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in Movie] 《브레이브 하트》: 스코틀랜드 영웅 윌리엄 월리스 & 프랑스의 암늑대 이사벨 ㅡ 제멋대로 쓰는 역사

《브레이브 하트》(1995)) / 이미지=IMDb

 
스코틀랜드의 독립전쟁의 아이콘 윌리엄 월리스

1995년작 《브레이브 하트(Brave Heart)》는 스코틀랜드의 독립전쟁을 배경으로, 전설적인 영웅 윌리엄 월리스(멜 깁슨)와 영국의 왕세자비 이사벨(소피 마르소)의 로맨스를 아름답고 비극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 영화는 아카데미 작품상과 감독상을 받으며 상업적 흥행은 성공했지만, 영국에서는 심각한 역사 왜곡이라고 주장하며 상영 금지까지 요구했다.

그도 그럴 것이, 에드워드 1세는 영국인의 입장에서 보면 영국사의 위대한 지도자이자 현명한 군주였는데 영화 속에서는 형편없는 악당으로 묘사되었기 때문이다. 반면,《브레이브 하트》 개봉 후 스코틀랜드에서는 영국으로부터의 분리 독립을 주장하는 여론이 더욱 거세어졌다. 멜 깁슨을 닮은 월리스의 동상이 세워지기도 했다. 그들에게 월리스는 폭군에 의해 죽임을 당한 민족의 영웅이자 순교자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진실은 무엇일까? 누가 악인이고 누가 영웅일까?

역사 교과서나 시대극은 종종 사실을 심하게 왜곡한다. 영화에 따르면, 윌리엄 월리스는 소년시절 영국의 폭정으로 아버지를 잃고 삼촌 밑에서 자랐다. 그는 자신의 연인이 겁탈당하고 살해되자 복수에 나서는데, 이러한 사건이 실제로 발생했다는 어떤 사료 기록도 없다. 게다가 그는 농민이 아니라 귀족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월리스의 혈통에 대한 정확한 단서는 없지만, 그가 웨일스인 리처드 월리스의 자손으로 하급 귀족에 속한 가문 출신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가 이끌었던 전쟁도 영국의 식민 지배에 대항하고 자유를 찾기 위한 민중의 봉기에서 출발한 게 아니라, 영국 왕과 스코틀랜드 귀족 계급 간의 영토를 둘러싼 권력투쟁이었다. 에드워드 1세는 권모술수에 능한 잔혹한 폭군, 그의 아들 에드워드 2세는 나약하고 덜떨어진 사람으로 설정되어 있지만, 이것도 사실과 매우 다르다.
 

작가 미상, 에드워드 2세의 초상, 1590~1610년경, 국립 초상화 갤러리

 
영국의 역사책은 에드워드 1세를 법과 제도를 정비하고, 영국 의회의 기초를 쌓은 현군으로 기록한다. 또한 에드워드 2세는 키가 훤칠한 미남자에다가 성격도 좋았고, 시와 연극을 즐기는 등 지성과 교양이 뛰어났다고 한다. 이 불쌍한 부자는 월리스를 영웅으로 만들고, 그와 왕자비의 사랑을 더욱 빛나게 하는 소도구로 이용하기 위해 지질한 캐릭터로 묘사되었을 뿐이다.

월리스의 이름은 그가 죽은 지 150년 후에 쓰인 15세기 장편 서사시『엘더슬리의 기사 윌리엄월리스경의 공적(The Acts and Deeds of Sir William Wallace, Knight of Elderslie』으로 유명해졌다. 시각장애인인 탓에 ‘블라인드 해리(Blind Harry)’라고 불린 한 중세 시인이 쓴 이 작품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전설에 기반을 두고 있다. 1995년 영화는 이 서사시를 바탕으로 제작되었다.

블라인드 해리는 민족주의적인 관점에서 월리스의 영웅성과 애국적인 면모를 부각하려고 했다. 블라인드 해리의 시는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월리스에 대한 전설이 나온 근원지였다. 월리스 주변에서 많은 신화가 생성된 이유 중 하나는 그의 삶에 대한 역사적 자료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역사가들은 대체로 그의 이야기가 노골적으로 꾸며낸 허구로 가득 차 있다는 데 동의한다.

월리스는 다른 스코틀랜드 귀족들과 연합해, 스털링 브리지 전투(Battle of Stirling Bridge)에서 영국군에 대승을 거두고 기사 서훈을 받았다. 그는 ‘스코틀랜드의 수호자이자 군 지도자’라는 명예로운 칭호도 얻었다. 사실, 월리스는 폭력적이고 잔인한 게릴라전 지도자였다. 그의 추종자들이 늘어남에 따라 월리스는 영국으로부터 점점 더 많은 땅을 탈환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행운은 계속되지 않았다. 1298년, 에드워드 1세가 이끈 폴커크 전투(Battle of Falkirk)에서 치명적인 패배를 당했고 군사적 명성은 누더기가 되었다.
 

1297년 스털링 브리지 전투를 묘사한 19세기 삽화

 
1305년, 7년간 숨어 살던 월리스는 끝내 잡혀 끔찍한 죽음을 맞이했다. 알몸으로 말에게 질질 끌려 시내를 돌아 스미스필드 마켓(Smithfield Market)에 도착한 월리스는 사지를 밧줄에 묶어 말이 각각 네 방향으로 출발해 네 조각으로 찢어 죽이는 거열형을 당했다. 또, 거세된 후 내장이 도려내어져 불태워졌으며 머리는 잘렸다. 그의 머리는 창끝에 꽂혀 런던 브리지에 전시되었으며, 팔다리는 스코틀랜드 전역에 흩어져 사람들에게 영국에 반역하면 어떤 처벌을 받게 되는지 경고의 메시지를 전했다.
 
윌리엄 월리스를 둘러싼 전설은 그를 스코틀랜드의 국가 영웅으로 만들었다. 그는 지금도 계속되는 스코틀랜드 독립운동과 자유의 상징적 인물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착오가 있다. 월리스 자신은 애국적 목표보다는 개인의 권력과 영광을 추구하는 잔혹한 전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전설은 스코틀랜드 독립 역사에서 중요한 족적으로 남았으며, 앞으로도 시인, 음악가, 영화 제작자에게 계속 영감을 줄 것이다.
 


 
역사는 그녀를 ‘프랑스의 암늑대’라 부른다

<브레이브 하트>, 이사벨 역의 소피 마르소

 
이사벨과 그녀의 아들 에드워드 3세의 아버지로 설정된 월리스와의 로맨스 역시 완전한 허구다. 14세기 중세 유럽의 공주 이사벨(Isabelle de France)은 일명 ‘프랑스의 암늑대 이사벨’로 불렸다. 그녀는 보기 드문 미남자로 소문이 자자했던 프랑스의 필립 4세와 나바라의 후아나 1세의 딸로 매우 지적이고 아름다웠다고 한다. 12세 때, 영국의 에드워드 2세와 결혼했고, 월리스가 처형될 때 겨우 10세였다. 따라서 월리스와의 로맨스는 정황상 사실이 아니다.

한편, 에드워드 2세는 양성애자로 알려졌는데, 자신의 동성 애인들을 지나치게 총애하여 정부의 요직에 기용했다. 이사벨은 남자와 사랑에 빠져 그녀를 무시하는 남편, 국왕의 총애를 믿고 자신에게 방자하게 굴고 그녀의 아들에게 위협이 되는 연적에게 당한 수모를 오랫동안 참으며 속으로 분노를 삭였다. 결국 더 이상 인내할 수 없었던 그녀는 돌연 친정인 프랑스로 돌아간다. 여기서 아들을 부유한 프랑스 귀족의 딸과 결혼시켜 그 지참금으로 군사를 양성하고 영국의 망명 귀족들을 규합하여, 마침내 영국 침략을 감행한다. 결국 1326년, 에드워드 2세는 아내인 이사벨의 쿠데타로 왕위와 목숨을 잃었다.

이사벨에게 프랑스의 암늑대란 별칭이 붙은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녀가 남편과 그의 연인을 잡아 잔인한 방법으로 죽인 무서운 여성이기 때문이다. 보기에 따라서는 정치적 수완과 능력을 발휘하여,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고 원수들을 처단한 여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역사는 그녀를 그런 긍정적인 방식으로 보지 않았다.

목축을 기반으로 하는 서양문명에서 늑대는 용맹의 상징으로서 경외심의 대상인 동시에, 애써 기른 가축을 해치는 악의 표상이자 공포의 대상이었다. 더구나 기독교가 세를 장악하면서부터 늑대는 악마, 마녀, 늑대 인간과 연관되었고 절대악의 이미지로 굳어졌다. 여자에게 암늑대라는 별명을 붙인 것은 남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녀는 남편을 죽인 포악한 독부였기 때문이다.

야사에 의하면, 그녀가 시뻘겋게 달군 쇠꼬챙이로 에드워드 2세의 항문을 찔러 죽였다고 한다. 이사벨은 에드워드 2세뿐 아니라, 그의 총신이었던 데스펜서 부자에게도 가혹했다. 아버지 데스펜서는 알몸으로 끌고 다니다 사지를 절단하고 장기를 적출해 고통스럽게 죽게 했다. 아들이자 남편의 연인인 휴 데스펜서도 발가벗겨 몸에 모욕적인 성경 구절을 새겨 넣은 채 교수형시켰고, 사지를 절단하고 성기까지 잘라 시신을 영국 전역에 분산 매장하게 했다. 이런 냉혹한 복수 때문에, 그녀는 민심을 잃고 들끓는 비난을 한몸에 받았다.
 

일러스트=토끼풀

 
그러나 이 흉흉한 소문이 과연 사실일까? 그녀에게 ‘암늑대’라는 별칭을 붙인 어떤 적대적인 정치 세력, 혹은 그녀가 부당한 대우로 고통받는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여성으로서의 부덕과 인내를 당연시했던 당시 가부장적 사회체제가 붙인 낙인은 아니었을까? 아니면 그녀는 정말로 천사의 얼굴을 한 악녀였을까? 우리가 700년 전의 역사적 진실을 알 길은 없다.

그러나 이사벨은 에드워드 2세의 장례식 때 펑펑 울었고 그 심장을 꺼내 유리병에 보관하다가, 죽을 때 자신을 그의 심장과 함께 묻어달라고 했다고 한다. 그녀는 남편을 사랑했을까? 아니면, 살아서 자신을 슬프게 한 남편을 죽어서는 곁에 두고 독점하려는 소름 끼치는 집착이었을까? 이것 역시 우리는 알 도리가 없다. 인간은 영원한 미스터리다.

원하던 복수를 하고 권력을 잡은 그녀의 인생은 행복하지 않았다. 프랑스의 암늑대 이사벨은 당시 15세였던 어린 아들 에드워드 3세를 왕위에 앉히고, 섭정 모후가 되어 자신의 정부 로저 모티머와 함께 잠시 국정을 장악한 듯했다. 그러나 그녀의 권력은 오래가지 못했다. 에드워드 3세는 모티머를 살해하고, 어머니를 수도원에 유폐시켰다.

사실, 이 영화에는 실제 역사와 다른 내용들이 많다. 영화는 애틋한 사랑과 비극적인 운명, 애국심, 정의, 희생의 각종 아름다운 날실 씨실로 짜인 감동적인 스토리텔링에 빠져드는 사람들의 심리를 공략한다. 역사책도 다르지 않다. 누가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역사를 기록했는가에 따라 한 인물이 영웅도 되고 악인도 된다. 역사가 기록한 대로 이사벨이 정말 아름답지만 표독한 악녀였는지, 단지 마키아벨리적인 의미에서 영명하고 결단력 있는 정치가였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많은 경우, 역사적 진실은 곧잘 무시된다. 중요한 것은 권력자가 어떤 스토리를 만들어내며 그것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먹히며 다수가 무엇을 믿는가이다. 더구나 영화는 역사책이 아니라 꾸며낸 ‘드라마’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멜 깁슨과 소피 마르소가 월리스와 이사벨에 대한 아무리 멋진 환상적 이미지를 만들어냈더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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