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상수 영화작품을 통한 죄와 무의적 행위의 차이 –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강원도의 힘>을 중심으로
죄(有義的)가 되는 행위와 무의적(無義的) 행위에 의한 피해는 말할 수 있는 범위가 다르다. “덕은 정념과 행위에 관련된 것인데, 유의적(有意的) 정념이나 행동에 대해서는 칭찬과 비난이 가해질 수 있고, 또 무의적(無意的) 정념이나 행동에 대해서는 용서하는 수도 있으며, 또 때로는 가엾게 여기는 경우도 있으므로, 유의적인 것과 무의적인 것을 분명히 구별하는 것은 덕의 본성을 연구하는 사람에게 꼭 필요한 일이고, 입법자가 상을 주는 데에도 유용하다. 강제로 하게 되거나 혹은 무지로 인하여 하게 되는 것들은 무의적인 것으로 생각된다.”1) 이렇듯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죄와 무의에 관한 정의를 명확하게 해놓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어서 “강제적이라 함은 움직이게 하는 시초가 외부에 있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런 경우, 행동하는 사람 혹은 정념을 느끼는 사람은 이 시초에 전혀 관여하는 바 없다. 예를 들면, 바람에 의하여 불려가거나 혹은 그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들에 의하여 어디론가 붙들려가는 것이 바로 이런 경우이다.”2)라고 말했다.
최근 사회를 되돌아보면 악의를 가지고 행위를 하는 것이 아닌―죄를 짓는 것이 아닌―, 무의적 행위로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경우가 많다. 이전까지 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를 합당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무의적 행위든 죄든 간에 남에게 피해를 줬다면 그 행위를 꾸짖고 잘못을 일깨워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홍상수 감독(이하 홍상수)의 영화작품을 보고 난 뒤 이러한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다. 홍 감독은 철저하게 <니코마코스 윤리학>의 유의적·무의적 행위에 관한 논리를 따르고 있었다. 그리고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강원도의 힘>을 통해서 그 부분을 증명해 보였다.
홍상수의 두 작품을 가지고 홍 감독의 전체적인 세계관을 이야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홍상수 영화작품을 통한 죄와 무의적(無義的) 행위의 차이’는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1.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을 중심으로
홍상수의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을 통해서 ‘죄와 무의적(無義的) 행위의 차이’를 말하자면, 홍 감독에게 악의 없는 행위, 무의적 행위는 죄-더 정확히 말하면 윤리적인 죄-가 아니다. 우선 가볍게 말하자면, 민수가 질투심에 눈이 멀어 효섭과 민재를 죽이지만, 그 이후에 민수가 경찰에 잡혀간 장면은 넣지 않았다.
사실 민수는 경찰에 잡혀갔을 것이다. 그러나 홍상수에게 있어서 그 부분은 중요하지 않았다.3) 민수가 칼로 효섭과 민재를 죽인 장면만 보여준 이유는 민수가 자신의 윤리관념 • 본인의 생명보다 더 질긴 ‘사랑’이라는 이념으로 저지른 그 상황 자체를 보여 주는 것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경찰에 잡혀간 장면은 필요가 없다.
이룰 수 없는 사랑에 화가 나서 우발적으로 무지하게 행동한 민수의 결론은 살인이었다. 그렇지만 민수가 살인을 통해 죄책감을 느끼는 장면은 필요가 없었다. 그뿐이다. 오히려 이 살인을 통해 효섭과 민재와 민수와 보경의 허위의 모습들 모두 발가벗길 수 있었다. 아마 이 장면을 본 관객들은 허위가 벗겨진 충격 때문에 민재를 보고 욕하기보다는 그 자리에서 멍해졌을 것이다.
2. <강원도의 힘>을 중심으로
《강원도의 힘》에서는 경찰(김유석)은 대학생 지숙을 어떻게 해보려고 시도하다가 실패한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경찰이 불륜을 저지르려는 시도’에 있다. 흔히 경찰이라는 이미지를 생각하면, 도덕적이고 청렴결백한 직업군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강원도의 힘》에서 경찰은 도덕적 • 청렴결백적인 이미지를 다 집어던지고 불타오르는 사랑이라는 정념에 뛰어들었다.
이는 홍상수가 의도한 장면, 즉 ‘미장센’이다. 더 쉽게 말하자면, 경찰이란 직업을 갖고 있음에도 사랑이란 감정 앞에서 이성을 잃는데, 하물며 다른 사람이라고 안 그러겠는가?라는 의문을 관객에게 넌지시 던졌다.
이 장면에서도 경찰의 불타오르는 감정에 앞서 어떻게 해보려는 시도를 한 것이다. 남주인공은 ‘남에게 피해가 갈 수 있겠다, 남에게 피해를 끼쳐야지’라는 생각으로 한 행위가 아니다. 위 장면이 끝난 뒤 이 일도 유야무야 넘어가게 된다.4)
-암벽 위에서 위험하게 무리해서 경치를 구경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저런 사람들은 머리가 나빠서 그런 건 아닌 것 같고 육체적으로 우리하고 뭔가 다른 게 있는 것 같아. 그 다른 뭔가가 ‘저렇게 해도 괜찮다.’ 그런 자신감을 심어주는 거라고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 할 수 있겠어? ”
《강원도의 힘》 中
개인적으로 이 대사가 ‘죄와 무의적(無義的) 행위의 차이’를 명확하게 알려줬다. ‘육체적으로 다르다’라는 의미는 아마도 정념이 이성을 앞지른다는 은유로 보인다. 머리는 나쁘지 않지만 정념에 따라 행동하는 걸 보아서는 외관상 머리까지 나빠 보이는 것은 피상일뿐이고, 실상 정념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머리가 나빠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무의적 행동일 뿐이다.
결론
“샤를 테송은 홍상수의 주인공들이 어른의 몸과 아이의 정신을 가진 그 불일치 때문에 괴로워한다는 점을 들어 루이스 부뉴엘이 떠오른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 비유는 거기까지다. 테송은 그 생각을 더 밀고 나아가지는 않는다.” –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 中
샤를 테송이 말한 것처럼 어른의 몸과 아이의 정신을 가진 홍상수의 세계관 사람들은 무의적 인간이다. 악의 없는 행위 즉 무의적 행위로 남에게 피해를 준 것은 죄가 아니다. 그렇기에 이를 교화할 수도 없고 어디서부터 잘못 됐는지 말하기도 애매하기 때문에 정이 떨어진다. 그래서 그 사람이 불쌍해지거나, 그 사람을 용서하거나, 그 사람과의 관계를 끊게 되는 선택지 밖에 없다.
우리는 사람을 대할 때 무의적으로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자신이 억울하다고 생각해서 그 대상이 없는 곳에서 타인들에게 안 좋은 말을 하거나, 누칼협―누가 칼 들고 협박했냐?―과 같은 커뮤니티 언어를 남발하여 사람들에게 막 말하기 바쁘다. 사실 이러한 행위는 죄가 아니다. 악의를 포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위에서 말했던 것처럼 그 행위에 대해서 무슨 말을 해줘야 할지도 모른다.
우리가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강원도의 힘>에서는 보았을 때 알 수 있듯이 무의적 행위는 죄가 아니다. 무의적 행위에는 비참함과 슬픔과 찌질함만 있는 것을 홍상수의 작품으로 알 수 있다.
하지만 무의적이든 무의적이든 법에 저촉되는 죄를 저지르면 감옥에 가야한다.
각주
1)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최명관, 역). 도서출판 창. p. 94
2) 아리스토텔레스. 위의 책. p. 94
3) 특히 홍상수는 자신의 작품에 있어서 ‘미장센’을 잘 활용한다. 그래서 그의 작품에 있어서 의미 없는 장면은 없다. 이러한 의미에서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에서 민수가 경찰에 잡혀들어 가는 장면은 작품에 있어서 필요 없는 부분이다.
4) 종학은 강제로 성행위를 하려고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