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레 이야기>를 읽고 – 1
들어가며
이청준 작가의 책은 여태까지 <당신들의 천국>과 <벌레 이야기>1) 두 권을 읽어보았다. <벌레 이야기>의 경우 개인적으로 깊은 여운을 남겨 지금까지 5번 정도 읽었다. 이번 차시에 <벌레 이야기>를 선정한 이유는, ‘절대자’에 관한 내 생각을 보고 쓰고 싶었다.
대학교 1학년 때부터 절대자란 무엇인지 생각했다. 1학년 때 나는 절대자란 존재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내가 본 적도 없고, 있어도 내 삶과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3학년이 된 나는 절대자의 존재를 믿었다. 절대자는 존재해야 한다. 왜냐하면, 절대자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종교도 존재하지 않고, 종교가 존재하지 않으면 윤리와 도덕이 존재하지 않는다.2) 하지만 <벌레 이야기>를 보면서 절대자가 정말로 ‘절대(絶對)로서 존재하는가?’ 아니면 ‘인간의 수단으로서 존재하는가?’라는 의문이 들어 이번 글을 통해 궁금증을 어느 정도라도 풀어보려 한다.
이번 글은 영화 ‘밀양’과 비교, 박완서의 아들, 정지용 아버지 사례를 통한 ‘신이 선한가?’에 대해 알아보고, 지인 신학도의 인터뷰 내용, 정신분석학적 요소를 작성해보겠다.
주님을 믿었는데… 어찌 이러십니까…
학과 J교수님의 수업에서 신학 이야기를 해주시면서 박완서와 정지용의 이야기를 해줬다.3) 우선 정지용의 아버지(정태국)는 약방을 운영한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는데 어느 날 홍수가 닥쳐서 전 재산이 들어있었던 궤짝이 물에 휩쓸려 내려갔다. 정태국은 그 뒤에 교회를 찾아가 ‘자신에게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냐, 나는 정말 독실한 신자였고 착실하게 살았는데.’라는 식으로 말하며 그 뒤로 자신의 종교를 버렸다고 한다.
학과 J교수님의 수업에서 신학 이야기를 해주시면서 박완서와 정지용의 이야기를 해줬다.3) 우선 정지용의 아버지(정태국)는 약방을 운영한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는데 어느 날 홍수가 닥쳐서 전 재산이 들어있었던 궤짝이 물에 휩쓸려 내려갔다. 정태국은 그 뒤에 교회를 찾아가 ‘자신에게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냐, 나는 정말 독실한 신자였고 착실하게 살았는데.’라는 식으로 말하며 그 뒤로 자신의 종교를 버렸다고 한다.
박완서 작가의 경우 1남 4녀의 자식이 있었다. 막내아들은 서울대 의대를 졸업하고, 마취과 레지던트로 있었던 도중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아들이 세상을 떠나자 박완서는 ‘우리 하나밖에 없는 아들 사고도 안 치고, 나쁜 짓도 안 하고 착실하게 살았는데 왜 교통사고로 죽게 냅뒀냐.’라고 말했고, 자신의 묵주를 집어 던진 후 종교를 천주교에서 불교로 바꿨다.
작품에서도 “모두가 다 부질없는 노릇이에요. 하느님의 사랑도 거짓말이구요. 하느님이 정말 전지전능하시다면 우리 알암일 왜 그렇게 만들었겠어요. 그 어린것에게 무슨 죄가 있다구…… 하느님의 사랑이 정말 크시다면 처음부터 그런 일이 없게 했어야지요.”(p. 55)
“아니 하느님은 아무것도 몰라요. 하느님이 그토록 전지전능 하신 분이라면, 알암이를 그렇게 만든 살인귀 악마를 아직까지 숨겨두고 계실 리가 없어요. 알암인 이렇게 죽고 말았는데, 범인은 아직 붙잡히지 않고 있지 않아요. 하느님이 정말 모든 걸 아신다면 어째서 그놈을 아직 가르쳐주지 않는 거에요. 알고도 부러 숨겨두고 계신 건가요. 그렇다면 하느님은 그놈과 한패거리와 다를게 무어예요. 그래서 하느님은 모든 걸 아시고도 아이를 그 꼴로 만들어 보내신 건가요. 처음부터 그놈과 한패거리로 일을 그렇게 꾸며가지고 말이에요.”(p. 56)
“하느님은 몰라요. 살인귀를 가리켜 보여주지 못하는 하느님, 사랑도 섭리도 다 헛소리예요. 하느님보다 내가 잡을 거예요. 내가 지옥의 불 속까지라도 쫒아가서 그놈의 모가지를 끌고 올거에요.”(벌레 이야기. 57p.)|
정약용 아버지의 이야기, 박완서의 막내아들 이야기, 아내의 이야기를 보았을 때 ‘신이 정말 선(善)한가?’에 의문이 들었다. 최근 자신을 모태신앙이라고 말한 22학번 친구에게 정약용, 박완서의 사례를 이야기해 주고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는데, “다 주님의 뜻이 있는 겁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 논리에 동의할 수 없다. 만약 그 논리에 따라서 살인사건이 일어난다면 (그게 고의든 아니든) 피해자는 주님의 뜻 or 순리에 따라서 죽은 것이니 가해자를 처벌받게 하면 안 된다. 그리고 주님의 뜻(벗어날 수 없는 원인)으로 인해 가해자에게는 죄를 저지를 수밖에 없는 상태 즉 ‘자유’는 없으므로 ‘책임’도 없는 논리에 이른다.
그리고 위 사례들이 신이 주는 시련이라 할지라도, 인간에게 우연적인 시련을 줘선 안 된다. 왜냐하면, 전지전능한 신은 항상 선하고 논리적이다. 착실하게 살아온 인간에게 시련을 주면 안 되고, 만약 좋지 못한 일이 발생했다면 신이 직접적으로 개입하지 못하더라도 그들을 도와줄 선지자를 내려줬어야 했다. 하지만 세 개의 사례를 보았을 때 전혀 그러지 못했다. 김집사 아주머니를 선지자로 볼 수 있지만, 아내는 결국 고통받고 죽었다.
세상에는 수많은 변신론이 존재한다. 하지만 모든 이론이 그렇듯이 구멍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변신론을 보았을 때 “하느님은 인간을 옳게 창조하셨다. 그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자연물(인간을 포함한 모든 자연물)의 창조자이다. 그러나 그들 자연물이 가진 오점의 창조자는 아니다. 인간은 스스로 타락했으며, 이로 인해 마땅히 저주받았으므로 타락하고 저주받은 자손을 낳았다.”3)라고 한다. 요약하자면 ‘하느님은 옳게 창조했는데, 인간이 스스로 타락한 것이다.’라는 말이다. 여기서 ‘악이 발생했는데, 가만히 내버려 둔 하느님은 선한가?’4)라는 의문이 생긴다. 그리고 신이 원하는 대로 인간을 조종한다면 그것 또한 문제가 된다.
기독교에서 모두가 하느님의 자손이라고 하지만, 주님을 숭배하지 않는 사람의 삶을 참견할 수 있을까? 만약 참견한다면 아무리 ‘하느님’이라 해도 인간을 수단으로 사용했기에 옳지 않고, 우리에게 자유의지가 없다는 말이 된다.
정말로 신이 전지전능하다면 “이 세상에 악과 무지가 널리 퍼져 있다는 점에서 볼 때 결코 덕을 갖춘 존재라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만일 신이 능력에 한계가 있는 존재라면 그것은 좀 더 월등한 힘에 예속되어 있을 것이므로, 따라서 신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신에 대한 모든 생각은 성립될 수 없다. (중략) 그러나 신에 대한 인간의 관념은, ‘개인적 환상이 품는 주관적 영역 너머에 존재하는 것에 대한 인식에 닿을 수 있게 한다’고 공공연히 말하는 모든 사상이 그러하듯이, 아무런 가치도 없다. – 회의주의 학파”5)
그렇지만 신은 존재해야 한다. 그래야 종교가 긍정되고, 그래야 인간의 윤리, 도덕을 긍정할 수 있다. 그렇지만 <벌레 이야기> 속 신은 방관자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죄 없는 아들을 살인한 살인자의 악을 내버려 뒀기 때문이다.
죄를 저질러 놓고 주님을 믿고 참회하고 용서받으려고 노력하면 끝?
“사형수 김도섭의 면회를 다녀오고 나서 아내는 모든 것이 다시 허사가 되고 말았다. 면회를 다녀온 그날부터 아내는 다시 열병 환자처럼 머리를 싸매고 자리에 눕고 말았다. (중략) 거기다가 아내는 음식조차 거의 입에 대려지 않았다. 자신과 자기 밖의 모든 걸 포기해버린 사람의 형국이 분명했다. (중략) – 그를 만났을 땐 아무 일도 없었어요. 면회는 일단 무사히 끝났으니까요. (중략) 흉악스럽기는커녕 그 사람은 자신의 모든 잘못을 순순히 시인하고 애 엄마에게 간절한 용서를 빌었어요.
용서를 빌었다기보다 애 엄마의 책벌을 자청하고 나섰지요. 그것으로 애 엄마의 마음의 위로가 될 수만 있다면 자기가 저지른 죄과에 대해 어떤 책벌도 기꺼이 감수하겠노라구요. 그게 그 사람의 진심이었던 것이 그 사람도 이미 주님을 영접하여 주님의 뜻을 따르고 있었거든요. (중략) – 그것이 그에게는 주님 곁으로 가는날이니까요. 그는 그것을 진심으로 믿고 기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것으로 그는 주님의 사람을 받은 것이었지요. 그리고 누구보다 깨끗한 영혼으로 주님의 인도를 따르고 있는 것이었지요.”(pp. 70~71)
“이제 와서 제가 왜 죽음을 두려워하겠습니까. 제 영혼은 이미 아버지 하느님께서 사랑으로 거두어주실 것을 약속해주셨습니다. 영혼뿐 아니라 제 육신의 일부는 이 땅에서 다시 생명을 얻어 태어날 것입니다. 저는 저의 눈과 신장을 살아 있는 형제들에게 맡기고 가니까요. (중략) – 다만 한 가지 여망이 있다면 저로 하여 아직도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의 영혼에도 주님의 사랑과 구원이 함께 임해주셨으면 하는 기원뿐입니다. 저는 그분들의 희생과 고통을 통하여 오늘 새 영혼의 생명을 얻어가지만, 아이의 가족들은 아직도 무서운 슬픔과 고통 속에 있을 것입니다. 저는 지금이나 저세상으로 가서나 그분들을 위해 기도할 것입니다. 아이의 영혼을 저와 함께 주님의 나라로 인도해주시고 살아남아 고통받는 그 가족분들의 슬픔을 사랑으로 덜어주고 위로해주십사고……”(pp. 80~81)
이 텍스트에서 ‘죄는 저질러 놓고 주님을 믿으면서 자신의 마음을 안정을 찾네?’라는 의문이 들었다. 가해자는 자신의 죄에 대해 전혀 반성하고 있지 않은 사람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이제 와서 제가 왜 죽음을 두려워하겠습니까. 제 영혼은 이미 아버지 하느님께서 사랑으로 거두어주실 것을 약속해주셨습니다.”(p. 80)라고 말한 자신의 말과 “그게 그 사람의 진심이었던 것이 그 사람도 이미 주님을 영접하여 주님의 뜻을 따르고 있었거든요.”(p. 70라는 김집사 아주머니의 말을 짐작해 보았을 때 가해자는 전혀 반성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죄를 저질러 놓고 주님을 믿고 참회하고 용서받으려고 노력하면 끝인가?’ 그것은 적어도 작품 속 가해자에게는 끝이 아닌 명제다. 왜냐하면, 첫 번째로는 그는 주님을 ‘수단’으로 사용했다. 주님의 명목하에 자신 마음에 평안과 피해자 가족들의 평안을 빌었다. 이는 주님을 수단으로 사용했다. 칸트는 ‘인간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하라’라고 했다. 그렇지 않으면 도덕적으로 잘못됐다고 말한다. 그런데 인간을 넘어선 절대자를 수단으로 대했으니, 그는 도덕적으로 잘못 됐다.
두 번째는 타인에게 위해를 가했다는 점에서 잘못됐다. 인간을 죽이는 행위는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옳지 못한 행위다. 그리고 위해를 가한 이후 주님을 믿어도 그 죄는 사라지지 않는다. 인간이 나쁜 짓 하지 않는 이유는 현생에서든 사후에든 벌 받는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리고 기독교에서도 ‘나쁜 짓을 하면 지옥으로 가게 될 것이다.’라고 말한다.
※ 참고자료
1) 이청준 (2013). <벌레 이야기>. ㈜문학과지성사. / 책 내용을 인용할 때에는 쪽수 표기와 이탤릭체로 처리하겠다.
2) 정지용 아버지와 박완서 아들의 이야기는 J교수님의 구술을 기반으로 작성함.
3) S.P. 램프레히트. (2017). <즐거운 서양철학사>(김문수, 역). 동서문화사. (원본출판 1955년). p. 195
4) 이 부분은 선의 결여와 같은 이론으로 반박될 수 있다.
5) S.P. 램프레히트. (2017). 앞의 책. p. 1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