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더 나아진다고 믿을 수 없는 시대의 청년

일러스트=토끼풀


언론이나 인터넷 공론장에서 청년에게 희망을 줘야 한다는 메시지가 유행한 지 오래되었습니다. 정치권에서도 청년들이 정치에 참여하는 일 자체가 귀하다며 늘 청년을 찾습니다. 최근까지 청년 담론에 관심이 없던 기업계조차도 언젠가부터 ‘MZ세대’라는, 레퍼런스가 불분명한 신조어를 만들어가며 청년에게 관심을 주기 시작했습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이제는 청년 메시지 자체가 매우 식상하게 느껴지는 것도 전혀 이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청년이라는 단어를 지겹도록 언급합니다. 재밌는 것은, 정작 청년 당사자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청년이라는 개념을 그리 언급하지 않는 반면, 청년기를 벗어난 사람들이 청년이라는 단어를 자주 쓴다는 점입니다. 20대, 30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겪는 일은 그냥 개인으로서 겪는 일일 뿐, ‘청년’이라는 거창한 개념으로 수식할 만한 무언가가 아닙니다. 다시 말해, ‘청년’은 결국 좁게는 기성세대, 넓게는 한 사회 전체가 특정 나잇대의 시민을 대상화하여 설명하기 위해 쓰는 개념입니다.

물론, 세대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거나 청년 문제에 집중하는 담론이 다른 나라에 없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우리나라에서 청년이라는 단어가 갖는 존재감은 좀 유별난 측면이 있습니다.
 
‘the youth’, ‘young people’, ‘younger people’ 등, 서양권의 담론에서 청년을 지칭하는 단어는 그렇게 자주 등장하지 않습니다. 오직 청년이라는 위치가 갖는 독특한 맥락에서 발생하는 사회 현상 또는 문제를 주목해야 하는 상황에서만 쓰일 뿐입니다. 그 목적은 청년만의 특이한 고충에 대한 해결책을 모색하려는 데에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장애인처럼 배려가 필요한 계층의 하나로서 청년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서양권에는 기성세대와 구별된 사회의 지도적 주체로서 청년을 설정하는 담론이 잘 없습니다. 다만, 청년 역시 기성세대와 동등한 시민으로써 사회적 주체가 될 뿐입니다.
 
반면, 우리나라에서 청년은 사회가 전진하기 위해 문제 해결을 주도하는 주체가 될 것을 요구 받습니다. 대놓고 그러하든, 은연중에 그러하든 말이죠. 이것은 ‘학생’이 공동체를 선도하는 그룹으로 기대받던 한국 현대사의 특수한 상황과 관련이 있습니다.
 
오래 전부터 유교의 영향을 짙게 받은 탓에, 우리나라 사람들은 글공부하는 사람, 식자층을 우대해 왔습니다. 자연히, 식자층이 사회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방향성을 제시하고 사회 문제를 해결해 주리라고 기대해 왔습니다. 195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고학력자가 반정부 데모를 주도하는 등 어떤 식으로든 목소리를 내면, 대다수 비 식자층은 식자층의 목소리가 으레 바른 말이 맞으려니 여기고 동조해 주었습니다. 일반대중에게 대학생(4.19혁명 즈음까지는 고등학생까지도)은 군인, 관료, 기업인들의 반대편에서 함께 나라를 이끌던, 존경받을 만한 “윗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반면, 똑같이 20대이더라도 대학에 진학하지 않고 일찍 사회에 진출해 일하던 비 식자층은 사회를 바꾸는 주체로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노동자 청년이나 자영업자 청년에 주목하는 담론은 비교적 최근에 나타난 것입니다.
 
2000년대 이후, 한국의 기성사회가 굳이 청년에게 힘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그 이전 시대의 “청년”들이 이룩했던 산업화와 민주화의 아득한 전설에 대한 향수 때문입니다. 특히 n86 세대는 집단적인 압박을 가해서 민주화를 성취했다는 자부심이 큽니다. 산업화가 진행되던 1960~80년대에도, 30대밖에 안 되는 사람들이 유능한 실무자로서 경제발전을 뒷받침하는 일이 드물지 않았습니다. 사회의 최상층부에서 산업화를 주도한 이들도 노인이 아니라 비교적 젊은 사람이었습니다. 최고 권력자 박정희는 집권할 당시 나이가 만 43세에 불과했으며, 2인자 김종필은 불과 만 35세였습니다. 정권에 참여한 군부 동료들이나 정부의 안팎에서 국정에 한 몫 거들었던 관료, 학자, 전문가들도 주로 3, 40대였습니다.
 
한 사회를 건설하고 근대화하는 과정에서 2, 30대 시민이 맡는 역할과 이미 선진화되고 성숙한 사회에서 2, 30대 시민이 맡는 역할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폐허 위에서 새로운 무언가를 창조할 때에는, 다소 경험이 부족하더라도 참신함과 도전 정신을 가진 젊은이들에게 많은 기회가 열려 있습니다. 하지만, 사회 체계가 완비된 세상에서 청년은 오랜 시간이 걸리는 제도권의 육성 및 검증 절차를 반드시 통과해야만 엘리트가 될 자격을 가질 수 있습니다. 평균적인 교육수준과 성장환경은 이전 세대보다 훨씬 높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한국 청년들이 이전 세대가 동일한 나이에 했던 것만큼의 사회적 과업을 수행할 수 없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물론 저는 제 동년배 청년들의 집단적 역량이 산업화 청년들과 민주화 청년들의 발끝에라도 미칠 수 있을지 매우 의심스럽습니다만, 이것은 엄연히 별개의 논점입니다.)
 
청년이 위대한 근대사회 건설의 주체에서 동정의 대상으로 추락한 것은 대략 청년의 취업난이 심각해진 2003년경부터인 것 같습니다. (1990년대의 X세대는 하다못해 한국을 문화적으로 보다 자유롭게 만들 세대 주체로 기대받았습니다.) 그렇게 20년이 지나도록 청년실업 문제는 전혀 개선되지 않았으며, 마치 만성질환처럼 한국의 한 특징으로 자리 잡고 말았습니다. 어렵게 취업을 하더라도 부동산 가격이 너무 비싸 자가주택을 마련하는 것도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 되었습니다. 결혼과 출산, 육아의 꿈까지 이루려면 요구되는 사항이 너무 많아졌습니다. 경제가 저성장 국면으로 접어들어 대규모로 고용이 창출되지 않는 구조로 변한 것만으로도, 한국사회의 분위기는 전보다 많이 암울해졌습니다.
 
세계적인 차원에서도 1945년 체제가 제공해 왔던 정치적, 외교적, 안보적, 경제적 안정이 근간부터 뒤흔들리고 있습니다. 공산권 붕괴 이후에 나타난 세계화 및 미국 일극체제 하에서의 좋은 시절은 저물고 있습니다. 이제는 긴장이 상당했지만 그래도 불안정성이 지엽적인 수준에서 충분히 관리되었던 냉전기보다 위험한 세계가 우리 곁으로 성큼 다가오고 있습니다.
 
서양권의 일부 청년들은 이러한 상황을 자조하며 자신들을 ‘Doomer’라고 지칭합니다. 영어에서 ‘doom’은 망한다는 뜻의 동사입니다. 현재 서양 청년은 처지가 좋지 않은 자신을 ‘Boomer’(전후의 경제 황금기에 태어나고 성장한 베이비부머 세대)와 대조시켜 바라보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기성세대처럼, 서양의 Boomer 세대 역시 청년기였던 1960~70년대에 엄청난 문화적 변혁을 주도했고, 1990년대가 되자 빌 클린턴과 토니 블레어를 대표로 내세워 집권 세력이 되는가 하면, 막 시작된 탈냉전과 세계화, 고도의 시장 자유화와 컴퓨터 혁명(제3차 산업혁명, 제1차 정보화 혁명)의 흐름에 올라타서 정치, 경제, 문화 등 모든 영역에서 명실상부한 주류 세력이 되었습니다. 불과 30~40대의 젊은 나이에 말입니다.
 
1945년부터 2016년까지, 세계사는 낙관의 시대였습니다. 비록 상당한 어려움과 시련이 있더라도, 그 시대 사람들은 세상이 끊임없이 나아질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그전부터 근대화의 흐름은 계속되어 왔기는 했지만,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들에게 근대화의 문호가 개방된 시기는 1945년 이후였습니다.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을 겪은 인류는 큰 전쟁이 재발하지 않도록 공을 들였고, 이는 국제평화가 달성 가능할 것이라는 낙관을 키웠습니다. 유럽과 일본은 빠르게 전후 복구에 성공했고, 미국을 비롯한 제1세계는 최고의 경제 호황을 누렸습니다. 동구 공산주의 국가들도 나름대로 생활수준이 향상되었으며, 여성인권 같은 부분에서는 오히려 서방보다 앞서기도 했습니다. 식민지배를 받던 수많은 나라들이 독립을 쟁취했고, 그 중에서 한국이나 타이완 같은 몇몇 국가들은 놀라운 경제성장을 달성했습니다. 국제 평화나 소수자 인권, 정치 민주화나 언론 자유 등, 거의 모든 영역에서 세계는 개선되는 추세에 있었습니다. (이코노미스트, 프리덤 하우스 등에서 발표하는 ‘민주주의 지수’를 참고.)
 
그러나, 이제는 근대에 대한 근본적인 도전이 찾아오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의 청년은 낙관주의 시대의 청년과 다르게 근대를 수세적으로 방어하는 데에 전념할 수밖에 없습니다. 기성세대가 청년 담론을 반복한다고 해서, 예전처럼 직접 사회를 일궈내는 청년 주체가 만들어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 기성세대가 대상화한 청년은 실제 청년이 아닙니다. 차라리, 청년에 대해서는 그냥 생각하지 않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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