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징비록 – 1부 : 일본의 전략적 사고 및 외교 역량은 어떻게 축적되어왔는가

일러스트=바로크

 
이번 정부 들어서 가장 주목받는 외교적 현안은 아마 한일관계일 것이다. 실제로 윤석열 대통령이 3월에 일본을 방문했고, 이에 기시다 총리도 2달여만에 한국을 방문하며 양국간 ‘셔틀외교’가 오랜만에 부활했다. 이에 미국 백악관에서도 한일관계 복원에 관한 긍정적인 논평을 이례적으로 꾸준히 내놓고 있으며, 한미일 삼각 공조가 강화되는 방향에 대해 중국 당국은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고있다. 물론 이런 흐름 자체는 냉전 이후 동북아시아 정세에서 여러번 유사하게 반복됐던 과정을 고려하면 크게 놀랍진 않다고 본다. (그 과정에 대해서는 앞으로 더 자세히 다룰 예정이다.)

한편으로 한국 대중은 최근의 정세변화를 마냥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진 않다. 연합뉴스가 매트릭스에 의뢰한 5월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의 55.4%가 한일관계 개선 방향에 있어 ‘과거사에 대한 일본의 진정성 있는 사과가 우선’이라고 답했고, 나머지 응답자의 43.2%가 ‘지속적인 과거사 문제 해결 노력과 별개로 미래지향적인 한일관계로 나아가야 한다’고 답한 것으로 나타났다. 세부적으로는 진보층에선 ‘과거사 사과 우선’이 지배적(79.3%)으로, 보수층에선 ‘미래지향적 관계 우선’이 지배적(65.5%)으로, 그리고 중도층에서는 진보층에 비해 약하긴 하지만 ‘과거사 사과 우선’이 더 우세(61.1%)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외에도 청년 세대에서는 과거사 사과를 우선하는 여론이 우세했고, 60대 이상 노령층에선 미래지향적 관계를 우선하는 흐름이 나타났다. (한일관계 여론조사…’과거사 사과 우선’ 55%, ‘미래지향적으로’ 43%, 폴리스TV, 2023년 5월 9일)

여론조사 결과는 기시다 총리의 방한 기간 중에 진행됐음에도 ‘과거사 사과’를 중요시하는 여론이 여전히 우세하게 나타났다. 거기다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문제까지 겹치며 일본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도 적잖이 형성되고 있다. 물론 크게 한일관계, 한미일관계가 강화되는 방향으로 가는 것 자체에는 저항심은 없다하더라도, 보다 구체적인 협력을 위한 여론지형 구축에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 같다.

여기서 필자는 《손자병법(孙子兵法)》의 방법론 한 가지를 제시하고자 한다. 바로 《손자병법》의 첫번째 편을 장식하는 ‘시계(始計)’다. 여기서 ‘계(計)’는 적과 싸우기에 앞서 아군과 적의 현재 상태, 강점, 약점, 환경 등 총체적인 요소를 점검하는 단계라고 할 수 있겠다. 물론 일본을 적국으로 보자는 뜻은 전혀 아니나, 중요한 이웃국가이자 선의의 경쟁을 이어갈 인접국이라는 측면에서 일본의 대전략을 구성하는 핵심 요소가 무엇인지를 짚고 가자는것이다. 이는 특히 일본이라면 색안경부터 쓰고 과거의 침략국가라는 이미지만 강조하는 이들도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이다. 일본이 어떤 특징과 전통을 갖고있는 상대인지도 모른채 무슨 수로 무엇을 일본으로부터 지키고 이끌어내겠다는 것인가.
 


 
근대화 이전부터 국제관계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던 지도층의 나라

한국인들은 한일관계를 대개 양자관계로만 바라보려는 경향이 강하지만, 국제관계라는 것이 그리 간단하지 않다. 국제관계의 그런 속성에 대해선 필자가 서론에서도 잠깐 언급한 바 있다. 그리고 일본의 경우는 그 속성을 정확히 이해하고 자국의 대외 정책 기조에 반영하는데 특히 강점을 보인다. 그렇다면 일본의 그러한 강점은 어느 시기부터 형성되었을까? 태평양전쟁 이후 미국과의 관계 형성에 주력하던 1945년 이후부터? 아니면 뒤늦게 열강대열에 합류해서 식민지 확보에 주력하던 제국 일본 시절부터? 놀랍게도 그에 관한 실마리는 에도 막부 말기부터 찾을 수 있다.

에도 막부 정권은 성립 직후부터 기본적으로 사실상 ‘쇄국(殺國)’에 가까운 대외 정책 기조를 고수했다. 물론 그렇다고 정말 나랏문을 닫고 우물 안 개구리처럼 지낸 것은 아니었다. 당시 에도 막부는 데지마 상관에 거주하던 네덜란드인들로부터 《풍설서》라는 이름의 세계정세 보고서를 꾸준히 입수해왔다. 더하여 19세기 이후 서양 열강의 침입이 잦아지자 그들에 대한 정보를 더 많이 수집하기 위해 영어·러시아어 사전을 편찬하기도 했다. 막말 시기 ‘유신지사’들의 사상적 거두인 요시다 쇼인의 《유수록》에서 류큐·조선·대만·만주를 일본의 세력권으로 삼아 대륙으로 진출해야 한다는 세계관이 드러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고 메이지유신(1868) 전후로 일본은 그동안 국제관계에 관하여 축적해왔던 지식·관점을 실질적인 대외 정책 조치로 하나씩 구체화하기 시작한다. 대중적으로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그 조치의 일환으로서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바로 병인양요 직후 일본 정부 및 대마도의 행적이다.

1866년 10월 이후 조선 군대와 프랑스 극동 함대는 강화도 부근에서 충돌했다. 바로 병인양요다. 당시 조선 조정은 충돌 상황을 정리한 서계를 대마도를 통해 일본 당국에 전달했다. 이때 병인양요에 관한 소식은 대마도 뿐만 아니라, 일본의 대표적인 개항장인 요코하마, 나가사키 등을 통해서 에도 막부에 흘러들어갔다. 일본은 조선에서의 분란을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정세 수집 능력보다 더 놀라운 대목이 따로 있다.

사실 이전부터 대마도는 열강의 조선 침입에 관한 정보를 막부 측에 꾸준히 전달하고 있었는데, 이미 프랑스·미국 등의 재거(再擧)를 예상하고, 조선과 열강 간의 충돌을 중재할 필요성을 피력하며 그와 관련해 막부 측과 협의할 의향이 있음을 드러냈다. 에도 막부 역시 대마도 측에 「日本におゐても 禍を轉じて福となすの御長策」할 것을 주문했다. 이때 에도 막부의 주문 내용을 대략 해석하면… 「일본에 있어도 화를 전하여 복이 되는 것의 장책」, 즉 병인양요를 ‘화(재앙 화, 禍)’로 보며 그 화를 잘 이용하면 일본의 복(福)으로 만들 수 있음을 의미했다. (한일문화교류기금 기획, 『근세한일관계의 실상과 허상』, 「19세기 정한론의 표출 – 그 배경과 여러 요인의 고찰」 번역문, 경인문화사, 2020, 303쪽)

조선에겐 화(禍)와 같았던 병인양요가 어떻게 일본의 복(福)이 될 수 있었을까. 당시 세계정세에 밝았던 일본에게 조선과 서양 열강의 충돌은 일본의 외교 역량을 시험할 무대이기도 했고, 대마도에게는 조선 측 정세를 핑계삼아 막부 측의 지원을 이끌어낼 레버리지(leverage)카드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당시 막부는 조선과 갈등을 빚던 프랑스, 미국 측에 중재 역할을 요청하는 문건을 전달하며, 조선에 중재 사절단을 파견할 계획까지 세우기도 했다. 일본의 전략가들은 이미 근대화 이전부터 세계정세 속에서 일본의 독자적인 역할과 공간 모색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전시상황, 패전 이후에도 국익을 위해 치밀하게 움직이는 전략가의 나라

그렇게 축적되던 전략적 사고는 군국주의 일변도로 치닫다 패망한 전후 일본에서도 고스란히 그 명맥을 이어갔다. 특히 패전 3개월만에 구성된 외무성 내 ‘평화조약문제연구간사회’의 존재가 대표적인 예시였다. 해당 간사회에서는 평화조약문제에 관련된 연구과제 약 30항목을 정하여 각종 보고서를 발간했는데, 전후 일본의 정책 방향 수립에 있어 이점이 될만한 부분을 뒷받침하는 논리와 근거들을 정리하는데 집중했다.

간사회에선 ‘영토의 절반가량을 잃었고 귀환자 등으로 인구가 500만 명 늘었으며 대부분의 공업시설이 파괴되어 일본의 재건은 매우 어려운 상황이다. 그러나 정부는 과거 군국주의의 색채를 불식시키고 민주주의 체제 수립에 매진하고 있다’는 점등을 설명하는 것을 물론, ‘오키나와와 북방 영토는 역사, 지리, 민족, 경제 등 여러 관점에서 일본 고유의 영토’임을 피력했다. (소토카 히데토시·혼다 마사루·미우라 도시아키, 『미일동맹』, 한울아카데미, 2006, 40~41쪽)

같은 시기의 한일 영유권 분쟁을 다룬 정병준 교수의 논문에도 유사한 서술이 담겨있었다. 당시 간사회에서 조약 이론에 밝은 외무성 조약국의 가와카미 겐조가 각 영토(ex : 오키나와, 홋카이도, 쿠릴, 하보마이, 오가사와라 등)에 관한 사실들을 면밀히 조사해서 보고서로 작성했고, 당시 외무성 대신이던 요시다 시게루는 “조약 입안시 가능한 한 우리 편에 유리하도록 고려될 수 있게 손쓰는 것이 필요하며, ‘일본이 침략에 의해 취득한 영토’의 범위를 부당하게 확대해석 받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 설명자료는 영토문제만 해도 7책이나 되는 방대한 규모”라고 회고했다. (정병준, 「독도 영유권 분쟁을 보는 한.미.일 3국의 시각」, 「사림」 26호, 수선사학회, 2006, 53~54쪽)

개인적으로는 해당 자료들을 읽으면서 소름이 돋지 않을 수 없었다. 전 국토가 오랜 전쟁으로 황폐화되어 사회경제적 기반을 재건하는데도 여념이 없을텐데, 그 와중에도 정부 일각에서는 새로 재편될 국제질서 속에서 일본의 권익을 최대로 추구하기 위한 온갖 전략과 방책이 마련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전략적 사고와 작업이 과연 단시간에 구축될 수 있는 것일까. 절대 그렇지 않다고 본다.
 


 
외무성 출신 관료가 내각 총리대신까지 역임하는 나라

한국은 집권 세력의 준거집단에 따라 정부 구성원의 결이 크게 달라지는 경향이 강하다. 문재인 정부에선 운동권 이력이, 그리고 윤석열 정부에선 검찰 근무 유무가 정부 구성의 기준점처럼 기능했다. 물론 정치권력을 획득한 집단의 성향에 따라 인적 구성이 달라지는 것은 이상할 게 없다.

그러나 외교안보처럼 장기적인 관점에서 ‘일관성’을 기반으로 치밀하게 그리고 촘촘히 구축되어야 할 부문에선 정치권력의 그러한 경향성은 그다지 긍정적인 시그널이 아니다. 특히 외교안보 분야에서의 정책 안정성을 해치는 부정적인 시그널로 변하기 십상이다. 단적으로 두 정권을 거치며 한일관계에 관한 정부 입장이나 정치권의 태도가 180도 뒤집히는 것만 봐도 그렇다.

그러나 일본의 경우는 다르다. 물론 일본도 사실당 ‘1.5당’과 다름없는 정치체제를 55년 이후부터 수십년간 유지하고 있긴 하나, 적어도 일본에선 이전 정부의 외교안보 정책을 급격히 수정하는 모험수를 쉽게 두지 않았다. 적어도 외교안보 분야에서만큼은 그렇다. 이를테면 요시다 시게루가 일본의 대외 정책 수립에 있어 장기적인 파트너로 미국을 낙점 찍었으면, 기시 노부스케는 그 바탕 위에 전후 일본의 새로운 ‘아시아주의’를 표방하고자 했고, 사토 에이사쿠는 그런 이전 정부가 구축한 기반 위에서 오키나와 반환 등의 미국 측에 요구했다. 이렇듯 각 내각에서 추구하고자 하는 세부적인 정책 노선은 달랐지만, 미국이라는 동맹국과 자유주의 국제질서에 대한 기여 등은 각 내각의 외교정책의 핵심 가치로서 꾸준히 기능했다.

근대 일본부터 현대 일본까지 역대 내각 수반의 이름을 한번 살펴보시라. 이토 히로부미, 오쿠마 시게노부, 데라우치 마사타케, 사이토 마코토, 고노에 후미마로, 도조 히데키, 요시다 시게루, 기시 노부스케, 사토 에이사쿠, 고이즈미 준이치로, 아베 신조, 그리고 오늘날 기시다 후미오 총리까지. 근현대 일본 정치사에서 나름대로 족적을 남기고 총리까지 역임했던 이들은 대개 외무대신을 거쳤다는 공통점이 있다.

외교관은 그 직업의 특성상, 세계정세를 면밀히 살피면서 자국이 공략하고 다져야 할 입장과 공간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해야 하는데, 일본이 근대 이후 보여준 외교 행보에 있어 그런 인적 전통을 결코 무시할 수 없다고 본다. 그리고 그 지점이 한국이 일본에 비해 여전히 취약한 경쟁력을 보이는 부분임과 동시에, 지정학적·국제정치적 변동에 그 어떤 국가보다 민감하게 반응해야 할 한국이 가장 배워야 할 부분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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