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홀로 길을 걷네. 2] 역류, 밤의 산은 움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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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토끼풀

그래, 나는 병든 몸으로 2016년 12월 추운 겨울날, 홍은동에서 이삿짐을 꾸려 나는 이 산밑으로 들어왔다. 가기 전에 도배를 하고, 삭은 시멘트가 조각조각 깨지고 있는 샤워실 바닥과 벽에다 걸레받이 높이로 타일을 붙였다. 비록 실내에 화장실은 없지만 부엌문을 열면 거기가 부엌이고, 손바닥만한 작은 방을 거쳐서, 발바닥만한 중간 방에서 침대를 놓고 잠을 잤다.

벽 너머 큰방은 응접실 겸 서재로 쓸 생각이었다. 서재방에는 통나무 기둥에다 유리를 끼운 큰 창이 있고, 양옆으로 열고 닫을 수 있는 세모꼴 유리창이 날개처럼 붙어 있었다. 창밖에는 텃밭과 목련 구기자가 자라는데, 봄과 여름에는 꽃그늘이 그윽하고, 겨울이면 나뭇가지 사이로 북한산이 보였다.

주부가 되어 음식을 만들어 먹거나 잠을 자거나 하는 일상적인 일은 부엌과 작은 방에서, 손님이 오거나 공부를 할 때는 서재방에서 하는데, 거기 가려면 다시 부엌문을 나가 신발 신고 처마밑을 지나 밖에서 문을 열어야했다. 요런 불편함도 살짝 신선했다. 한 집에서 신발을 신고 움직여야 하는 공간이라니, 여기서 또다시 시간을 몇십 년 전으로 되돌리는 일이며, 하루에도 몇 번 신발을 갈아신고 이방 저방을 옮겨다니니까, 1~2분 동안의 작은 노력으로 이방 저방을 왔다갔다 하면서 시간을 거슬러 사는 것이다. 번거롭지만 재미있어서 실내에서 벽을 도려내고 문을 달까 하다가 그만 두었다. 서재에 갈 땐 옷을 갖춰 입고 가야하나? 혼잣말을 하면서…
 
이제 재래식 화장실 즉, 변소 사용 후기를 뒤돌아보련다. 가난과 야생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재래식 변소를 쓰는 일에 큰 문제가 없는 여자였다. 그러나, 간혹 배탈이 나거나 야간에 신체적 배설을 해야할 때가 있었고, 추울 때나 비가 들이칠 때는 제법 귀찮았지만 불쾌하진 않았다. 어둔 밤에 신호가 오면 부엌문을 열고 마당의 빨랫줄에 매달린 알전구를 켠 다음, 텃밭 너머 전나무 뒤 구멍이 숭숭 뚫린 채 서 있는 창고형 화장실로 가야했다.
 
번거롭지만 강렬하게 필요한 그곳으로, 화장실 안에 있는 알전구도 켠다. 돌아서서 두 발을 제자리에 디디고, 냄새가 진동하는 찬바람 속에 속살을 내밀고 앉는다. 바깥은 어두운데 엉성한 벽돌구멍 너머로 바람 소리에 섞여 수많은 소리가 들이친다. 새나 산짐승이 알아채고, 이쪽을 보고 있을 뿐만이 아니라, 심지어 맹금류나 지나가는 도깨비라도 있으면 슬쩍 나의 속살을 관찰하러 다가오지나 않을지, 아래쪽에서 빨간 수건 파란수건이 올라오진 않을지, 순간순간 무서움이 훅 몸을 덮치기도 한다. 으으으, 이를 악물고 힘을 쓰면서 짧은 순간을 버티고 나면, 후다닥 몸을 날려 부엌문을 향해 달려오는데, 찬바람에 옷에 묻은 냄새를 씻고, 참았던 숨을 내쉬고 들이쉰다.
 
아차, 다시 빨랫줄의 알전구를 꺼야했다. 뒤돌아 섰다. 그 순간 들숨에 마신 한 컵의 밤공기가 너무나 깨끗하고 맛있었다. 훔 하-, 훔 하-, 코로 입으로 폐까지 밤공기를 가득 들이마셨다. 머리를 제쳐서 올려다보니 퍼렇게 열린 하늘이 보이고, 아까부터 보고 있었다는 듯이 갸름하게 얼굴을 기울인 달이 보이고, 구름 사이로 작은 별들이 드러났다. 마음은 편안하게 녹기 시작한다. 주변을 둘러본다. 대문 옆에 밝은 가로등, 진입로 마을회관 앞의 가로등도 보인다.
 
으응 뭐야, 아무도 나를 방해하거나 노리는 존재는 아무도 없구나! 그저 어둡고 묵묵하고 바람이 드나들고, 그것뿐이구나. 그리고 저 멀리 언덕 너머 개울 건너 서있는 북한산이 보인다. 낮에 보던 의젓한 북한산이 이제는 모든 색깔을 감추고 시꺼멓게 그윽하게 우리집을 지켜보고 있었다. 까치발을 든 장난스런 친구처럼 살짝 키도 커져서, 줌인한 듯 우뚝 당겨와서 이곳을 지켜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북한산이 저렇게 높았나? 쳐다보고 쳐다보고 한참을 다시 쳐다보았다.
 
비오는 날 다르고, 눈오는 날 달랐다. 꽃피고 단풍든 날 다 다르지만 그 북한산이 밤의 얼굴로 나와 만났다. 이제 모든 어둠을 안으로 감추고 오로지 볼륨과 높이 윤곽선만 가지고 저기 서 있다. 희부윰한 하늘로 힘껏 솟아오른 저 땅! 선캄브리아기일지 홍적세일지 저 아득한 지질시대에 북한산이 처음 생겨날 때는 바위가 될 마그마를 품고 얼마나 깊은 땅으로부터 솟아오른 것인가? 그 힘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짐승과 군대가 다 담벼도 못당할 만큼, 어마어마하고 괴물같은 시원의 힘을 지니고 있었을 것이다. 지금 저렇게 오묘한 선을 이루며 바위가 굳어지고, 바위가 안에 남은 기운을 사방으로 내뿜어서, 모래와 흙을 만들고 나무를 기르고 이슬과 물방울도 만드는구나.
 
무거운 몸을 밀어올려 꼭대기까지 올라간 흰 바위의 영롱한 모습을 나는 하루에도 몇 번이나 정신을 뺏기고 바라보았던가! 미인을 좋아하는 선비의 마음, 미남을 좋아하는 여인의 마음보다 살뜰하게 나는 요즘 저 산을 바라보고 있다. 알프스와 희말라야, 중국의 기암절벽, 세상에는 미산과 절경이 많다. 그러나 여행 가서 사진에 담아오는 산은 셔터 안에서 얼어있어서, 매일 변화하는 내 앞의 북한산에 미치지 못한다.
 
낮의 산은 천의 얼굴을 가졌다. 한번도 같은 얼굴을 한 적이 없다. 꼭대기에 바위를 가진 악산(岳山)은 더욱 그렇다. 계절에 따라 햇볕과 구름의 양에 따라, 아침과 저녁, 기온의 변화와 바람, 습기와 압력에 따라 산은 다른 얼굴로 변한다. 게다가 산을 마주보는 나는 또 어떤가? 기쁠 때, 슬플 때, 흡족할 때, 외로울 때, 몸이 가뿐할 때, 배가 부를 때, 좋은 기별이 있을 때, 한가할 때와 쫓길 때 북한산을 보는 내 마음도 달라진다. 그 수많은 경우의 수에 따라 북한산은 매번 또 다른 얼굴로 나를 바라본다.
 
게다가 그는 내가 눈만 들면 항상 그 자리에 있다는 것, 변화무쌍한 이 세상에 이 항상성이 그 얼마나 큰 감사이고 매력인지 나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다. 인간인 내가 볼 때 산은 그 자체로 영원이다. 그 어떤 신과 경전도 저 구체적인 영원성에 비하면 가변적인 기호이자 신념, 그 해석의 체계에 불과하다.
 
여행객과 산꾼들이 다녀가고 삼라만상이 잠든 후, 적막해진 밤에 보는 산은 희부윰한 하늘을 등지고 오로지 시꺼먼 윤곽만으로 서있다. 낮에 피던 온갖 색깔을 안으로 들여놓고 자신의 얼굴마저 덮어버린 채 그 우직한 자세만으로 서 있는 저 존재! 저 모습이 산의 진정한 얼굴이 아닐까. 얼굴을 죽이고 진리를 구하는 수행자의 태도라고나 할까! 저 큰 존재의 현존 앞에서라면 나는 내 부끄러움과 날선 자의식을 내려놓을 수 있을 것 같다. 어떤 큰 어른이나 위인보다 산은 내게 큰 의지이며, 밤의 호위무사임 알겠다.
 
가만히 보라, 밤의 북한산은 우리집을 포함하여 주변 수십 리 마을과 한 덩어리로 이어져 있으며, 드디어는 동쪽 하늘의 일부를 이룬다. 이렇듯 밤의 산은 형용하기 힘든 위엄과 함께 깊고 호젓한 안정감을 준다. 그러니 여기에 깃든 새나 산짐승과 들짐승, 세상의 힘쎈 사람들은, 저 산에 엎드려 부디 혼자만 아는 부끄러운 마음을 고백하면 좋을 것이다. 저 높은 꼭대기부터 시냇가까지 두루 품어 보살피는 웅혼한 기운이 있으니, 이를 ‘산신령’이라 부르는 것이리라. 조금 전까지 화장실에 쪼그려앉아 오들오들 떨던 내가 이제 어깨를 편안하게 내려놓고 집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밤이 깊을수록 하늘은 오히려 투명하다.
 
차고 맑은 밤공기 속에 지상에 발목 두 개가 꽂혀있는 내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밤 나는 알았다. 낮에는 우리가 산에 가지만, 밤이면 검은 얼굴로 산이 나에게로 온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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