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in Movie] 먹지 않아도 사는 소녀들

《더 원더》(2022), 출처: 위키피디아

 

금식 소녀의 추악한 진실

 
아일랜드 작가 엠마 도노휴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더 원더(The Wonder)》는 19세기에 엄청난 논란을 일으켰던 이른바 ‘금식 소녀(fasting girl)’ 이야기다. 원작은 1,800년대 아일랜드와 영국의 ‘금식 소녀’ 실화에서 영감을 받았다. 당시, 신의 은총으로 음식 없이 몇 달, 심지어 몇 년 동안 생존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소녀들이 여기저기서 나타났다. 영화는 대기근으로 약 100만 명이 사망한 직후인 1862년 아일랜드를 배경으로 한다. 영국 간호사 리브 라이트는 4개월 동안 먹지 않고 ‘하늘에서 온 만나’로만 생명을 유지한다는 11세 소녀 안나 오도넬을 관찰하기 위해 아일랜드로 파견된다. 화면 속 습하고 황량한 풍경, 초라한 외딴 농가, 그리고 완고한 기독교 신앙이 지배하는 시골 마을 이미지는 이 영화의 주제를 더욱 무겁게 짓누른다.
 
마을에 도착한 리브는 지역 유지들로 구성된 위원회로부터 지시 시항을 듣는다. 그들 중에는 기적을 기대하는 완고한 성직자, 소녀의 몸이 식물처럼 햇빛을 영양소로 전환시키고 있다고 믿는 의사도 있다. 위원회는 간호사와 수녀가 교대로 안나를 관찰하고 2주 후에 결과를 보고하도록 하는데, 내심 이 소녀가 종교적 기적이기를 바라고 있다. 과학을 신봉하는 회의론자 리브는 이들에게 경멸과 혐오감을 느낀다. 그녀와 위원회는 이성 대 미신, 과학 대 신앙의 대립각을 형성한다고 볼 수 있다.

안나는 작은 침실에 갇혀 기도하거나 찬송가를 부르며 지낸다. 소녀는 자신과 근친상간의 죄를 짓고 죽은 오빠의 영혼을 구하기 위해 하루 서른세 번이나 기도문을 암송한다. 혹독한 금식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여전히 쾌활하고 건강하다. 금식을 거짓말이라고 확신한 리브는 안나와 그녀의 부모를 격리한다. 이후 안나는 극도로 쇠약해졌고, 그동안 부모가 키스를 통해 딸에게 소량의 음식을 몰래 먹여왔음이 밝혀진다. 리브는 죽어가는 안나를 살리기 위해 다시 음식을 주라고 하지만, 부모는 딸이 하느님의 은총을 받아 먹지 않고도 건강하다며 거절한다. 리브는 마침내 연인이자 정신적 동지인 데일리 텔레그래프 기자 윌리엄 번과 함께 아사 직전의 안나를 비밀리에 빼내 호주로 탈출한다.
 

조반니 바티스타 티에폴로, ‘시에나의 성 카타리나’, 1746년

 
금식하는 젊은 여성들은 13세기에서 16세기 사이 유럽 사회에서 나타난다. 당시 독실한 신앙을 가진 많은 금식 여성이 성녀로 숭배되었다. 33세에 다리가 마비돼서 사망할 정도로 참혹한 단식을 한 시에나의 성 카타리나도 그들 중 하나다. 중세 시대의 신앙심 깊은 여성이나 수녀에게 음식 거부는 금욕주의의 한 방식이었다. 자신의 몸을 영양 결핍 상태로 만들어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의 고난과 고통에 동참함으로써 영적으로 순결해지고 신에게 더 가까이 갈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런 거식증 관행은 르네상스 시대에 사라졌다. 교회는 이를 위험한 이단, 심지어 사탄에게 영감을 받은 것이라고 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19세기 빅토리아 시대에는 다시 영화 속 안나와 같은 ‘금식 소녀’가 부활한다. 의학 저널에는 몇 주에서 몇 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금식한 젊은 여성들에 대한 기록이 있다. 교회 잡지에는 젊은이들이 금식하다가 침대에서 죽음으로써 그리스도와 연대한다는 글들이 실리기도 했다. 이것들은 매우 인기가 있었고 교회나 주일 학교에서 회중에게 큰 소리로 읽혔다. 복음주의 서적들을 출간한 종교 출판사와 기독교계는 금식에 대한 토론 열풍을 일으켰다.
 
《더 원더》는 여러 금식 소녀 이야기 중에서도 사라 제이콥 사건과 가장 비슷한 서사를 공유한다. 때는 1860년대, 웨일스 농부의 딸인 12세 소녀 사라 제이콥은 열 살 때부터 음식을 먹지 않았다고 알려진다. 그녀에 대한 소문이 전국에 퍼졌고, 신문은 ‘웨일스의 금식 소녀’에 대한 기사를 연이어 실었다. 전국에서 몰려든 방문객과 순례자들은 침대에 앉아 경건하게 성경책을 읽는 사라를 보며 신의 축복이라며 감동했고, 몇 푼의 돈을 두고 갔다. 반면, 의심에 찬 의사나 회의론자는 음식 없이도 생존할 수 있다는 것은 종교적 미신, 혹은 사기이며, 사라의 어머니가 몰래 음식을 먹이고 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결국 사라가 비밀리에 먹고 마시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네 명의 간호사 팀을 보냈고, 관찰이 시작된 지 일주일 만에 소녀가 사망했다. 부검 결과, 관찰이 시작되기 전까지 아주 적은 양의 음식을 은밀히 섭취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마지막 순간 소녀가 침대 옆에 놓인 물병을 필사적으로 열려고 했다는 증거도 발견되었다. 《더 원더》는 희망적인 메시지를 주며 끝나지만, 사라 제이콥의 실제 이야기는 비극이었다.
 
사라 제이콥 현상은 19세기가 맹목적인 신앙과 새로운 과학적 사고가 공존하고 교차하던 시기임을 보여준다. 광신에 빠진 지역 공동체는 어린 소녀를 성녀라고 믿었던 반면, 의료 기관은 기적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려 했다. 《더 원더》에서와 마찬가지로 금식 소녀는 대부분 가짜임이 들통났다. 수프를 적신 수건을 입에 대거나 보호자가 키스하면서 입에서 입으로 음식을 전달하는 등 다양한 수단을 통해 사기 행각이 벌어졌다. 돈과 명성을 얻으려는 사기꾼의 탐욕과 기적을 믿고 싶은 대중의 기대가 이 경이로운 금식 드라마의 공동 연출자였다. 일부 소녀들의 부모는 입장료를 받거나 신문에 기사를 제공해 돈을 벌었다.
 

거식증은 가부장 체제의 산물

14세기 초 유럽의 대기근 이후 음식은 거의 신화적인 가치를 갖게 되었다. 유럽 민담에 등장하는 영원히 고갈되지 않고 음식과 음료로 채워지는 ‘마법의 그릇’은 부족한 먹거리에 대한 절절한 열망의 표상이었다. 가장 큰 자선은 가난한 사람들을 먹이는 것이었고, 낯선 사람과 음식을 나누는 것은 성스러운 행위였다. 탐식은 신체적 쾌락에 탐닉하는 것으로 죄악시되었으며, 금식은 육체를 초월해 영성을 추구하는 거룩한 행위로 여겨졌다. 음식은 중세 윤리체계의 뼈대를 형성하는 주요 요소였다. 그런데 왜 유독 금식 현상은 여성들에게서 자주 나타난 것일까? 이들은 왜 이렇듯 목숨을 내건 위험한 금식을 했을까?
 
중세 신학에서는 여성이 남성에 비해 죄, 혹은 신체의 악에 더 취약하며, 본질적으로 남성에게 위험한 존재라고 규정했다. 여성은 사탄에게 유혹당해 아담에게 선악과를 먹도록 꼬드겨 원죄를 짓게 한 이브의 후손이기 때문이다. 남성 성도들의 이야기에는 음란한 여성 유혹자들로 가득하다. 교회가 성인을 결정하는 주요 요소도 젠더였다. 여성은 기독교 성직으로부터 배제되었고, 상대적으로 소수의 여성만이 시성되었다. 여성이 성인이 되기 위해서는 특별한 무언가, 즉 엄격한 금욕주의를 보여주어야 했다. 극단적 금식은 여성이 선택할 수 있는 금욕의 한 방법이었다. 육체적 쾌락의 포기가 남녀 모두에게 요구되긴 했지만 여성의 금욕은 특히 음식과 관련되어 있었다. 여성은 더 자주 가혹한 금식에 의한 고행을 선택했다. 이들의 금식은 ‘거룩한 거식증’으로 높이 추앙받았다. 여성의 경건함은 정신보다는 몸에 직접적으로 묶여 있었던 것이다. 모두를 먹일 소중한 식량이 충분하지 않은 시대, 그 짐을 경건한 성녀들에게 지운 것인가?
 
‘금식 소녀’가 등장한 시기 역시 감자 역병으로 인한 아일랜드 대기근으로 약 100만 명이 굶어 죽었던 때였다. 사회를 통제하고 흉흉한 민심을 수습해야 할 상황에서, ‘금식 소녀’를 상징적 구심점으로 하여 기아에 허덕여도 신의 은총으로 충분히 살 수 있으니 인내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주려고 한 것이 아닐까? 그런데 ‘금식 소년’은 없고 ‘금식 소녀’만 존재했던 것은 무엇 때문일까? 중세의 ‘거룩한 거식증’과 마찬가지로 여성에게만 가혹한 압박을 가한 것인가? ‘금식 소녀’들은 몸의 고통을 통해 ‘성녀’에 버금가는 명성과 인기, 혹은 약간의 금전적 이득을 얻었지만, 금식이 초래한 결과에 비하면 보상은 초라했다.
 
‘거룩한 거식증’ 수녀와 ‘금식 소녀’ 모두, 그 배경에는 가부장제 사회의 억압적 가치체계라는 공통분모가 자리 잡고 있다. 그들은 자신의 신체를 최대한 활용해 어떤 목적을 이루려고 했다는 점에서 매우 닮았다. 견고한 가부장 사회에서 이 여성들이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극단적인 몸의 학대였다.
 

일러스트 : 토끼풀

 
한편, 소녀들의 극단적인 금식은 신앙의 기적이 아니라 일종의 병적 심리 현상이라고 분석하는 사람들이 있다. 빅토리아 시대 의사 윌리엄 걸 경은 부유한 젊은 여성들이 날씬한 몸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식사를 제한하는 현상에 대해 ‘신경증적 식욕 부진’이라는 의학적 용어를 사용했다. 일부 심리학자와 역사가들은 이 현상이 오늘날 거식증으로 알려진 것과 유사하다고 본다. 20세기 후반의 마른 몸매에 대한 집착, 신경증적 식욕부진(거식증)은 이미 19세기에 그 징후가 있었던 것인가? 그렇다면, 19세기의 ‘금식 소녀’는 현대 거식증 환자의 선구일까?
 
거식증에 함몰된 현대 여성 역시 가부장 체제의 산물이다. 섭식 장애는 개인적 기능 장애라기보다는 사회문화적 성, 즉 젠더와 더 밀접한 관련이 있다. 현대사회의 여성은 굶주림의 고통을 감수하고서라도 마른 몸을 갈망한다. 먹고 마시는 것의 절제는 미덕과 동일시된다. 날씬한 몸은 절제와 의지력의 지표로 찬미되며 비만은 게으름과 무절제의 증거로 비난받는다. 남성 우위, 여성 하위로 계층화된 가부장 사회에서 여자는 남자보다 약하며 여성의 몸은 날씬하고 연약해야 한다는 ‘여성다움의 신화’가 만들어졌다. 여성들 스스로 이런 논리를 내면화하고 사회가 요구하는 ‘완벽한’ 여성이 되려고 애쓴다. 그 비극적인 결과가 거식증이다. 거식증 환자의 극단적으로 마른 몸은 이상적 여성상의 과장된 투영이다.
 
종교적인 금식이든 신경성 식욕 부진이든 그 결과는 동일하다. 영양 실조, 심각한 신체적 피폐, 심한 경우 죽음에 이른다는 것. 그 어떤 신성하고 거룩한 것으로 포장해도 바꿀 수 없는 진실, 생명의 제1 원리는 ‘먹지 않으면 죽는다’ 이다.
 
영화는 ‘금식 소녀’라는 지난 암흑의 역사에 대한 비판이지만, 한편으로는 혹독한 금식을 강요하는 우리 시대의 자화상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한다. 19세기 소녀 안나는 종교적 혹은 금전적 목적을 위해 어린 소녀의 몸을 이용하려는 광신적인 부모, 성직자, 의사가 관여된 견고한 사회문화 시스템에 의해 아사 직전까지 갔다. 지금은 아름다운 신체를 향한 과도한 몸 숭배가 인간의 몸, 특히 여성의 몸을 옭아맨다. 현대 여성은 집요하게 여윈 몸을 요구하는 거대한 사회적 압력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더 원더》에서는 합리적 지성을 상징하는 인물 리브 라이트가 소녀를 수렁에서 구출했지만, 현대 여성을 몸의 감옥에서 구할 자는 누구인가? 스스로를 몸의 주인으로 보는 건강하고 주체적인 가치관, 그리고 여성을 성적으로 대상화하고 타자화하는 시선을 거부할 수 있는 우리 자신의 ‘지성’이다. 사회가 주입하는 부당한 가치들을 의심하고 저항하는 지성의 힘만이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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