게 나왔다고 해당 전문가들이 어용이라던가 어느 진영에 매수되었다던가 하는 인신공격을 하지 않으며, 각종 음모론에 빠지지도 않습니다. ‘판단 거부’는 그러한 문제를 막을 수 있습니다.

셋째, 섣부른 추측을 경계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외부자들은 모를 정보들로 인해 불필요한 루머와 억측, 가짜뉴스가 나돌아다니는 현실에서, ‘판단 거부’의 태도는 잘못된 여론몰이를 주도하거나 거기에 끌려다니는 것을 차단할 수 있습니다.

넷째, 각종 차별과 혐오의 레토릭에 동조하지 않겠다는 이야기입니다. 각종 사안에서 특정인들이 (한국 맥락에서) 조선족이나 성소수자처럼 사회적으로 인식이 나쁜 집단에 속했을 경우, 그 집단전체를 적대하고 해당 집단을 향한 차별, 혐오가 증폭될 수 있습니다. 차별 혐오 그 자체도 심각한 문제이지만, 이 경우 문제가 감정 싸움으로 전락하여 제대로 된 문제 해결이 어려워집니다. ‘판단 거부’는 그러한 역기능적 차별과 혐오를 거부하는 기능을 수행합니다. 다섯째, 특정 사건에 대한 ‘과몰입’을 경계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사건 하나하나에 일희일비하여 “사건이 내 마음대로 해결되면 이 나라는 만사형통이 되며 더 나아가 내 마음이 풀리는” 양 구는 태도는, 요즘 ‘서이초 사건’을 통해 부각된 진상 손님이나 학부모 같은 태도로 돌변할 수 있습니다. ‘판단 거부’는 “사건 하나가 내 마음대로 해결되지 않는다고 내 마음이나 세상이 끝나지 않는다”는 감정적 절제 장치로 기능하여, 스스로 진상이 되는 매커니즘을 차단합니다.

물론 전 무조건적으로 사안을 판단하지 않는 태도가 옳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잘 모르는 사안에 한해서 ‘판단 거부’를 한다면 모를까, 모든 사안에 ‘판단 거부’를 하는 태도는 자칫 시민으로서의 책임감과 의무를 회피하는 행동일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자기 직업이 해당 사안을 처리하는 것이라면 판단을 기피하는 것은 그 자체로 직업윤리 위반입니다. 어떤 정치인에게 이태원 참사의 책임 소재를 물었는데 “나는 그 사건을 판단하지 않는다”고 답한다면, 저는 해당 정치인을 부정적으로 평가할 것이고 낙선운동을 벌일지도 모릅니다. 정치인이면 사회적인 큰 사건을 의식하며 논평하고 해결할 의무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어찌보면 ‘판단 거부’는 사실 내가 잘 모르는 분야나 직업 바깥 영역에나 해당되는 특권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건 하나하나에 사람들이 과도하게 몰입하고 온갖 억측과 가짜뉴스, 음모론과 차별, 혐오성 발언이 넘쳐나는 현실에서는 ‘판단 거부’의 태도가 유용할 수 있다고 봅니다. 사건 하나하나에 일희일비하느라, 그리고 온갖 정신나간 주장들을 보느라 정신적으로 힘들다면, ‘판단 거부’의 태도를 가지시는 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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