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레 이야기>를 읽고 2 + 사이비 논박

 
정신분석학적 관점에서1)

“이제 와서 제가 왜 죽음을 두려워하겠습니까. 제 영혼은 이미 아버지 하느님께서 사랑으로 거두어주실 것을 약속해주셨습니다.”(p. 80)라는 텍스트를 보았을 때 자신을 정당화하는 무의식적인 마음의 작용을 보여준다. 물론 그 뒤에 “저는 그분들의 희생과 고통을 통하여 오늘 새 영혼의 생명을 얻어가지만, 아이의 가족들은 아직도 무서운 슬픔과 고통 속에 있을 것입니다. 저는 지금이나 저세상으로 가서나 그분들을 위해 기도할 것입니다. 아이의 영혼을 저와 함께 주님의 나라로 인도해주시고 살아남아 고통받는 그 가족분들의 슬픔을 사랑으로 덜어주고 위로해주십사고”(p. 81)라고 말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시키려고 ‘투사’2)의 성격이 강하다.
 
신의 존재를 믿는 순간부터 내가 잘못한 것을 깨닫고, 벌을 달게 받겠다는 생각은 이기적이다. 물론 절대자라는 존재 덕분에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사후에도 벌을 달게 받겠다는 의미가 있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살인과 유괴가 나쁜 행위임은 가해자도 범행을 저지르기 전부터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신의 말을 빌려 자신의 죄를 일반화시키는 행위를 보여줬다. 그러므로 가해자에게 ‘주님’은 투사의 존재 즉 ‘수단’으로서의 존재이다.
 


 
마치며

이 소설에 관하여 신도인 지인과 대화를 나눴다. ‘벌레 이야기’의 마지막 두 페이지를 사진으로 보내주며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어보았다. 그는 나에게 약 먹고 죽은 아내가 잘못했다고 한다. 그 이유는 1. 어차피 가해자는 사형을 받음. 2. 잘못을 반성하고 회개함. 3. 즉 가해자는 본인이 할 수 있는 한 최대의 보상을 다 하고 죽음을 기다림. 4. 피해자의 죽음은 가해자의 잘못이 아닌 피해자의 선택이다. 라고 말했다.
 
그리고 마지막 질문으로 ‘용서는 신에게 먼저 해야 하는가? 당사자에게 해야 하는가?’라고 물어보았을 때, ‘둘 다에게 최대한 진중하고 신속하게 해야 한다. 누가 먼저는 중요하지 않다. 그것은 누구에게 중요하다는 질문은 식사할 때 밥부터 먹냐, 국부터 먹냐의 느낌이다.’라고 말했다.
 
물론 지인은 ‘벌레 이야기’를 직접 읽어본 적이 없어서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지만, 앞서 말한 ‘2.와 3.’ 명제에 대해서는 동의할 수 없다. 왜냐하면, 가해자는 이미 현생의 법과 주님의 말을 어겼고, 반성하고 회개해도 그 행위는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는 ‘벌레 이야기’를 통해 ‘절대자와 인간에 관한 생각’을 다시 해볼 수 있다. 알암이 엄마의 말처럼 자신이 가해자를 아직 용서하지 않았는데, 어느 누가 자신보다 먼저 그를 용서할 수 있을까? 그리고 성경에서도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만한 일이 있는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 5:23-24)고 말했다.
 
마태복음의 말과 같이 우리는 절대자가 있다 해도, 용서를 절대자에게 구하는 것이 아닌 당사자에게 빌어야 한다. 작품 속 내용으로 예를 들면 아무런 행위를 하지 않는 신에게 먼저 용서를 구했다는 것은 이미 피해자를 염두에 두지 않았다는 것이고 성경의 말을 어긴 것이다. 잘못했으면 잘못한 사람에게 용서를 빌어야 한다. 이는 초등학교 때도 배운 기본적인 도덕이다.
 
개인적으로 <벌레 이야기>의 결말보다 <밀양>의 결말이 마음에 든다. 결국, 살아야 한다. 이 꼴 저 꼴 다 보면서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다. 그래야 가해자를 영원히 증오하던, 용서하던 할 수 있다. 중간에 죽어버리면 둘 다 할 수 없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건 자살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그것은 싸움을 포기하는 것이니까. 살아서 별별 추한 꼴을 다 봐야한다. 그것이 삶이니까.”3)
 


 
사이비 논박

최근 사이비와 관련된 이슈가 있어서 사이비가 잘못 된 이유를 설명해 보겠다.. 우선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그들이 말하는 ‘재림예수’는 동양인이 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성경에선 동양인에 대한 언급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령을 충만 받은 26명 중에서 동양인은 한 명도 없다. 혹시라도 그 26명의 자식이 충만을 이어받을 수 있다는 멍청한 소리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미지=Netflix

 
다음으로 예수님은 승천하고 성령으로 강림했다(행). 그리고 ‘성령’은 “우리와 함께 거하시며, 가르치시고 기억나게 하시며, 증거하시며, 죄를 깨닫게 하시며, 인도하시며 말씀하시며 알리신다(요). 그리고 성경을 깨닫게 하시며, 성령으로 말하게 하시며(행, 벧후), 사역자를 부르시며, 사역자들과 말씀하시며, 일꾼을 보내시며, 복음 사역의 방향을 정해주시며(행), 중재하신다(롬). 또한 성령은 의지, 생각, 지식, 말(고전), 사랑, 마음(롬) 등 인격적 속성을 가지고 계신다. 따라서 거짓말이나 시험하는 행위, 거스리는 행동(행), 슬프게 하는 것(엡), 욕되게 하는 것(히), 훼방하는 것(마)은 모두 성령을 근심되게 하는 죄악에 해당한다.”5)
 
위의 인용을 보았을 때 성령은 절대적으로 옳은 길로만 인도해주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성령은 인간과 함께 있는 하느님의 영(靈)이지, 인간에게 들어가 씌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성령은 묘기축구를 보여주고, ―자신과 결혼하지 않은― 여성에게 옷을 벗으라고 명령하고 강간하는 잘못된 권위를 가진 멍청한 꼰대가 아니다.
 
마지막으로 정리하자면, 한낱 인간이 정말 재림예수라면 그 사람이 “빛이 생겨라”(창 1:3)고 하면 온 세상에 빛이 생겨야 하고, “빛이여 꺼져라”고 하면 온 세상의 빛이 꺼져야 한다. “마른 땅이 드러나라!”(창 1:9)라고 하면 드러나야 하고, 진흙으로 사람을 빚어 그 진흙 코에 자신의 입김을 불으면 사람이 돼야 한다(창 2:7). 하지만 재림예수라고 주장하는 사람 중 그런 전능함을 보여준 사람은 여태까지 아무도 없었다.
 
칸트는 인간의 이성으로는 감히 신에 관한 것들을 말할 수 없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신과 그의 영역은 상상이나 생각만 할 수 있는 영역일 뿐 경험이 불가능해 우리는 전혀 인식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낱 인간 따위는 신을 인식할 수 없다. 인식할 수도 없는데 자신이 재림예수이고, 메시아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런데 어떻게 자신이 예수고 메시아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는 인간의 이성이 오성의 범주를 넘어 뭐든지 인식할 수 있다는 환상 즉, 자의식 과잉에서 온 거짓말에 불과하다.
 



※ 참고자료
1) 이청준 (2013). <벌레 이야기>. ㈜문학과지성사. / 책 내용을 인용할 때에는 쪽수 표기와 이탤릭체로 처리하겠다.
2) ‘투사’는 주로 자신의 감정을 쉽게 옮길 수 있는 사람에게 가능하다.
3) 김현. (2015). 행복한 책읽기. ㈜문학과지성사. p. 36
4) [네이버 지식백과] 성령 [聖靈, Holy Spirit] (라이프성경사전, 2006. 8. 15., 가스펠서브)
5) [네이버 지식백과] 성령 [聖靈, Holy Spirit] (라이프성경사전, 2006. 8. 15., 가스펠서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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