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특집] 그 전쟁은 한국에게만 의미있는 전쟁이 아니었다
만약 오늘날 한국인들에게 한국전쟁을 정의해보라고 한다면 어떤 대답이 나올까? 동족상잔의 비극? 건국전쟁? 각자의 정치성향이나 세계관에 따라서 여러 대답이 나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전쟁은 한국인들의 관점과 입장에서 본다면 그 전모를 제대로 파악하기 어려워진다. 한국인에게는 내전의 성격이 짙었지만, 세계적인 관점에서는 냉전(冷戰)이라는 세계질서의 추이를 가늠하는 거대한 격변이었기때문이다. 그런 맥락에서 이번 글에서는 그 세계적인 맥락에 천착해 한국전쟁의 국제적 의미를 논해보고자 한다.
한국전쟁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세계질서, 냉전(冷戰)
한국전쟁은 사실 전쟁 자체보다도 전후 맥락을 이해하는 것이 훨씬 중요한 전쟁이다. 한국전쟁은 제국주의 열강의 이해관계가 맞부딪힌 제1차 세계대전이나 추축국/연합국으로 나뉘어 일대회전을 벌인 제2차 세계대전과는 전혀 다른 질서와 상황 속에서 펼쳐졌다. 그리고 한국전쟁을 거치며 형성된 세계질서는 오늘날에도 그 틀과 성격을 생각보다 뚜렷히 유지하고 있다.
거기다 동북아시아로 범위를 좁히면, 중국과 일본의 전후 국가 운영의 방향과 성격을 결정지어버린 사건이기도 했다. 그런 맥락에서 한국전쟁은 일국의 내전을 아득히 뛰어넘는, 대단히 세계사적인 사건이라고 볼 수 있겠다.
그렇다면 한국전쟁은 과연 어떤 상황 속에서 발발한 전쟁이었을까? 미국의 저널리스트인 데이비드 핼버스탬(David Halberstam)은 그의 저서 『THE COLDEST WINTER』에서 한국전쟁 이전의 세계질서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도 상대방에게 위협적이고 염려스러운 존재였던 소련과 미국이 5년 동안 줄곧 대결하는 형편이라 세계정세는 순탄치 않았다. 두 강대국은 상대방을 불구대천지 원수처럼 여기는 경제체제를 유지하며 상호 배제하는 고립주의 정책을 고수했다. 상대방을 종말론적인 파괴를 일삼는 무자비한 침략자로 간주했기에 원자력 시대에 주어진 새로운 역할을 염려했다. 둘 다 불안감을 안고 있었는데 사실상 편집증적인 망상이었다.” (David Halberstam, 『THE COLDEST WINTER』, 살림, 2009, 132쪽)
” ··· 종전 후에 강대국 간에는 마치 체스 게임과 같은 신경전이 이어졌다. 이는 영국, 프랑스, 독일, 일본의 충돌과 이들 제국의 붕괴로 세계 권력에 공백이 생긴 결과였다. 북한이 도발할 당시 최고조에 달했던 냉전체제는 10여 년 후 쿠바 미사일 위기 때 직면했던 두 강대국의 핵전쟁 위기로 이어졌다. 북한의 6월 25일 남침은 처칠이 철의 장막 연설을 한 지 4년 후, 그리고 소련의 베를린 봉쇄와 이에 대한 미국의 대응이 있은 지 2년 후에 일어났다.
1950년에 서구 동맹국들은 마셜 플랜에 따라 경제성장을 이루었고 이윽고 북대서양 조약기구(NATO)를 창설했다. 미국은 NATO를 아직 전쟁의 폐허에서 벗어나지 못한 불안정한 유럽 국가들을 강화하는 방법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공산 진영에서는 적대국들이 핵무기로 무장하여 거대한 장벽을 만들려는 시도라고 해석했다.” (『THE COLDEST WINTER』, 134쪽)
그의 묘사를 보면 놀랍게도 2차대전 직후 세계정세와 오늘날 세계정세가 큰 틀에서는 거의 변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NATO를 중심으로 뭉쳐있는 유럽과 그런 NATO를 경계하는 러시아가 대치하고 있는 형세는 오늘날 러우전쟁 이후 그 대립 양상이 한층 격화된 유럽 정세를 떠올리게 한다. 최근 러시아가 벨라루스 지역에 전술 핵무기를 배치하기로 결정했는데, 이는 미소 냉전기에 가장 위험했던 핵전쟁 위기였던 쿠바 미사일 위기를 아른거리게 한다.
물론 냉전은 미국의 승리로 귀결됐고, 오늘날 조성되고 있는 新냉전 질서는 미중 경쟁의 구도로 구현되고 있으나, 각 지역에서 불거지는 안보 위기의 근본적인 배경은 여전히 2차대전 직후의 질서를 기본 골자로 하고있다. 그런 의미에서 냉전은 형식상으로만 종식됐을뿐, 여전히 세계질서를 지탱하는 뼈대인 셈이다.
냉전 초입 미국의 극동 정책 방향을 결정한 전쟁
여기서 미국은 그런 냉전이라는 체제경쟁을 분명히 의식하며 적대국가인 소련을 견제하는데 총력을 기울었다. 그리고 그런 견제 전략에 있어 동북아시아 역시 미국의 주요 관심 지역 중 하나였다. 또한 그런 미국의 전략은 이제 막 일본이 패망하며 식민지 지위에서 벗어난 한국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에 관하여 미군 최고위 인사이자 연합군 최고 사령부(GHQ) 사령관으로서 미국의 극동 정책 방향에 깊이 관여했던 더글라스 맥아더의 발언 하나를 살펴보자.
“우리는 이곳(한국전쟁)에서 총을 들고 유럽의 전쟁을 전쟁을 수행하고 있으며, 외교관들은 한국에서 수사(修辭)로써 유럽의 전쟁을 대행하고 있다. 만약 우리가 아시아에서 공산주의와의 전쟁에서 패배한다면 유럽의 함락을 피할 수가 없다. 아시아에서의 대공(對共) 전쟁에서 승리할 때 유럽은 전쟁을 피할 수 있으며 자유를 보장할 수 있을 것이다.” (신복룡, 「군정기 미국의 對한반도 점령 정책: 1945-1948」, 「정치외교사논총」 30호, 한국정치외교사학회, 2009, 15쪽)
미국의 극동 정책을 실체화하는 인물로서 군인을 넘어 정치가의 면모를 보였던 맥아더 역시 동북아시아의 미국의 행보 역시 유럽에서의 냉전과 강력히 연동되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여기에 맥아더와는 자주 대립각을 세웠고, 종국에는 그를 해임시켰던 미국 대통령 트루먼 역시 그와의 갈등과는 별개로 극동 정책의 방향에 대해서는 일치하는 견해를 보였다. 그에 관한 『THE COLDEST WINTER』의 내용 일부다.
“트루먼은 훗날 워싱턴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에티오피아에서 무솔리니를 저지하고 만주에서 일본을 저지하는데 어떻게 실패했는지, 프랑스와 영국은 오스트리아와 체코슬로바키아에 대한 히틀러의 진격을 어떻게 차단할 수 있었는지를 생각했다고 회상했다. 아울러 소련이 유일하게 이해하는 단어는 ‘무력’이라고 여긴 탓에 소련이 북한의 남침을 사주했거나 명령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트루먼은 “이러한 인식을 토대로 그들을 대해야 한다”고 기록했다. 문제는 미국이 한국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는지가 아니라 공산주의의 도발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에 관한 거였다.” (David Halberstam, 『THE COLDEST WINTER』, 살림, 2009, 132쪽)
한국전쟁 초창기 트루먼이 워싱턴으로 복귀하며 했던 생각을 보면, 그 역시 한국전쟁에서 미국이 어떻게 대처하는지가 곧 ‘공산주의 진영에 대한 미국의 정책 노선을 결정’한다고 판단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애치슨 라인을 설정하며 미국의 극동 정책 범위를 일본까지로 제한했던 시기도 있었지만, 북한의 남침은 그런 미국의 구상을 순식간에 뒤바꿔놓았다. 미국은 북한의 남침에 소련의 사주가 있음을 의심했고, 그런 소련과의 체제경쟁에서 밀리지 않기 위해선 참전은 물론 막대한 군사력 투사를 아끼지 않을 심산이었다. 그런 미국과 같은 진영에서 뜻을 함께 했던 여러 국가들이 힘을 합쳤고, 그렇게 합심한 자유 진영의 지원이 한국을 지켜냈던 것이다. 어찌보면 오늘날 한국이 어려움을 겪게 만드는 지정학적 조건이 그 당시 한국에게는 천운(天運)이었던 셈이다.
오늘날 동북아 정세의 근본 지형을 결정한 전쟁
물론 한국전쟁 이전에도 미국을 압박하는 사건은 하나둘씩 발생하고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1949년의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이다. 모택동이 이끄는 공산당이 중국을 사실상 장악하고, 오늘날 중국인 중화인민공화국을 선포한 것은 미국에게는 최악의 결과였다. 그 전까지 장제스의 국민당을 지원하며 중국 지역에 소련 친화적인 정치 세력이 집권하지 않기를 바랬던 對중국 정책 구상이 완전히 어그러졌기 때문이다.
국민당의 패색이 짙어진 상황에서 미국의 극동 정책 구상은 완전히 바뀌게 된다. 본래 중국의 국민당을 지원하며 일본의 군사적 역량을 해체하고자 했던 방향에서, 중국 지역을 사실상 방기(放棄)하고 일본을 극동 지역의 주요 전략 거점으로 재활용하는 방향으로 급격히 선회한다. 그 과정에서 국민당 군대을 지원하던 미군 고문단을 철수시켰고, 당시 중미대사였던 존 스튜어트에게 공산당 측과 접촉할 것을 지시했을 뿐만 아니라, “중미관계백서(China White Paper)”를 발표하며 ‘공산당의 승리는 국민당의 패배일뿐 미국의 실패가 아니다’라는 메세지를 던졌다.
그와 반대로 일본에서의 미국 정책은 우호적인 방향으로 기울었다. 오키나와의 미군 기지 주둔을 유지하는 것은 물론이고, 안전보장회의에서 아예 “일본의 경제부흥은 미국의 안전과 이익에 버금가는 중요한 목표가 될 것”이라고 강조할 정도였다. (이희성, 「국공내전 시기 미국의 동맹전략에 관한 연구」, 「군사연구」 140호, 육군군사연구소, 2015, 226~227쪽)
그렇게 냉전을 의식하며 극동 정책을 새롭게 구상하던 미국에게 결정적인 충격을 안겨다 준 것이 바로 한국전쟁이었던 것이다. 소련의 지원을 받은 북한이 남한을 기습하자, 미국은 참전을 결정하고 공업 능력을 박탈하려 했던 일본을 자유 진영의 병참 기지로 탈바꿈시켰다. 당시 일본이 병참 기지로서 얼만큼 기능했냐면, 미국이 한국전쟁 중 파괴된 차량·무기의 각각 80%, 70%를 수리했으며, 한국전쟁 발발 1년 동안 일본이 누렸던 경제적 혜택은 3억 1500만달러에 달했다.
이른바 ‘한국전쟁 특수’였다. 2차대전 이후 일본의 경제 상황은 한국전쟁을 거치며 패전 후 불과 7년만에 전전(前戰) 수준을 회복했다. (敗戰國 일본이야말로, 6·25 전쟁으로 기사회생, 조선일보, 2015년 3월 27일)
당시 일본의 요시다 내각에서 상공상을 역임했던 이시이 미츠지로는 한국전쟁 발발 직후 점차 회복세에 접어들던 일본의 상황에 관해 이런 일기를 남기기도 했다.
“이것은 구원의 신(救ひの神)이다. 주식 값도 올랐다. 석탄도 월 10만톤의 조선행이 결정되었으며, 기타 체화도 정리되었고, 미국이 지불할 인건비 3억불의 예산도 그 대부분을 일본에서 쓸 것으로 예상된다. 실업 문제도 해결되며, 공산당 단속과 경찰력 증강도 우리 쪽에서 요구하지 않고도 해결되었다.” (남기정, 「한국전쟁 시기 특별수요의 발생과 ‘생산기지’ 일본의 탄생: 특별수요의 군사적 성격에 주목하여」, 「한일군사문화연구」 13호, 한일군사문화학회, 2012, 254쪽)
한국전쟁은 결코 과거의 역사가 아닌 살아있는 세계질서의 연원(淵源)
중국에서 공산당 정권이 등장하면서 급격히 선회됐던 미국의 극동 정책 목표는 한국전쟁을 거치며 완벽히 ‘반공(反共)’으로 수렴했다. 그리고 그 중국이 한국전쟁에 참전하며 미국과 한때 격돌했고, 오늘날 중국은 그 시기를 ‘항미원조(抗美援朝)’라 부르고 있다. 근래 한중관계가 악화되는 원인에는 표면적으로는 양국 간의 반대감정을 꼽을 수 있겠으나, 한국전쟁에서 한·미·중 삼국이 처했던 입장을 고려하면 삼국 간의 미묘한 긴장관계는 한국전쟁 시기부터 사실상 예고돼있던 셈이다.
미국의 병참기지로 철저히 기능하며 국력을 회복했던 일본의 입장 역시 어색할 것이 없다. 오늘날 미중 경쟁이라는 거대한 변수 속에서 미국의 맹방(盟邦)으로서 입지를 다지고 있는 일본을 보라. 과연 그때의 세계질서와 오늘날 세계질서의 근본 줄기가 많이 달라졌다고 보는가.
또한 거기서 하나 더 특기할만한 것은 미국의 극동 정책 노선이 반공으로 수렴하면서, 일본의 부담을 줄이는 한편, 한일 양국을 극동 정책 파트너로 삼고했던 미국은 빈번하게 한일관계 복원을 요구했다는 점이다. 그 연장선상에서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체결됐고, 1965년에는 한일국교정상화가 이뤄졌다. 최근 한미일 삼국이 북핵·중국 문제 대응을 공통 목표로 공조를 다짐하는것 역시 갑작스러운 현상으로 볼 수 없다. ‘역사는 반복된다’는 속담은 아마 이럴 때를 비유하고자 존재하는 것일까.
그런 맥락에서 다음과 같은 것들을 분명히 해두고 싶다. 먼저, 한국과 세계 모두 한국전쟁 시기의 엄혹함에 준하는 상황으로 다시 복귀하고 있다는 것. 또한 그것을 명확히 인지하고 않고서는 그 어떤 안보 위기에 제대로 대처할 수 없다는 것. 더하여 한국전쟁은 결코 과거의 일도 아니며, 한국에게만 특수한 의미를 가지는 사건도 아니었다는 점을 말이다. 이 세가지를 명백히 인정하는 것이 한국이 처한 작금의 상황을 이해하고 대처하는 제1조건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