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홀로 길을 걷네. 1] 역류, 서촌에서 북한산 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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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토끼풀


동지와 연말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나란히 온다는 것은 얼마나 묘한 대비인가!
 
오후의 햇살이 헐벗은 나뭇가지를 쓰다듬다 산을 넘으면, 어둠은 거인의 발자국처럼 성큼성큼 다가온다. 겨울 들어 네 번째 절기인 동짓날은 물리적으로 한해를 떠나보내는 송년의 시기이자, 심리적으로는 지는 해를 따라 나 자신의 태생적 습관과 거침없는 실수에 대하여 반성의 우물 안에 나를 데려다 놓는 시간이다. 태양도 황도의 가장 아래쪽 길로 접어들어 바닥을 긁고 지나가는 날이니, 나 또한 발밑의 돌계단을 더듬어 얼음같은 바닥에 서야 하리라. 캄캄한 어둠 속으로 2022년이 저문다. 지난 한해는 나뿐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절망적인 시간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가? 하루 한 꼭지의 진실을 담은 글이 절실하고, 심장을 향해 육박해오는 시를 찾는 분이라면 아마 당신도 그러하실 것이다.

2022년 2월 마지막 날, 나는 경복궁 옆 서촌에서 경기도 고양시 북한산 밑으로 이사를 했다.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하나는 경제적인 이유, 이 늦은 나이에 돈을 잃었다. 주택융자금 외에 또 한 덩어리의 빚이 생겼다. 퇴직 후에도 이어지는 치명적인 허술함, 그 어리석음의 뿌리는 깊고도 질기다. 두 번째 이유는 빚이 늘어난 일에 대한 자기 처벌, 돈에 대한 투항과 저항의 뜻으로, 불편한 공간 가난한 시대로 나를 던져 넣기 위함이다. 북한산 밑은 서울과 가까운 거리라서 야생이라 할만한 환경은 아니지만, 외출과 귀가 시, 상당한 불편함과 격절감이 느껴지는 곳이다. 그리하여 나는 오래 살 곳으로 선택했던 동네, 서촌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동지에 마주하는 두 겹의 시간처럼, 이사 후의 내 발길은 두 공간을 오간다. 조선왕조의 궁궐이 있고 뽀얀 가로등과 쇼윈도의 불빛이 늦은 밤길을 지켜주는 서촌과, 캄캄한 어둠 속의 외곽도로 옆 버스정류장에 내리면 우뚝 솟아오른 검은 산이 있는 동네를.
 
퇴직 후 주거지를 산밑으로 옮겼다고 하면 사람들은 귀촌하여 좋은 공기 속에서 텃밭을 가꾸는 여유를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어쩔 수 없는 사정 때문에 이사를 결정했고, 이 와중에 들려오는 한 가닥 내면의 소리가 있어, 시간을 반대편으로 되돌리는 역류의 길을 가보려 한다. 상처 입은 동물이 피신처에 엎드려 찢긴 곳의 새살을 기다리듯이, 나는 여기 엎드려 나를 따라오는 어둠과 절망을 다르게 느껴보고 싶은 것이다. 가만히 문밖의 어둠과 바람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돈이 곧 인격이고 자존감인 시대라지만, 나는 그런 지침에 동의하지 않았고, 가난하든 풍요롭든 숨이 끊어지는 날까지, 사람은 저마다의 이상에 따라 자기의 생활을 밀고 나갈 뿐이다. 시인이란 다른 사람이 가지 않는 낯선 곳을 서성이는 한낮의 몽상가가 아닌가. 더 당당하게 나는 찬 바람을 마시고 야생과 후진의 길을 걸을 것이다. 자, 이 경계에서 나는 과연 누구를 만나고 무엇을 볼 것인가.
 
지난봄 내가 떠나온 서촌을 떠올려 본다. 경복궁 담장의 기와를 따라 서쪽으로 씻어내린 빗방울이 인왕산에서 흘러내린 도랑물과 합쳐져 청계천으로 흘러드는 곳, 도심이지만 뭔가 촉촉한 이야기가 있는, 낮고 소담스러운 동네다. 고궁에서 인왕산까지는 사적지 주변의 층고제한으로 높은 건물과 아파트가 없다. 낮은 건물 사이로 이어지는 길은 책 속의 옛이야기처럼 구한말부터 일제강점기의 역사와 에피소드가 있고, 골목에는 잘 구워낸 빵냄새와 커피향이 풍겨온다. 비정하게 치고 올라오는 고층빌딩을 저만치 물리고 하늘을 온전히 바라볼 수 있으며, 한나절이면 인왕산이나, 북악산을 다녀올 수도 있다.
 
인왕산 남쪽 자락에는 토지와 곡식의 신께 제사 지내던 사직단이 있고, 그 뒤에는 궁수들의 수련장 황학정이 이어진다. 북악스카이웨이로 이어지는 둘레길 따라 창의문 앞 부암동 언덕에 서면 앞뒤로 남산과 북한산을 마주하게 된다. 거기서 커피 한잔을 마신 뒤 청와대 앞 광장으로 내려오면 서촌 둘레를 크게 한 바퀴 돈 셈이 된다. 퇴근 후의 젊은이들이 러닝클럽을 만들어 경복궁 담장을 돌고, 저녁을 먹은 후 청와대 숲길을 따라 주민들이 조명 속으로 밤 산책을 하기도 한다. 이제 골목길을 걸어보자. 옹기종기 담장을 맞대고 지어진 작은 집들, 어쩌면 다정해 보이기도 하고, 살짝 궁상스럽기도 한 서민들의 살림살이가 엿보인다. 담장 너머로 식탁의 밥 냄새와 식구들의 이야기 소리가 들려올 것 같다.
 
옛 집터를 이어받은 주택가에는 주인의 형편에 따라 한옥을 그대로를 유지하기도 하고, 현대식으로 새집을 짓기도 했는데, 옛 정취와 지금의 감각이 서로를 다정히 비춰주고 있다. 이 골목에 서서 몇 세대 전으로 시곗바늘을 되돌리면 조선 후기의 서촌 사람들과, 일제강점기의 불우하고 비장했던 언니 오빠들이 지나갈 것만 같다. 이렇게 여러 시대에 걸쳐 시간이 겹쳐지는 간시간(間時間)적인 지역이 서촌이다. 둘 이상의 다른 문화가 만나고 서로를 비추는 곳에서 새로운 예술이 탄생하고, 꽉 막힌 벽을 뚫는 아이디어도 나오는 법, 여기서 혁명가와, 학자, 예술가들이 많이 살았고 사라져 갔다.
 
이렇게 소담하고 서민적인 동네 서촌도 21세기의 힘든 고비에 와 있다. 대량소비와 상업자본의 손길이 가까이 뻗어있고 코로나 펜데믹 기간에 비싼 집세와 월세를 감당하지 못해서 가게, 음식점, 카페가 문을 닫고 있다. 인생 끝까지 최선을 다해 실패를 거듭하던 나는, 용케 작은 집을 얻어 들어갔지만 4년이 채 못되어 그 동네를 떠났다. 혼자 사는 단촐한 살림이라 결단하고 정리하기는 쉬웠지만, 흰머리와 무거운 몸을 이끌고 다시 방랑을 나서는 심정이었다. 다행히 몇 년 전에 인연을 맺은 북한산 밑 그 동네가 생각났다. 북한산의 서쪽 사면을 따라 김포로 빠지는 창릉천이 흐르는 곳, 개울을 경계로 서울과 나뉘는 작은 절골마을이 있다. 개발과 보전의 사각지대인 절 입구에는 경로당 겸 마을회관도 하나 있고, 물길 따라 벼를 심던 작은 논도 있었다는데, 지금은 그마저 시멘트로 지우고 빌라들이 들어섰다. 아직 100가구가 넘지 않는 동네라 도시가스가 안들어온다. 연탄보일러나 LPG가스, 석유보일러로 난방을 하는데 기온은 서울보다 3~4도 아래로 내려간다. 방안에서도 두껍게 입고 웅크린 몸을 자주 펴주어야 한다.
 
내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2016년 봄, 수술을 마치고 요양을 해야하는 시기였다. 시내에서 벗어나 멀지 않은 곳에 다리를 저는 대금의 명인이 살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구경왔던 동네, 대문 옆에 가득히 목련꽃이 내려앉은 집이 있고 방이 빈다는 걸 알았다. 집은 낡았지만 울타리 안에 텃밭도 있고 집안에서 북한산을 원 없이 바라볼 수 있는데, 이곳 토박이인 주인아주머니는 솔직하고 경우가 밝았다. 한 울타리 안에서 음식과 이야기를 나누고, 나는 산을 다니며 조금씩 건강을 일으켰다.
 
40년 된 농가주택이라 불편한 점이 없지 않았지만, 그중 가장 취약한 것은 실내 화장실이 없는 것이었다. 땅은 절의 소유이고, 주인은 이제 시내로 이사갈 마음이 있어서 집을 고치는데 더 이상 돈을 쓰지 않았다. 나에게 300여만 원의 돈을 들이면 보일러와 세탁기가 한꺼번에 들어있는 샤워실에 양변기를 설치할 수 있으니 결정하라고 했다. 아니면 텃밭 건너 재래식 화장실을 사용하면 된다고… 나의 선택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있는 그대로 살겠다” 였다. 어린 시절 시골에서 자랐고 70년대 이후 서울 변두리 판자촌에서 살아보았기 때문에 재래식 화장실에 대해 거부감이 적었고, 지금 다시 재래식 변소를 사용해 본다는 것는 일상 속에서 작은 타임머신을 타고 어린시절로 돌아가는 것처럼 흥미로운 일이 아닐까?
 
돈을 아끼기 위해서라기보다, 그 집에서는 그렇게 사는 게 어울리겠다 싶었고, 어쩌면 평생 잊을 수 없는 생생한 추억, 신의 한 수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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