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채식주의자>에 관한 소고 2 -불쾌함의 미학-

[한강 <채식주의자>1)에 관한 소고 1 -불쾌함의 미학-]
 

일러스트=토끼풀

 
채식주의자에 관하여

사람들은 ‘영혜’를 보고 ‘채식주의자’라 한다. 하지만 영혜는 ‘채식주의자’가 아니다. ‘비육류 선언’을 한 사람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그녀를 두고 ‘채식주의자’라고 말한 이유는 타인의 이해 못 할 행동을 이해하기 위해 상대방을 무언가의 틀 안에 집어넣어서 이해하려 하기 때문이다.

잘 생각해 보아야 한다. ‘가라타니 고진’의 <윤리21>에서 ‘정신분석을 단순하게 육아나 교육에 응용해서는 안 된다.’라는 목차가 있는데 내용을 간단히 이야기하자면, 무슨 범죄가 일어날 때 범죄자와 오래 본 사이도 아니면서 정신과 의사들이 무조건 ‘~~ 때문이다.’라는 말을 남발하면 안 된다. 그리고 결과가 나옴으로써 원인을 알 수 있다. 즉 ‘A = B’라는 식은 ‘B’라는 결과 덕분에 A를 알 수 있고 ‘A = B’다 라는 식이 나온다. 원인이 ‘A’라고 해서 무조건 결과가 B라는 나오지 않는다. 라고 고진은 설명한다.

이처럼 우리는 피상적인 상태를 보고 타인을 틀 안에 가둬서 보려고 한다.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에서 ‘종이 자르는 칼’을 설명할 때, ‘종이 자르는 칼’은 종이를 자르는 칼 이외의 물성(物性)을 지닐 수 없고, 인간은 그와 달리 고정된 물성이 없다고 한다. 이처럼 인간을 고정된 물성으로 보려는 것은 타인을 틀 안에 가둬서 보려고 하는 시도가 아닐까 싶다. 그러니 우리는 좀 더 세상을 넓게 넓게 볼 줄 알아야 한다. 가둬지기에는 너무 넓은 세상이다.
 


 
마치며

한강의 <채식주의자>는 불쾌함의 미학이 있다.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영혜’의 행동은 기이하다. 그리고 정상적인 범주를 넘어선다. 소설의 ‘해설 장’에서도 “정상성을 벗어난 인물들을 찾아나선 ‘정상적’인 인물들은 스스로 감추었거나 잊었던 트라우마와 조우한다. 마치, 애초에 그들이 그토록 닿으려 했던 목적지가 그 깊은 상처였던 것처럼.”(p. 240) 애초부터 작가는 불쾌함에 초점을 뒀다. 이 책을 읽었을 때, 술술 잘 읽힌 이유도 ‘불쾌함’에 있었을 것이다.
 

한강, 채식주의자
다자이 오사무, 인간실격

<채식주의자>의 ‘영혜’와 <인간실격>의 ‘요조’의 공통점은 ‘무저항의 기저’가 근본적으로 깔려있다. 하지만 ‘영혜’는 자신에 대한 압박이 존재하면 저항하고―비육류 선언 이후를 기준으로 말함.―, ‘요조’는 압박이 들어와도 저항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다.

영혜는 자신의 수지타산과 거리가 멀면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 이러한 모습을 보았을 때 영혜가 현대인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작가는 이러한 모습을 극도로 보여줘서 이점을 숨기려 했지만, 숨겨지지 못했다. ‘영혜’를 통해 알 수 있는 점은 어쩌면 그녀는 또 다른 형태의 현대인이다.

“기껏 해칠 수 있는 건 네몸이지. 네 뜻대로 할 수 있는 유일한 게 그거지. 그런데 그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지.”(p. 214) ‘인혜’가 ‘영혜’에게 말한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영혜는 자신을 해치는 것이 아니다. ‘회귀본능’ 즉 그녀는 태초로 돌아가려 한다. 옛말에 인간은 흙에서 왔다고 말했던 것처럼, ‘영혜’가 계속 밥을 살이 빠지는 것은 태초로부터 돌아가기 위함이다. 어떤 면에서 보면 그녀는 죽는 것이 아니라 처음으로 돌아가려고 한다. 처음으로 돌아간다면 자신의 운명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처음부터 잘못된 자신의 생을 바꿔보려고 했을까?

이 작품을 ‘페미니즘’적으로 해석하려는 사람들이 많아 보였다. 하지만 페미니즘적으로 해석하면 안 된다. 페미니즘적으로 해석이 된다고 해도 그렇게 해석하면 안 된다. 왜냐하면, ‘영혜’의 삶은 결국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고, 자해 밖에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페미니즘적으로 해석해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오히려 정신분석학적으로 분석한다면 의미가 있을 것이다.―

<채식주의자>, 정말 재미있는 책이었다. ‘불쾌감의 미학’을 아주 잘 표현한 책이다. 특히 여성의 몸에 관한 표현을 할 때는 아주 기가 막혔다. 한강 작가가 여성이라서 그런지 여성의 몸에 관한 표현을 할 때 세심함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이 작품이 ‘장편소설’이라고 불려도 될지는 잘 모르겠다. ‘장편소설’이라 말하기에는 부족하다. 오히려 ‘중편소설’에 어울린다. 그리고 나는, <채식주의자>를 한 번 더 읽을 시간에 박완서 선생의 책을 한 번 더 읽을 것 같다.
 


 
※ 참고자료
1) 한강. (2007). <채식주의자>. ㈜창비 / 위 작품 내용을 인용할 때 쪽수 표기와 이텔릭체로 표기하겠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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