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해유록] 3부 – 근대 일본의 전략가, 무쓰 무네미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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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토끼풀

 
# 청일전쟁강화기념관에서 망국의 원인을 생각하다

 3부는 지난번에 다룬 시모노세키 포대와 더불어 꼭 소개해드리고 싶은 장소에 관한 이야기. 바로 시모노세키 포대 인근의 청일전쟁 강화기념관이다.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장소는 청일전쟁의 전후처리를 위해 사용됐던 곳이었다. 그 전후처리는 일본에서는 ‘시모노세키 조약’, 그리고 청에서는 ‘마관 조약’으로 각각 불렸으며, 한편으로 일본이 청으로부터 동아시아 맹주국의 자리를 탈환하는 상징적인 사건이기도 했다.

 물론 청일전쟁의 패배로 지정학적 운명이 크게 뒤바뀐 조선에게도 당연히 중요한 장소이긴 했으나… 그러나 정작 그 장소에서 조선의 흔적은 털끝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는 확실한 국력과 전략 없이는 존립을 도모할 수 없는 국제정치의 냉혹한 속성을 여실히 드러내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런 여러 생각을 하면서 강화기념관에 들어섰으나, 그런 생각의 무게감에 비해 건물의 내외부 모습은 그리 특별할 것이 없었다. 아담한 크기에 정갈하게 지어진 구식 건물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 겉모습만으로는 유추하기 어려울 정도의 역사적 교훈을 지녔다는 점에서 시모노세키에서 절대 지나쳐서는 안될 곳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역사적 교훈으로서 가장 먼저 언급하고 싶은 것은 청의 조선에 대한 종주국 의식도, 일본 제국의 팽창주의도 아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질문은 청일전쟁이 왜 조선 땅에서 벌어졌으며, 더 구체적으로는 조선은 왜 외세를 끌어들이지 않고는 혼란한 정국을 수습할 수 없었는지다.

 이에 대해 침략 행위에 면죄부를 주는 것이냐며 비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럴수록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조선은 망한지 이미 오래지만, 조선을 둘러싼 냉혹한 국제정치현실은 여전히 대한민국의 발 밑에 도사리고 있다. 그렇다면 망국의 원인을 단지 타국의 침략만으로 돌리는 편리한 발상보다는, 내재적인 측면에서의 실책에 관한 비판과 성찰도 같이 뒤따라야하지 않을까. 과거의 불우한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그저 눈만 부릅 뜨고 침략의 역사를 기억하는 것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우리가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는 감정을 기억하는 것을 넘어 인간 세상의 냉정한 속성을 곱씹는데 있다고 본다.  
 


 
# 알려지지 않은 근대 일본의 전략가, 무쓰 무네미쓰에 관하여

 
 강화기념관의 좌측에는 두 개의 흉상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 중 한 개는 아마 한국인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의 흉상이, 그리고 그 오른쪽에는 청일전쟁 당시 일본의 외무대신이었던 무쓰 무네미쓰(陸奥宗光, 1844~1897)의 흉상이 있다. 아마 무쓰 무네미쓰에 관해서는 한국에서 알려진 바가 거의 없을 것이다. 물론 그럴만도 한 것이, 청일전쟁의 예고편과 같았던 톈진조약(1884)이나 앞서 언급한 시모노세키 조약(1984) 때 모두 이홍장의 카운터파트로서 일본을 대표하던 인물은 이토 히로부미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일본의 외교 전략의 기본틀부터 세부 조건까지 수립했던 무쓰 무네미쓰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근대 일본을 결코 제대로 이해한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청일전쟁강화기념관의 이토 히로부미(左)와 무쓰 무네미쓰(右)의 흉상

 
 그런 그가 저술한 아주 중요한 사료임에도 한국 근대사에서 잘 주목받지 못하는 저서가 있다. 바로 무쓰 무네미쓰가 청일전쟁 전후의 동북아 정세를 일본의 입장에서 서술한 《건건록(蹇蹇錄)》이다. 그는 해당 저서를 통해 동학난(동학농민운동)부터 청일전쟁에 관한 서양 열강 각국의 시각과 개입, 그리고 풍도 해전 등의 주요 전투와 전후처리에 관하여 세세한 기록으로 묘사했다. 물론 철저히 일본의 입장에서 쓰여진 것, 그리고 무쓰 무네미쓰 개인에게 불리할 요소들은 잘 묘사되지 않았다는 점 등에서 비판점이 분명 있긴 하다.

 하지만 때로는 나의 시선이 아닌, 상대방의 시선에서, 그것도 당대의 열강의 한 축이었던 일본의 눈으로 한반도를 바라보는 것이 더욱 중요할 때가 있다. 그런 관점을 체득하는 것이야말로 부국강병에 필요한 전략적·대칭적 사고의 일환이기 때문이다. 그런 맥락에서 청을 제압하고 동아시아의 최고 열강으로 거듭난 일본의 외교 분야 최고 담당자의 시선은 분명히 참고할만한 가치가 있다.

 그의 시선에서 특기할만한 부분 한 대목을 가져와보자.

“현재의 조선 정세와 관련하여 일청 양국의 소견이 다른 것은 심히 유감스러운 일이다. 그런 이를 기왕의 일의 자취에 비추어 보건대, 조선반도는 항상 붕당 투쟁과 내홍 및 폭동이 빈번하고 사변이 자주 일어나는 것은 오로지 그 독립국으로서의 책무를 다 할 요소를 결여하고 있기 때문이라 확신한다. 그리고 우리나라와 저 나라는 좁은 바다를 사이에 두고 국토가 근접하여 피차 교역상 중요함은 물론이며, 일본 제국의 조선국에 대한 각종의 모든 이해는 아주 긴절하고 중대하다. 때문에 지금 조선에서의 참상을 수수방관하여 이를 바로 잡을 모책(謨策)을 시행하지 않은 것은 이웃 나라의 우의를 저버리는 것일 뿐만 아니라, 실로 우리나라의 자위의 길과도 어긋난다는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일본 정부는 조선국의 안녕과 평온을 구할 계획을 담당함에 추호도 의심하여 주저할 바가 없다. ··· ” (무쓰 무네미쓰·나카츠라 아키라, 『건건록』, 논형, 2021, 54~55쪽)

 해당 대목은 동학농민운동 진압을 위해 청일 양국이 조선에 군대를 주둔시킨 뒤 무쓰 무네미쓰가 주일 청 공사에게 보낸 회신의 일부다. 긴 내용은 아니나 문장 하나하나에서 많은 것들을 느낄 수 있다. 조선의 정치사회적 폐해을 꼬집으면서도, 일본이 조선에 영향력을 행사해야 할 이유를 나열하며, 일본이 궁극적으로 달성하고자 하는 목표(조선 정복)를 감추지 않고 있다. 그리고 그의 회신은 다음과 같은 단락으로 마무리 된다.

본 대신이 이와 같이 흉금을 터놓고 성충(聖衷)을 토로하는 것이 혹시 귀국 정부의 소견과 다르다고 해도, 제국 정부는 결단코 현재 조선국에 주둔하는 군대를 철수하는 명령을 내릴 수 없다.” (같은 책, 55쪽)

 무쓰 무네미쓰의 마지막 단락은 조선을 양보할 생각이 전혀 없는 건 물론, 필요한 경우에는 조선에서 대치하고 있는 청의 군대와의 충돌도 불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청일전쟁은 피할 수 없는 숙명과 같았던 것이다.
 

1894년 평양 전투, 미즈노 도시가타의 판화

 


 
# 청일전쟁이 지금 우리에게 시사하는 교훈은 무엇인가

 
 그런 맥락에서 국제질서와 국제법에 대해서 밝은 이들이 조선 정부에 별로 없었다는 점은 재앙과 같았다. 이미 예고된 패권전쟁을 눈 뜨고도 지켜보는 것 말고는 조선이 주도적으로 할 수 있는 게 사실상 없었기 때문이다. 임오군란 이후의 조선 군대는 중심을 잃은 지 오래요, 개화파들은 갑신정변 이후 대부분 피살 당하거나 국외로 도피했고, 권력을 움켜쥐고자 했던 고종과 왕실은 그 대상이 청이든 일본이든 가리지않고 기대고자 했다.

 흔들리는 국가를 다잡을 정치권력이 부재한 상황에서 동학농민군이 들고 일어났다. 그러나 조선 정부에는 그런 소요를 잠재울 최소한의 군력(軍力)조차 없었다. 그리고 동학농민군을 진압한다는 명목으로 조선으로 청과 일본의 군대가 밀려들어왔다. 청일전쟁은 그렇게 시작됐던 것이다.

 일본 근대사 분야에서 양질의 저서를 남긴 성희엽 교수는 그가 번역한 후쿠자와 유키치의 《문명론 개략(文明論 槪略)》의 역자 해제에서 그런 조선 정치의 파국을 다음과 같이 맹렬히 비판했다.

” ··· 이처럼 망상과 환상에 빠진 채 바깥 세계에는 완벽하게 무지했기에 고종과 조선의 지배계층은 서구열강과 일본의 치열한 외교전쟁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때그때 강해보이는 나라에 기대어 위기를 모면하려는 임기응변이 있었을 뿐이다. 처음에는 청, 다음에는 일본, 미국에 의존해 왕권을 유지하려고 했고, 마지막에는 영국과 전세계에 걸쳐 대립하고 있던 러시아에 매달렸다. 러시아의 품에 안긴다는 것은 19세기 최고의 강대국인 영국과 적대적인 진영에 가담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는 국제정치적 관점에서 볼 때 최악의 선택이었다. 정글 같은 국제정치에서 국제질서에 대한 무지와 동맹국에 대한 잘못된 선택은 치명적이다. 러일전쟁에서 러시아마저 일본에 패하자 고종이 기댈 나라는 한 곳도 남아 있지 않았다. 량치차오는 「조선멸망의 원인」 이라는 글에서 조선멸망의 최대 원인으로 고종과 왕실을 꼽으며 신랄하게 비판했었다.” (후쿠자와 유키치, 『문명론 개략』, 소명출판, 2020, 32쪽)

 부강하지도 않은 것은 물론, 그 부강함을 기민하게 활용할 세계 전략도 없으며, 국가 엘리트들이 부강함과 전략을 추구하는데 별 관심도 없는 나라. 조선은 그런 나라 중에 하나였고, 그런 취약점을 극복하지 못한 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대한민국은 그런 조선이 마주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지정학적 조건에 놓여있다. 그런 맥락에서 우리는 조선을 교보재 삼아 끊임없이 성찰적인 질문을 던져야 한다. “과연 우리는 국가와 개인의 존립을 위해 어떠한 전략과 수단을 고민하고 준비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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