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교사의 눈물 : 갑질과 모멸의 최전선

일러스트=바로크

 
며칠간 연이은 죽음 소식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꼬리를 물고 이어진 슬픔의 막바지에는 무리한 학부모 민원에 차라리 죽음을 택한 한 젊은 교사가 있었다. 또 그에 앞서 많은 교사가 같은 길을 걸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들에게 세상은 어떤 곳이었으며, 그곳을 벗어나도록 떠민 것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우리 문화에서 널리 쓰이는 ‘갑질’이란 단어는 대략 2014년쯤 사회적 용어로 부상했다. 그러나 공적인 공간에 등장한 것이 그쯤이지 인터넷 은어로는 더 오래 존재했으며, 행태 자체로만 본다면 근대사회 전체와 함께했을 것이다. 말 그대로 갑(甲)에 의한 짓이다. 계약 관계에서 우위에 있는 갑(甲)이 을(乙)에게 행하는 불합리한 일을 뜻한다. 보통 기업의 직급이나, 하청-원청, 고용 관계에서 일어나는 일 등이 주목받았다.

그러나 요즘 우리 사회에서는 이 갑질이라는 개념이 전통적인 위계의 폭력을 넘어, 일종의 정서 그 자체가 된 듯하다. 특히나 소비자라는 보편적인 지위에 대한 자각이 인격을 대체하며 그 정도가 지나치게 되었다. ‘손님은 왕’이라는 마케팅 구호를 절대적인 신념으로 삼아, 돈을 내는 사람이 돈을 받는 사람보다 우위에 있다는 극단적 자본 중심 사고가 사회를 지배하게 되었다.

인터넷을 통해 쉽게 접할 수 있는 식당과 매장의 진상 행위가 그 예다. 돈을 낸 자신은 돈을 받는 당신보다 우월한 존재가 된 것이며, 그에 마땅한 예를 받지 못했다면 신분제 사회에서 그러했듯이 폭력과 폭언도 용인되는 것이다. 반대편에 있는 자는 인격이 지워지고 날 위해 기능하는 역할로만 인식된다.

나아가 사람들은 매우 희석되어 미미한 재화와 간접적인 영향력마저 계산에 포함하기 시작했다. ‘내 세금’으로 월급을 받는 공무원에게 폭언을 내지르고 ‘내 관심’을 먹고사는 연예인에게 악플을 다는 것이다. 그 연장선에 어린이집과 유치원, 그리고 학교가 있다.

“참기 힘든 것은 육체의 고통이 아니다. 부당하고 비합리적인 일을 당했다는 생각에서 오는 정신적 고통이다.” 빅터 프랭클(정신의학자)

빅터 프랭클은 아우슈비츠에서 동료 포로들의 마음을 관찰한 정신의학자다. 그 관찰의 결과, 인간이 삶을 포기하는 순간은 아무것도 스스로 결정할 수 없을 때였다. 재화의 이동 방향으로 인격을 지우고 뜻대로 통제하려 하는 행위는 당하는 사람에게 모멸감을 느끼게 한다. 주체적인 인간으로서의 자존감을 잃게 한다. 차라리 대놓고 적대적인 모욕을 당하는 것보다 괴로운 일이다.

더욱 슬픈 사실은, 모멸을 주는 일이 놀랍도록 쉽다는 것이다. 모멸의 가해자는 뒤틀린 가치 세계에서 당연한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기에, 마음에 거리낌이 없다. 돈을 낸 소비자로서, 대중으로서, 국민으로서, 학부모로서 돈을 받은 이에게 무엇이든지 요구할 수 있다고 믿는다. 역할 속의 인격은 그들에게 보이지 않는다. 죽을 만큼 괴로워할지라도 말이다.
 

 
우리 사회는 마치 사람의 자리를 돈이 대체해가는 곳처럼 보인다. 몇 년 전 화제가 되었던 ‘무엇이 삶을 의미 있게 하는지’ 묻는 설문에서 대부분 나라는 ‘가족’, 소수의 나라는 ‘건강’, ‘사회’를 1순위로 꼽았으나 유일하게 한국만이 ‘물질적 풍요’를 1순위로 택했다고 한다. 사치품(luxury)이 ‘명품’으로 불리고, 셀럽이 사치품 광고를 꺼리지 않으며, 1인당 사치품 소비액이 가장 높은 곳이다. 부의 과시가 넉넉히 용인되다 못해 동경 되는 곳이다. 전통적인 귀천(貴賤) 의식의 근거가 인품보다 돈이 되었다.

만연한 갑질의 정서는 일종의 증상이 아닐까 생각한다. 학교에서 벌어지는 학부모의 과도한 간섭은 그곳의 특수한 현상이라기보다, 이미 만연한 물신주의, 갑질 정서가 넘쳐서 흘러간 것으로 보인다.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는 전통적인 사제관계가 그 마지막 보루였을 것인데, 현대에서 전통은 해체되는 것이 순리므로 언제고 벌어질 일이 벌어진 것이다.

구글 트렌드에 ‘서이초’를 검색해보니 ‘학부모’, ‘신상’, ‘국회의원(가해자로 지목된)’ 등이 연관 검색어로 나타났다. 늘 그래왔듯 범인이 색출되면 분노가 쏟아지고, 성에 차지 않는 판결이 내려지고, 다시 분노할 것이 그려진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비슷한 사건이 반복될 것이다.

혹자는 학생인권조례가 문제라고 말한다. 아이들의 인권을 보장한 일이 교사의 인권을 해쳤다는 주장이다. 또 오은영 박사의 금쪽이 솔루션이 문제라고도 말한다. 이상적인 훈육법을 가르쳤기에 학부모들이 교사에게 간섭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둘 다 동의하기 어려운, 폭력과 방관의 극단을 제외한 선택지가 없다고 여기는 편협한 인식이라고 생각한다. 교사는 기본적으로 교육전문가이며, 폭력과 방관이 아니어도 교실의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충분하다.

필자는 이 사태의 원인으로 첫 번째로는 우리 사회의 정서가 인격을 경시하기 때문이며, 두 번째로는 그 정서가 욕망으로 표출되어 학교의 울타리를 넘도록 방치한 탓이라고 본다. 그리고 행정기관은 첫 번째 문제의 공범이며, 두 번째 문제의 주범이다.

산업현장에서는 2018년을 전후하여 근로기준법에 직장 내 괴롭힘 방지 조항이, 산업안전보건법에 감정노동자 보호조치가 추가되었다. 그러나 유독 학교 현장에서는 이러한 보호조치의 필요성이 묵살되었다. 교육행정기관이 보기에 교사는 노동자라고 칭하기에는 꺼림직한데, 인격으로 보기에는 부담스러운 존재였을까. 교사들의 소진과 이탈, 나아가 죽음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교사를 인격으로 바라보는 시각의 전환과 그에 따른 보호조치가 요구된다.

무엇보다 갑질 정서로 인한 문제는 단순히 개인적인 일탈로 보아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우리 사회 전반의 가치와 정서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며, 누구나 언제든 새로운 가해자가 될 수 있다. 이를 근본적으로 개선하기 위해서는 광범위한 사회적 인식과 변화가 필요하다. 그 중심에는 사람이 있다.
 


 
참고자료
빅터 프랭클(1984). 『죽음의 수용소에서』
김찬호(2014). 『모멸감』
경향신문(2021.11.22.). 「’무엇이 삶을 의미있게 하는가’…한국 유일하게 ‘물질적 풍요’ 1위 꼽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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