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와 신애 -‘벌레 이야기’와 ‘밀양’을 보고 나서-
1학기 종강 이후, 이청준 작가의 소설 ‘벌레 이야기’를 읽고서 ‘거북한 벌레 이야기’라 제목 붙인 글을 썼었다. 그 글에서는 아들 알암이를 잃은 ‘아내’와 아내를 자살로 이끈 ‘종교적 요소’에 집중해 내용을 구성했었다. 무신론자의 편에 있었기 때문에 신의 존재에 대한 의문이 항상 있었고, ‘아이를 잃은 엄마의 마음’을 무시하고 ‘신에 대한 부정을 반박하는’ 김 집사와, 장기를 기증함으로써 신에게 구원받을 것이라 말하는 김도섭이 역겨워 “같은 인간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인간은 신의 뜻을 설파할 수 있을까?”라는 문장으로 글을 끝냈었다. 글을 모두 작성하고, 끝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아내를 생각하며 제목에 ‘거북한’이라는 형용사를 붙였다.
이후 영화 ‘밀양’을 시청하기 전까지는 종교에 대한 어두운 마음을 버려둘 수 없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지금까지도 그 마음을 일부 덜어냈을 뿐, 모두 버리지는 못했다. 원작 소설에서는 아내가 자살하면서 이야기가 끝나지만, 이를 각색한 영화 ‘밀양’에서는 신애가 계속해서 삶을 이어간다는 결말로 끝냈다. 그녀 또한 아내처럼 자살 시도를 감행했지만, 피가 나는 손목을 이끌고 밖으로 나가 도움을 청한다. 자살에 실패하고 삶을 영위하는 신애의 결말을 보면서 소설에서 내려놓지 못했던 감정을 일부 풀어낼 수 있었다.
원작 소설 ‘벌레 이야기’의 화자는 ‘나’, 즉 아내의 남편이다. ‘아이를 잃은 엄마의 마음’을 표현하려면 화자를 아내로 두는 것이 최고였을 텐데, 이청준 작가는 화자를 아내로 설정하지 않았다. 아내가 아닌 ‘나’를 화자로 둔 것은 아마 ‘나’라는 객관적인 시선을 통해 사건을 정확히 전달함과 동시에 독자를 감정의 수렁으로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거북한 벌레 이야기’를 쓸 당시에는 화자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아내의 마음에 깊이 빠져 결과적으로 너무 감정적인 글을 쓰게 되었다. 글을 끝마치고 난 이후에도 그 감정을 내려놓지 못해 아버지에게 ‘벌레 이야기’의 줄거리를 말씀드렸고, “아빠가 ‘아내’라면 어떻게 할 것 같아?”라는 질문을 했었다. 아버지의 생각은 나와 비슷하셨다. “자식 잃은 어미와 아비는 눈에 보이는 게 없다.”라며 범인을 어떻게 해버리겠다는 뉘앙스로 말씀하셨다.
그렇게 몇십 분간의 대화를 끝내고 방으로 돌아와 다시 그 대화를 곱씹었다. 결국 ‘범인 어떻게 해버리겠다’는 건 ‘사적 제재’에 불과하다. 이미 사형수가 된 ‘김도섭’에게 사적 제재는 허용되지 않는다. 아니, 사적 제재는 원래 허용되지 않는다. ‘정당한’ 법의 심판을 통해 범인의 죄를 뉘우치게 하는 것만으로 마음이 풀리지 않는 것은 어쩔 수 없나 보다. ‘벌레 이야기’의 속 아내 또한 처음에는 범인을 찢어발기고 싶어 했지만, 사적 제재는 허용되지 않기 때문에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을 찾았다. 그 최선은 아이의 명복을 비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김 집사와 함께 아이의 명복을 빌며 범인을 용서하겠다는 마음마저 가졌었으나, 장기기증을 통해 신으로부터 구원을 받을 것이라 말하는 김도섭에게 절망을 맛본다. 그리고 끝내 절망한 마음은 자살에 이르렀다.
하지만 영화 ‘밀양’에서 ‘신애’는 아내와 달리 적극적으로 몸부림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녀도 아내와 똑같이 종교를 통해 마음의 안식을 얻고, 박도섭을 용서하기 위해 교도소를 찾았지만 그는 이미 신으로부터 용서받았다고 말한다. 신애는 아내와 같이 절망한다. 하지만 그녀는 절망에서 몸부림친다. 가게에서 CD를 훔쳐 ‘거짓말이야’라는 노래를 틀고 종교행사를 방해하거나, 자신을 위해 기도하는 목사의 집에 돌을 던져 유리창을 깨버리기도 하고, 심지어는 목사를 유혹하는 짓도 서슴지 않았다. 이 시도조차 좌절되어 구토까지 하지만 무력감과 절망에 빠져 아무것도 하지 않는 아내와 다르게 신애는 무력감과 절망을 어떻게라도 표출하려고 시도한다.
이를 통해 신애는 아내와 비교했을 때 굉장히 적극적인 인물로 보인다. 영화만 봤으면 ‘원래 저런 성격을 지닌 사람인가’하고 넘길 수도 있겠지만, 원작 소설을 읽은 나에게는 감독이 의도적으로 신애의 성격을 그렇게 설정했다고 생각한다. 원작 소설을 읽으면서 가장 답답하게 느꼈던 부분은 ‘화가 날 정도로 뻔뻔한 범인’도, ‘옆에서 계속 믿음을 강요하는 김 집사’도 아닌, ‘절망에 빠져 아무것도 하지 못한 아내의 모습’이었다. 그런 아내의 모습은 가히 답답했다. 사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이 아닌데도, 자꾸만 결과가 나빠졌고 결국 최악의 끝을 맞이했다. 그런 아내의 모습에서 너무 답답함을 느꼈는데, 영화 밀양에서 적극적으로 행동에 나서서 반감을 드러내는 신애 때문인지 아내에게서 느낀 답답함을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었다.
아내와 신애는 성격뿐만 아니라 곁에 있는 인물들도 다르다. 아내의 곁에 있던 김 집사는 지독한 신앙심을 가진 인물이다. 동시에 ‘아이 잃은 엄마’의 마음을 외면하며 철저히 깊은 신앙심만 강요하는 이었기 때문에,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범인 김도섭이 아닌 김 집사가 아내를 자살로 이끌었다고 생각한다. 사적 제재를 가할 수 있는 범인과 사회는 없고 신을 믿지 않는 자신을 계속 반박하는 김 집사와 자신을 먼발치에서 지켜보는 ‘나’밖에 없으니 그녀는 더 살아있을 수가 없었다. 자신의 마음을 다독여주는 이들도, 다시 일어설 용기조차 없던 그녀는 결국 자살했다. 영화 밀양에서는 좀 다른데, 신애의 옆에는 ‘김종찬’이 있다. 초반에 그는 그녀를 도와주며 마음을 얻겠다는 목적으로 열심히 노력하지만 신애가 준을 잃은 이후로도 계속 곁에 남아 그녀를 도와준다. 신애에게 원망을 쏟아내는 시어머니와 그 가족들에게 할 말을 하기도 하고, 원래 다니지 않던 교회까지 나가며 그녀의 곁에 계속 남는다. 김종찬이 정말 순수한 마음과 의도로 신애를 사랑했는지는 모르겠으나, 한 가지 확실한 건 그가 영화끝까지 신애의 곁에 머물렀다는 점이다.
김종찬을 보고 있으면 원작 소설 속 화자인 ‘나’, 즉 남편이 생각난다. ‘나’는 아내의 곁에서 거의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다. 그저 소설 속 화자 역할에 충실하며 아내의 이야기와 말을 옮길 뿐이다. 물론 이는 소설과 영화의 매체적 차이 때문일 수도 있겠으나, 소설 내에서 ‘나’가 아내에게 적극적으로 무언가를 하지 않고 자살까지 계속 방관했다는 점 때문에 남편으로서의 존재가 아닌 ‘화자’의 역할이 두드러졌다는 점은 김종찬과의 완벽한 대조를 이룬다. 조금 새는 이야기일 수도 있겠으나, 절망한 곁에 있는 한 사람이 정말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종찬이 없었으면 신애는 영화 결말 이후에 또다시 자살을 시도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영화의 결말에서 종찬은 머리카락을 자르려는 신애를 보고 그녀의 앞에서 거울을 들어주는데, 이 행동 자체가 신애를 생각하는 마음인지, 아니면 여전히 ‘사랑’의 감정이 남아있어 행동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신애는 영화의 결말에서도 좀처럼 종찬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녀가 아들 준을 잃어 눈에 보이는 게 없어서 그런 것인지, 영화를 보는 내가 다 머쓱할 정도로 자신의 곁에 계속 머무르는 종찬을 보지 않는다. 종찬도 그 정도의 구애가 먹히지 않는다면 포기할 법도 한데, 어느 순간 신애가 다녔던 교회까지 나가며 그녀와의 접점을 계속 만들어갔다. 만약 ‘밀양’이 신애와 종찬 사이의 로맨스적 요소에 집중했다면 이야기가 가벼워지지 않았을까 싶다. 영화 포스터를 보았을 때, ‘이런 사랑도 있다….’라는 문구가 있길래 정말 로맨스 영화인 줄 알았으나 결국 이 영화는 로맨스의 탈을 쓴 비극적인 영화이다. 그러나 이 비극은 로맨스에 희석되어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 신애의 처절한 마음을 덜어내 준다. 이러한 점에서 영화 밀양을 감명 있게 보았다. 신애는 아내의 비참한 마음을 어느 정도 극복해 보여주는 인물이고, 종찬은 그런 그녀의 곁에서 이야기가 원만하게 전개될 수 있게 도와주는 인물이다. 영화 밀양을 보고 나서 ‘거북한 벌레 이야기’를 다시 읽었었는데, 그때의 나와 달리 지금의 나는 좀 더 객관적으로 ‘벌레 이야기’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영화 밀양은 종교를 비판할 의도를 지니지 않았다고 한다. 교수님 또한 이 점을 말씀해 주셨는데, 밀양을 모두 다 본 직후에도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사건 전개의 일부가 신애가 신으로부터 구원받았다고 말하는 김도섭을 용서하지 못하면서 일어난 일이기 때문이다. 종교 비판의 의도를 가지지 않았다고 해도 그렇게 보이는 건 사실이다. 다만 원작 소설 ‘벌레 이야기’를 읽고 영화 밀양을 보면 종교를 비판할 의도가 흐려지게 보인다. 영화 밀양에서는 원작 소설의 아내와 달리 신애를 적극적인 인물로 그려내 종교와 절망에서 어떻게든 벗어나려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것만으로도 종교적 비판의식을 흐려지게 한다고 생각한다. “신애가 발버둥 치는 것 자체가 종교에 대한 비판을 그려낸 것이 아닌가요?”라고 묻는 이가 있다면, 개인적으로 원작 소설인 ‘벌레 이야기’를 읽어보길 권한다. 영화 ‘밀양’은 원작 소설 ‘벌레 이야기’의 내용에서 무거움을 덜고 로맨스적 요소를 가미해 만든 이야기기 때문에, 원작 소설을 읽고 나면 영화 ‘밀양’은 그다지 종교 비판적인 요소를 담고 있지 않다.
원래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를 좋아하지 않았었다. 원작 소설을 영화화하는 과정에서 원작 소설의 이야기를 크게 벗어나 원작 소설의 맛이 사라질 때가 있기 때문이다. 처음 영화 ‘밀양’을 처음 봤을 때도 그런 생각이 들었었다. 하지만 예전에 썼던 ‘거북한 벌레 이야기’와 지금 쓰고 있는 ‘아내와 신애’를 보고 있으면, 원작 소설을 다시 생각할 여지를 준 좋은 영화라 생각한다. 영화 ‘밀양’은 원작 소설에서 느꼈던 답답한 감정을 덜어주는 역할도 했고, 약간은 미성숙했던 예전의 나를 되돌아보게 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