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 : 프로레슬링
현대 미국 정치를 공부하게 되면, ‘도널드 트럼프’를 반드시 한 번은 마주해야 한다. 길게 말할 것도 없이, 그는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대부분의 측면에서 트럼프는 부정적인 평가 일색이다. 모두가 이미 알고 있듯 인종 문제, 코로나 대응 문제, 기후변화에 대한 안일한 생각 등 그의 정치철학과 어록에 대해 하루종일 따져도 시간이 모자랄 것이다. 그렇기에 트럼프의 성격, 의도, 국제정치 철학에 대한 여러 갑론을박이 이어져 왔다. 마치 럭비공처럼 어디로 튈지 모르는 그의 언행과 정책은 트럼프를 흥미로우면서도, 가장 연구하기가 까다로운 대통령으로 만들었다.
그러다보면, 결국에는 “어째서 트럼프가 당선된 거야?” 라는 푸념 섞인 의문과 마주한다. 트럼프의 당선을 필연적인 결과였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미국인들이 잠깐 ‘정신을 잃어서’ 오판을 했을 뿐이라며 납득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이 인정하는 한 가지 사실이 있다. 그것은 힐러리와 트럼프의 대결이 이전의 어떤 대선보다도 훨씬 흥미진진했다는 것이다.
트럼프와 WWE(미국 프로레슬링 단체)의 연결고리?
대선을 재미있게 느끼게 해 준 공로는 대부분 트럼프에게 있다. 이에 많은 전문가들이 선거 당시 트럼프의 언행을 “WWE 프로레슬링”에 비유했다. 물론 “Tiger mom” 으로 잘 알려진 에이미 추아처럼 “남부 백인 남성들의 전유물이나 다름없는 WWE의 팬들이 집결하여 트럼프를 신격화하는 데 앞장섰다!” 라며 트럼프의 지지자와 WWE 애청자 간의 직접적인 연관성을 만들어내려는 시도도 있다. 실제로 WWE 회장인 빈스 맥마흔과 트럼프의 관계는 매우 친밀하고, 트럼프 자신도 WWE에 출연한 적이 있으며, 빈스 회장의 아내가 트럼프의 측근으로 임명되기도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것은 매우 협소하고 편향된 시각에서 비롯된 접근에 불과하다.
잠시 추억을 떠올려보자, 우리는 무엇 때문에 프로레슬링에 열광하는가? 우리는 경기를 보며 두 선수 사이에서 오가는 멋진 기술들에 환호한다. 하지만 각본, 즉 스토리야말로 흥행의 원천이다. 선수들의 캐릭터성을 확보한 뒤, 경기가 있기 전부터 악역을 맡은 선수는 갖가지 비열한 술수를 통해 선역을 몰아붙이고, 링 한가운데에서 일부러 저질 섞인 마이크웍(말이나 행동으로 상대방을 조롱하거나 도발하는 행위)를 함으로써 관중들로부터 야유 섞인 열광을 유도한다. 뛰어난 악역이 승리하여 정점에 서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그러나 선역 선수는 악에 굴복하지 않고 마이크웍에서 악역을 압도하거나, 재치를 발휘해 악역을 골탕먹이는 등 이후에 있을 경기에 대한 관중들의 기대감을 한껏 끌어올린다. 스토리가 더욱 극적일수록,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는 선수들의 경기 운영 능력이 출중할수록, 관중들은 프로레슬링의 매력에 빠져들게 된다.
힐러리와 트럼프, 선역 vs 악역에서 기득권 vs 언더독으로
이제 다시 대선으로 돌아가보자, 본격적인 대선 레이스 전부터 트럼프가 처했던 상황은 가히 절망적이었다. 대부분의 언론사가 트럼프를 비난하고, 수많은 할리우드 스타들과 대기업들이 힐러리를 지지했으며, 오바마 때부터 소위 모든 “올바름”을 민주당이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최초의 여성 대통령 타이틀을 획득할 수 있다는 신선함도 있었다. 선거 직전까지 대부분의 여론조사기관에서는 힐러리의 승리를 점쳤고, 심지어 공화당에서도 트럼프에게 반대하는 목소리가 터져나왔을 정도였다. 단언하자면, 이 무대에서 선역은 힐러리였고, 악역은 트럼프였다.
트럼프가 가진 최고의 행운 중 하나는 힐러리의 선거 캠페인이 정말 따분하고 형편없었다는 점이다. 힐러리 캠프는 굳이 안 써도 될 “고급스러운” 어휘를 동반하면서, 새로운 것 하나 없는 지루한 선거 캠페인을 이어 나갔다. 아무리 맞는 말 일색이라도 그 내용이 진부하고 똑같다면 누가 계속 귀를 기울이겠는가? 이는 프로레슬링도 마찬가지다. 관중들에게 환호받는 선역 역할을 맡았다고 해도, 선수의 경기력이 형편없거나 재미있는 각본을 소화해내지 못한다면, 선역이라 할지라도 야유와 욕설을 마주해야 한다. 그러나 힐러리는 선역 역할을 차지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악역인 것 마냥 행동했다. 유명인, 언론사 등 온갖 술수를 동원하는 것도 모자라 힐러리 편에 선 스타들이 잘난 척 하며 트럼프와 보수 지지자들을 집단 린치하듯이 가르치는 모습을 본 유권자들은 점차 이 대결을 악역 대 악역으로 인식했을지도 모른다. 애초에 힐러리라는 인물에 대한 여론 역시 마냥 좋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트럼프는 이 상황을 역으로 이용했다. 힐러리 세력을 “능력은 없지만 잘난 채하는 기득권 정치인” 이라는 이미지를, 자신에게는 “기득권에 도전하는 정치 신인 아웃사이더” 라는 이미지를 구축해나갔다. 경선 때부터 트럼프는 매 토론마다 점잖게 구는 다른 후보들을 화려한 언변으로 조롱하면서 자신의 캐릭터성을 만들어나갔다. 대선토론에서는 더욱 능숙한 마이크웍을 통해 힐러리를 말려들게 하며 분위기를 지배했다. 자신에게 불리한 보도를 하는 언론들에게 숙이기는커녕, 오히려 힐러리의 편에 서서 편파 보도를 하는 비겁자로 규정하여 자신의 말실수나 폭언을 덮었다. 그 동안 성역처럼 느껴졌던 ‘정치적 올바름’과 이에 편승하는 수많은 기득권층에 의해 무시당하고 억눌린 가난한 백인 노동자 남성, 기독교 보수주의자들은 트럼프를 통해 일종의 해방감을 느끼며 그동안 남몰래 쌓아왔던 분노를 해소할 수 있었다. 이른바 ‘악역 언더독’ 의 탄생이었다. WWE 프로레슬링의 오랜 팬들은 트럼프가 보여준 기득권에 대항하는 모습, 그가 보여준 마이크웍 스타일이 마치 ‘더 락(드웨인 존슨)’이나 ‘스톤콜드(스티브 오스틴)’ 같다고 회상하였다. 이들은 WWE 역사상 가장 인기 있는 레슬러들이었다.
대선 결과는 놀라웠다. 총 득표수는 힐러리가 많았지만, 민주당 텃밭지역 일부와 주요 경합지역들을 모조리 빼앗기며 트럼프가 승리했다. 더욱 재미있는 점은, 앞서 말했듯 민주당이 ‘정치적 올바름’을 차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여성표는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으며, 심지어 ‘백인 여성’ 들은 트럼프를 더 많이 지지했다. 공화당에 대한 유색인종의 득표율도 오바마 때보다 더 높았다. “완벽한 언더독 악역” 이 “어정쩡한 기득권 선역”을 상대로 완벽한 승리를 거두는 순간이었다.
대한민국의 대통령 선거와 프로레슬링
대한민국의 제 20대 대통령 선거 과정도 프로레슬링에 비유할 수 있다. 재미있게도 윤석열 대통령의 당선 과정 역시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 과정과 흡사한 점이 많다. 윤석열 후보 역시 트럼프 못지않게 코너에 몰려 있었다. 국회와 지방정부는 민주당이 모두 차지하고 있었고, 문재인 대통령의 지지율은 건재했으며, ‘1일 1망언’, ‘당대표와의 갈등’, ‘윤핵관 문제’ 등이 겹쳐 하루가 멀다하고 터지는 논란에 국민의당 안철수 선수의 약진까지 겹쳤다. 지난 총선에서의 패배로 기존의 충성스러운 지지자와 야당 의원들은 마치 “삼류 악당”처럼 보였고, 이대남들은 형편없는 경기력을 보여주는 윤 후보와 측근들에게 “당장 링 밖으로 나가라!” 라며 후보교체를 외칠 정도였다.
그러나 이준석 대표와의 화해로 20~30대 남자와 60대 이상의 연령층이 연합하면서 분위기가 바뀌게 되었다. 이를 시작으로 ‘정치 신인’ 윤석열 후보는 반공, 보수우파라는 어색한 기믹 대신에 강직한 검사, 동물 애호가, 포용력 있는 인물, 아내에게 휘둘리는 평범한 가장(…) 이미지를 구축해나갔다. 그러자 모든 게 변했다. 유세현장에서 직접 권투 흉내를 내며 분위기를 고조시키고, SNS에서 파격적인 단답식 공약을 연달아 냄으로써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대선토론에서의 ‘마이크웍’은 여전히 어색하고 느릿느릿했지만, 그럼에도 상대방의 공격을 검사 특유의 말투와 지적으로 맞받아치는 모습으로 토론에 약하다는 이미지를 상쇄했다. 이는 마치 WWE에서 경기력 자체는 부족했지만 이미지메이킹으로 이를 커버하여 당대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헐크 호건과 비슷하다.
문재인 대통령이 레임덕이 발생하지 않았음에도 민주당이 패배한 원인을 어떻게 비유할 수 있을까? 설령 경기력이 좋고 팬층이 두텁다 할지라도, 선수는 언젠가 자신의 자리를 후계자에게 넘겨줘야 한다. 때가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소프트라이트를 넘겨주지 않으면 어느 새 관중들은 Boring(지루해 죽겠다)를 외친다. 무적처럼 군림했던 문재인 대통령은 그의 선역 기믹을 이재명 후보에게 넘겨주지 못했다. 그러나 측근들의 연이은 사망, 욕설 및 범죄 경력 논란 등으로 점철된 이재명 후보에게 선역이라는 역할을 맡게 하는 것은 어쩌면 무리였을지도 모른다. 민주당의 텃밭이었던 호남에서, 적지만 10% 이상의 지지율을 윤석열 후보가 확보한 요인은 이러한 측면도 분명히 있다. 이는 노무현과 정동영의 경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정치는 결코 엔터테인먼트가 아니다.
이와 같이, 선거정치는 프로레슬링 무대와 흡사한 점이 많다. 치밀하게 짜여진 스토리와 캐릭터성을 토대로, 뛰어난 경기 운영을 통해 극적인 상황을 연출할 수 있다면 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다. 그러나 오늘 보여준 대통령 선거의 여러 상황이 프로레슬링과 비슷하다고 해서, 선거가 오락처럼 되어서는 안 된다. 즉, 민중들의 호응을 얻기 위해서 무슨 짓이든 하는 것이 프로레슬링에서는 유효하지만, 현실정치에서는 엄연히 지양해야 할 행위이다.
트럼프는 민중의 이목을 자신에게 집중시키는 데는 성공했지만, 트럼프가 힐러리나 오바마 행정부를 비난하기 위해 사용한 근거들의 다수는 왜곡된 내용이 많다. 백인이나 공화당 지지자를 상대로 미국이 PC 및 유색인종에 의해 위협받는다는 위기의식을 부추기기 위해 가짜 통계를 제시하거나 거짓말을 일삼았다. 또한 트럼프는 자신이 장애인이나 여성, 유색인종에 대한 비하를 하고 있다는 것 자체는 인식했으나, 그의 딸 이반카나 펜스 부통령 후보가 뒷처리를 잘해준 것, 그리고 ‘유쾌한 악동’ 같은 이미지 유지를 위해서라도 이를 고치려 하지 않았다. 이런 환경에서 충성스러운 공화당 지지자들은 대통령 선거결과가 미국이 자칫 ‘불순한 세력’에 넘어갈 수 있는 심각한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고 생각했고, 따라서 트럼프의 막무가내식 언행이나 무모한 공약들을 사소한 문제로 치부하고 넘어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심지어 오용 사례도 발생하고 있다. 최근 중징계를 받아 당원권이 정지된 김재원 국민의힘 최고위원이 자신의 처지를 “링 밖으로 나간 레슬링 선수” 에 비유하며, 자신을 경기력이 뛰어났던 프로레슬러 김일 선수와 동일시하였다. 재미있는 것은 김재원 위원의 징계사유 중 하나는 사랑제일교회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5.18 민주화 운동 정신을 헌법전문에 넣겠다는 공약은 선거때 표 얻으려고 한 것” 이라고 발언한 것이다. 이 말이 진실이라 아닌지는 제쳐두고서라도, 경기 각본을 관객들에게 공개하는 선수가 어디 세상에 어디 있는가? 김재원 최고위원은 프로레슬링에서 가장 금기시되는 행동을 하면서도 자신의 처지를 프로레슬링 스타에 비유한 것이니, 여러모로 안타까울 지경이다.
프로레슬링은 어디까지나 연출이다. 선역과 악역 간의 갈등이나 타격을 가하는 것도 모두 카메라 앞에서만 발생하는 “쇼”의 일부이다. 그들은 서로를 공격하는 척 하지만, 정확히는 관중들이 그렇게 인식하게끔 만드는 것이고, 서로가 치명적인 부상을 입지 않도록 조심히 행동한다. 그러나 정치는 다르다. 물론 정치인들도 카메라 앞과 뒤의 모습은 전혀 다르다고는 하지만, 그들이 가져야 할 기본적인 소양 중 하나로서 자신의 신념에 대한 결과를 책임지는 윤리 의식이 있다. 쉽게 말해, 자신이 뱉은 말을 쉽게 취소하거나 외면해서는 안 된다. 오직 대중의 인기와 지지율을 끌어올리기 위해 극적인 상황을 조장하는 행위는 정치를 또다른 난장판으로 전락시킬 뿐임을 명심해야 한다.
참고
Theye, K., & Melling, S. (2018). Total losers and bad hombres: The political incorrectness and perceived authenticity of Donald J. Trump. Southern Communication Journal, 83(5), 322-337.
Essentiallysports, SHERJEEL MALIK, “Got the Idea Off Stone Cold”: WWE Legend Once Revealed Why He Believes Donald Trump Stole from Steve Austin for His Election Campaign, 2022, https://www.essentiallysports.com/wwe-news-got-the-idea-off-stone-cold-wwe-legend-jim-ross-once-revealed-why-he-believes-donald-trump-stole-from-steve-austin-for-his-election-campaign/
the washingtonpost, Chris Kelly, What Donald Trump learned about politics from pro wrestling, https://www.washingtonpost.com/posteverything/wp/2016/11/11/what-donald-trump-learned-about-politics-from-pro-wrestling/
에이미 추아, 김승진 옮김, 정치적 부족주의 – 집단 본능은 어떻게 국가의 운명을 좌우하는가, 부키, 2020
경향신문, 문광호 기자, 김재원 “프로레슬링은 반칙 쓰면 환호받기도···링 밖에서 역할 하겠다”, 2023, https://www.khan.co.kr/politics/politics-general/article/202305311114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