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이 운명이 되는 날
올 겨울은 더디게 당도한 계절이 심통을 부리기라도 하듯 유난히 춥고 눈도 잦았다. 눈 내리는 날이면 출퇴근하는 사람들의 마음에는 짜증이라는 돌덩이가 쌓이고는 하는데, 나처럼 발로 뛰는 영업직인 보험설계사에게는 돌덩이의 무게가 조금 더 묵직하게 다가올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먹고사니즘’은 앉은뱅이를 일으킨 예수처럼 내 몸을 벌떡 일으켜 위험하다는 이불 밖 눈 쌓인 새벽길을 나서게 하니 과연 자본주의의 근간이 되는 철학이라 하겠다.
되도록 동선을 고려해 외근을 잡는데도 마음먹은 대로 흘러가지만은 않는 것이 영업직의 숙명인지라 아침도 건너뛰고 나섰다가 문득 정신을 차려보면 어느 낯선 거리에 한 중년 여성이 공복의 배를 부여잡고 서 있는 상황도 드물지는 않다. 우리나라에도 익히 알려진 일본드라마 의 한 장면이 떠오르는 순간이다. 주인공 ‘고로’씨의 시그니처 또한 출장으로 간 어느 도시에서 ‘하라가 헷따(배가 고프군)’ 이런 대사를 읊조리는 거니까.
그날도 날씨가 순하지 않았다. 분명 일기예보 상으로는 ‘영상’의 기온이길래 두꺼운 패딩 대신 오랜만에 라인이 착 떨어지는 코트를 선택했다. 아뿔싸! 바람은 미처 예상하지 못한 변수였다. 여며도 효과가 미미한 코트 안으로 무뢰한이 되어 파고드는 겨울바람과 공복의 힘은 맵기가 요즘 먹방유튜버들 사이에서 유행한다는 실비집 배추김치 같았다.
이러다간 동사와 아사를 더블 콤보로 맞이할 것만 같은 위기를 감지한 나는 고개를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해가 똑 떨어지기 직전의 그 시각 내가 서성이고 있던 장소는 충무로 인쇄소 골목, 그 순간 맛집에 능통한 오랜 친구의 연락이 울렸다. 인쇄물을 수령하기 위해 충무로에 와있으니 시간 되면 밥이나 먹자는 메시지가 그토록 구원처럼 들릴 줄이야.
친구의 등 짝을 바람막이 겸 이정표 삼아 줄레줄레 따라 들어간 곳은 [굴밭]이라는 굴 전문점이었다. 충무로 노포답게 간판부터 시작해 세월의 더께가 곳곳에 묻어있는 가게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눅진한 연기 속에서 굴 전 부치는 냄새가 고소하게 풍겨오고 있었다.
우리는 먼저 굴 국밥과 굴 알밥을 주문했다. 언 몸을 녹이자며 핑계 삼아 소주도 한 병. 기본 찬은 갓김치와 깍두기와 배추김치 그리고 조개젓과 낙지 젓 이렇게 다섯 가지로, 김치 맛을 보니 내공이 보통이 아닌 집임을 알 수 있었다. 특히 갓김치는 양쪽 엄지를 다 올리고 친구의 엄지까지 빌려야 할 정도로 맛이 깊고 시원했다. 게다가 젓갈도 어찌나 감칠맛이 좋은지 기본 찬만으로 소주 한 병은 너끈하지 싶었다(는 실제로 기본 찬만으로 둘이서 소주 한 병을 비웠다). 이어 나온 굴 국밥은 슴슴하니 김치와의 궁합이 좋았고, 굴 알밥에는 만 원짜리 지폐를 내밀면 거스름돈이 있는 금액이 송구할 정도로 굴이 잔뜩 들어있었다.
음식이 줄어갈 때마다 테이블 위에는 소주병이 하나둘씩 늘어갔다. 소주 병 개수에 질세라 곁들임 안주로 굴 전도 추가로 주문했다. 굴 전에는 싱싱한 굴로 만든 어리굴젓이 함께 나왔다. 소주의 무한궤도가 있다면 바로 이곳일까? 대체 소주를 얼마나 시켜야 만족하시겠습니까? 하는 마음의 소리가 들려왔다. 그 후로 [굴밭]은 친구의 단골집만이 아닌 나의 단골집이 되어 주변 사람들에게 소개도 제법 했다.
만일 그날 바람이 불지 않았다면, 만일 그날 내게 충무로 외근이 없었다면, 만일 그날 그 시간 친구가 충무로에 있지 않았다면, [굴밭]이 내 단골집이 될 가능성은 희박하지 않았을까? 무엇보다 외근하는 직업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그 가게에 가 볼 기회가 없거나 더 훗날의 일이 되었을 테다. 세상의 많은 일들은 이렇듯 계획과 우연의 직조로 이루어지고는 한다.
누군가는 계획이라는 단정한 씨줄에 거친 우연의 날줄이 얽히게 되는 상황을 꺼릴지도 모른다. 예상치 못 한 변수라는 건 대부분 나를 곤란하게 만드는 경우가 많은 탓이다. 하지만 일상이 늘 마음먹은 대로만 흘러간다면 인간의 호기심은 고양이를 죽이기도 전에 이미 사장된 감각이 되었을지 모른다. 호기심은 우리에게 우연과 운명의 기운을 믿게 하고, 행운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도록 만들지 않던가.
‘곳’은 지리적 공간이나 지역의 어느 위치를 가리키는 말로 ‘장소’와 비교해 막연하고 추상적인 위치를 의미한다. ‘장소’의 시제가 현재형이라면 ‘곳’은 미래를 품은 단어 같다. 미래를 향한 우리의 감상은 ‘희망’ 쪽에 더 기울어져 있어 현재 상황이 아무리 힘들어도 미래는 지금보다 나아지리라 믿으며 행복한 미래를 현실화 시키려 안간힘을 쓰며 산다.
우연은 현재의 장소와 미래의 곳에 깃드는 사건이다. 우연이 사고가 되는 날도 있지만 행운으로 다가오는 날도 분명 있다. 어느 추운 겨울날 우연히 만난 친구 덕분에 먹게 된 한 그릇의 뜨거운 굴 밥의 모습처럼. 그날 선사 받은 뚝배기의 온기와 소주의 달았던 한 모금을 잊고 싶지 않아 나는 그 우연의 힘을 주변인들에게 알리는데 꽤 열심이다.
사람들은 묻는다. 영업직 어렵지 않냐고, 싱글맘으로 아이 키우며 사는 거 힘들지 않냐고, 여러 직업을 가지고 있는데 집중이 잘 되냐고. 먹고사니즘이 자본주의의 철학이라면 함께사니즘은 나를 살게 하는 철학이다. 오늘도 어제처럼 나는 튼튼한 두발을 사용해 걷는다. 언제 만날지 모를 미지의 ‘곳’을 기다리며, 그 곳에 당신이 부디 함께이기를 기대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