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력주의 1부] 공정하다는 착각이 말하지 않는 것들

일러스트=토끼풀

 
왜 ‘공정하다는 착각’ 인가?

‘정의란 무엇인가’와 ‘공정하다는 착각’, 이 두 권의 책이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정치철학서라는 주장에 고개를 끄덕이지 않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이 두 권의 책을 쓴 마이클 샌델 교수는 현재 대한민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정치철학자가 되었다. 민주당 대선 후보가 대선 캠페인 용으로 샌델 교수를 활용하거나, 그의 책을 해설해주는 영상이 약 160만의 조회수를 기록하는 모습은 그 영향력을 새삼 실감하게 한다. 그리고 그의 저서 중에서도, ‘공정하다는 착각‘은 2022년 서울대학교와 고려대학교의 도서관 대출 1위 도서와 연세대학교의 도서관 대출 2위 도서였을 정도로 최근의 ’뜨거운 감자‘다.

문제는 이 책에 대한 의미 있는 수준의 비판이 충분히 공유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대한민국을 강타하는 많은 인문학, 사회과학 베스트셀러들의 공통점이지만, 오늘의 주인공 ‘공정하다는 착각’도 최소한 대중적인 차원에서는 그 문제점들이 충분히 지적되지 못했다. 논쟁의 대상이 되지도 못했다. 대신 이 책의 주장들을 가장 적극적으로 변호하는 저자 본인이, TV 프로그램과 유튜브에 등장해 책의 주장을 반복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나마 등장하는 비판이라고는 이 책이 이미 논파한 주장을 답습하며 능력주의를 옹호하는 담론들 뿐이었다. 그래서 시기가 조금 지나긴 했고 그런 고발을 제대로 할 정도로 박식하지도 않지만, 내가 하고 싶었다. 이 책은 어떤 측면에선 굉장히 우려스럽고, 또 어떤 측면에선 언급해야 할 중요한 부분을 누락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었다. 이 책의 주장, 근거, 서술 방식, 결론들에 대해 고민하고 의심할 필요가 있다고 호소하고 싶었다.

본론을 시작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나는 능력주의의 신봉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적극적인 비판자도 아니다. 그저 ‘자유지상주의적 도덕 감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서, 위대한 철학자의 말씀에 대해 약간의 불만을 토로하고 싶을 뿐이다. 그래서 이 글을 적는 것이 오로지 능력주의를 옹호하기 위함은 아니라는 것을 미리 밝혀두고 싶다.
 


 
샌델의 주장은 무엇인가?

이 책은 능력주의의 역사, 특징, 정치/사회/경제/심리/철학적 의미, 그리고 대안까지를 다루면서 능력주의라는 개념을 분석하는 책이다. 하지만 이 책은 작가의 다른 저작인 ‘정의란 무엇인가?’와 달리, 단순히 주제에 대한 여러 가지 주장을 적당히 소개하는 정도에 머무르지 않는다. 샌델은 이 책에서 능력주의의 환상을 신랄히 폭로한다.

그의 능력주의 비판은 크게 세 가지 축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 번째는 능력주의 윤리가 제시하는 이상향이 현실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능력주의는 능력 외의 그 무엇으로도 사람을 차별하지 않음을 통해 평등을 실현하고자 한다. 그에 따르면, 모든 사람은 사회적 이동을 위한 사다리를 평등하게 이용할 수 있다. 이를 통해 능력주의는 경제적 불평등을 해결하고자 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오히려 새로운 특권계층을 만들어내고 계층이동의 사다리를 끊어버렸다.
 

마이클 샌델 作 <공정하다는 착각> 표지

 
두 번째는 설령 능력주의 이상향이 실현된 사회를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고 해도, 과연 그것이 철학적으로 정당한 사회인가에 대한 물음이다. 샌델은 운과 같이 개인이 통제 불가능한 요인에 의한 보상이나 박탈이 부당하다는 능력주의의 핵심 전제를 소개한다. 하지만 능력주의가 열렬히 옹호하는 개인의 재능은 정확히 그런 사례에 해당한다. 샌델은 재능과 여러 종류의 행운들이 무슨 차이가 있는지 물으며 능력주의의 내적 모순을 꼬집는다. 한편, 능력주의는 사회적 이동성의 이름으로 불평등을 정당화한다는 점에서 정의로움의 측면에서도 부당하다고 덧붙인다.

그리고 가장 유명한 세 번째는 능력주의가 윤리를 유린하고 사회 연대를 해친다는 것이다. 여기서 샌델은 인간 개개인이 곧 자기 운명의 주체자인 동시에 자기에 대한 무한책임을 진다는 능력주의적 자유 개념을 설명한다. 샌델에 따르면, 이런 생각은 성공과 실패의 이유가 전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있다고 믿게 만들어 승자에게는 패자에 대한 거만함을, 패자에게는 자신이 못나서 실패했다는 패배주의를 심는다. 그 과정에서 승자와 패자는 선명한 사회적 계층으로 구획되고, 둘의 갈등은 커진다. 그리고 이것이 사회 연대를 파괴하는 씨앗이 된다. 샌델은 다양한 통계 자료들을 통해 성패의 근본적 원인이 개인에게 있다는 생각이 현실과 괴리되었음을 밝히는 일도 잊지 않는다(사실, 여기에 제일 큰 주의를 기울인다).
 


 
능력주의 개념의 세 가지 의미

분명 이런 샌델의 주장들에는 설득력이 있다. 특히 샌델이 책 전체에서 입이 마르도록 강조하는 세 번째 축은, 능력주의가 사람들에게 현실과 다른 착각을 심어준다는 점에서 더욱 고민해볼 만하다. 거짓으로부터 사회 구성원 누군가의 부당한 권위가 발생하고, 그 권위가 동료 시민을 폭력적으로 배제한다면 이는 참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성공한 사람들이 자기 능력에 대한 지나친 맹신, 패배한 다수에 대한 우월의식, 공동체에 대한 무관심을 가진 상태로 사회의 요직에 들어갔을 때의 폐해는 쉽게 상상해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샌델의 서술에는 큰 함정이 숨어 있다. 샌델은 능력주의라는 용어를 여러 장에서 조금씩 다른 의미로 사용하면서, 동시에 이들을 모두 같은 능력주의인 것처럼 서술한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서, 승자가 성공이 모두 자신의 능력이라고 믿고 패자가 실패를 전부 자신의 탓으로 돌리는 ‘태도’, 능력에 의한 것 외의 차별을 모두 소거하고 사회적 이동성을 통해 불평등을 해결하겠다는 ‘신념’, 능력이 출중한 사람에게 더 높은 자리로 올라갈 수 있는 자격을 주는 ‘제도’는 모두 다르다. 물론 각자가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지만, 그렇다고 모두 같은 것으로 치부해 버리는 일은 곤란하다.

지금부터 서술의 편의성을 위해 각각 임의로 태도로서의 능력주의, 신념으로서의 능력주의, 태도로서의 능력주의라는 이름을 붙여 보기로 하자. 그의 혼란스러운 용어 사용을 파고 들어가보면, 샌델은 제도로서의 능력주의로 인해 시민들 사이에 태도로서의 능력주의가 발생하고, 신념으로서의 능력주의를 따르는 중도우파/중도좌파 정치인들이 이를 부추긴다고 주장한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래서 샌델은 태도로서의 능력주의가 가진 폐해와 신념으로서의 능력주의가 가진 환상을 무자비하게 공격하고, 그 해결책으로 제도로서의 능력주의를 무너뜨리거나 약화시키는 일을 제안하고 있는 것이다.
 

‘태도’로서의, ‘신념’으로서의, ‘제도’로서의 능력주의는 모두 다르다

 
여기서 우리는 여러 가지 질문을 해 볼 수 있다. 진정 태도와 신념에 관한 한 능력주의는 문제덩어리인지에 대한 질문, 제도와 태도 간의 인과관계에 대한 질문, 제도로서의 능력주의를 파괴하지 않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는지에 대한 질문 등등. 하지만 이런 질문들에 대해 샌델은 상세하고 깊은 답변을 이미 책에 남겨 놓았다. 그는 첫 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태도와 신념이 가진 허위성을 고발하는 방식으로, 두 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여론조사와 통계를 들이대는 방식으로 대처한다. 마지막 세 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교육, 적극적 우대조치 등의 기회를 더욱 평등하게 하려는 노력들이 여전히 능력주의적인 태도와 신념을 벗어나지 못했음을 짚는다. 또한, 롤스 모델이나 하이에크 모델 등 능력주의 이데올로기에 반대하는 동시에 능력주의적 제도를 긍정하는 이론들은 모두 능력주의 이데올로기의 확산을 막는데 실패했다는 점을 들어 상세히 논증한다.

그의 답변이 모두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다. 하지만 상술했듯 나는 태도로서의 능력주의에 대한 그의 고찰에는 동의하는 바이고, 신념으로서의 능력주의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보다 깊게 다룰 생각이다. 따라서 일단 이 세 질문에 대해서는 덮어두기로 하자. 그래도, 우리에게는 아직 해결해야 하는 중요한 질문이 기다리고 있다. 과연 ‘제도로서의 능력주의’가 가진 순기능은 없는가? 그 순기능은 태도와 신념의 크나큰 단점을 제거하기 위해 희생해도 좋을 만큼 수수한 것인가? 나는 샌델이 외면한 이 문제에 대해 조명하고자 한다.
 


 
은근슬쩍 사라진 효율성

사실, 샌델은 책의 초반부에 능력의 중요성에 대한 짤막한 설명을 붙여 놓았다.
 

사람을 채용할 때 후보자의 능력은 적어도 두 가지 점에서 중요하다. 하나는 효율성이다. 내 일을 봐주는 배관공이나 치과의사가 무능하지 않고 유능하다면 내게 이익일 것이다. 다른 하나는 공정성이다. 가장 유능한 후보자를 그 종교나 인종, 성별 때문에 물리치고 보다 덜 유능한 후보자를 선택한다면? 잘못이다. 비록 나의 편견에 충실하려는 마음에서 수준이 떨어지는 배관공이나 치과의사를 선택하려 한다고 해도, 그러한 차별은 불공정할 수밖에 없다. 더 능력 있는 후보자는 자신이 부정의한 처사의 희생자라고 정당하게 불평할 수 있다.

– 공정하다는 착각 중에서

 
이 서술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샌델이 보기에 능력이 중요한 이유는 ‘효율성’과 ‘공정성’이다. 그리고 샌델은 이후의 글 전체에서, 능력주의는 사실 불공정하다는 논조의 주장을 다양한 방법으로 되풀이하며 능력주의에 대한 맹공을 펼친다. 능력에 의한 차별을 정당화함으로서 불평등을 방치했고, 사회적 계층 이동이라는 가림막 뒤에 공공연한 부의 세습을 숨겼다는 식으로 말이다.

그런데, 샌델은 공정성에 대한 주장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자신이 책의 맨 앞에 깔아놨던 중요한 밑밥을 잊어버린 듯하다. 흥미롭게도 그는 글 전체에서 능력주의가 불러오는 효율성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을 하지 않는다. 그저 시장에서 많은 소비자에게 선택받는 일이 곧 능력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잠깐 언급하면서 에두른 비판을 할 뿐이다.

하지만 능력주의가 소구력을 갖고 환영받을 수 있는 중대한 이유에는 효율성이 자리하고 있다. 우리는 커피를 더 잘 내리는 카페에 가고, 실적이 높은 과외 선생님을 찾고, 안정성이 입증된 기업의 제품을 선택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게 더 많은 효용을 약속하기 때문이다. 이는 비단 사적인 문제만은 아니다. 국가 차원에서도 효율적인 교통체계와 인프라를 구축하고, 합리적인 정책을 설계하며, 그를 능률적으로 처리하는 공무원이 선호된다. 그게 더 많은 사람에게 도움을 주기 때문이고, 공익을 실현하는데 기여하기 때문이다. 능력주의는 모든 경우에는 아니지만, 많은 경우에 더 큰 효용을 창출한 사람에게 더 큰 보상을 약속함으로써 다수에게 더 효율적으로 될 유인을 부여한다. 이를 통해서 사회 전체를 점점 더 편리하고 살기 좋게 발전시킨다.
 

우리는 더 높은 효용성을 갖춘 사람을 원한다

 
만약 공정성을 이유로 제도로서의 능력주의를 죽인다면, 그래서 우리 사회가 효율성을 잃어버리게 된다면, 우리는 다수에게 효용을 선물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우리 스스로 거세하는 꼴이 될 것이다. 어쩌면 과학기술에 대한 발전의 유인이 적어져 저출산 문제나 지구 온난화를 해결할 획기적인 발명의 기회를 놓칠지도 모른다. 공정성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결코 아니지만, 그를 명목으로 효율성을 포기하는 일이 과연 지혜로울지는 의문이다.
 


 
논의에서 배격당한 ‘뽑는 자’

사실 샌델의 담론이 효율성을 언급하는 일을 까맣게 잊어버린 일은, 그가 어떤 입장을 고려하지 않은 것과 깊은 연관이 있다. 바로 대학의 교수, 회사의 임원, 정부의 고위 공직자 같은, 구성원을 뽑고 조직을 꾸리는 일을 하는 사람들의 입장이다. 보통 어떤 사람이 조직의 일원이어야 조직이 효율적으로 돌아갈지에 대한 문제는 뽑는 사람들의 고민이다. 그렇기에 이런 사람들의 입장을 아예 논의에서 빼버린 샌델의 담론에는 효율성에 대한 생각이 없는 것이다.

미국의 자유지상주의 사상가였던 로버트 노직은, 정형적 원칙들에 근거한 주장들은 누가 소유물을 받아야 할 것인지에만 관심을 가지고 소유물을 주는 사람에 대해 신경쓰지 않는다고 말했다. 역시나 샌델도 그런 경향을 피해가진 못한 모양이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만약 명문 대학에 진학하고 좋은 직장에 들어가고자 하는 사람들의 욕망이 진중한 논의의 대상이 된다면, 그 대학과 직장에서 사람들을 뽑는 사람들의 입장도 보다 동등하고 진중하게 논의되어야 한다.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싶은 욕구와 좋은 학생을 뽑고 싶은 욕구를 다르게 취급할 이유는 없다. 노직처럼 강경한 자유지상주의 원칙을 들이밀며 ‘뽑는 사람들의 배타적 권리를 무조건적으로 존중해라.’라고 말할 생각은 없다. 다만 지원자들의 욕망이 가진 문제와 그 욕망을 제한해야 하는 근거를 충분하게, 그리고 길게 설명했다면, 채용자들의 욕망을 제한하는 데에도 그만큼의 충분한 설명을 제공했어야 한다.

그런데, 이 책에는 그런 노력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샌델은 최저 학력선을 넘은 지원자들 사이에서 제비뽑기로 입학자를 결정하는 대학 입시 제도를 아무렇지도 않게 고려해보기를 권한다. 이 제안 속에는 집단의 운영을 책임지는 사람들이 그 집단에 누구를 들일 것일지 결정할 권한에 대한 생각이 아예 빠져 있다. 그런 건 생각할 필요도 없는 하찮은 것이라는 듯이.

하지만 이런 ‘뽑는 사람’의 권리는 조금만 상상해봐도 매우 중요한 것이다. 당신이 리더로서 조직을 꾸리고자 한다고 한번 가정해보자. 당신은 자신의 조직이 잘 돌아가도록 만들 책임이 있다. 문제가 생기면 그에 대한 뒤처리는 오로지 당신 몫이다. 만약 조직에 잘 기능하지 못하는 사람이 들어오게 되면, 다른 조직원들의 불만 섞인 눈초리를 받아야 하는 위치에 있기도 하다. 당신이라면 당신 조직의 구성원을 결정하는 권한을 선뜻 다른 누군가에게 줘 버릴 수 있는가? 아니, 절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조직의 구성원을 결정하는 일은 조직을 이끄는 사람들에게는 필사적인 문제다. 그걸 충분한 설득 없이, 책임져줄 능력도 의지도 없으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내려놓으라는 요구는 너무나도 오만하다.
 

조직을 책임지는 사람은 조직의 능력 있는 구성원을 결정할 책임과 권리가 있다

 
여기에 더해, 조직을 구성하는 사람의 입장을 이해하는 것은 태도로서의 능력주의와 제도로서의 능력주의를 보다 의미있는 관점으로 이해하게 되는 기회를 제공한다. 샌델은 개인의 능력은 부와 환경의 영향을 심하게 받으며, 이 때문에 결코 자기 자신만의 것일 수 없다고 거듭 강조한다. 이는 태도로서의 능력주의를 비판하는 데에는 탁월한 근거일지 모른다. 하지만, 사람들을 뽑는 면접관에게 그 능력이 어떤 과정을 통해 형성되었는지는 그리 중요한 관심사가 아니다. 면접관에게 중요한 것은 현재 어떤 능력을 갖고 있고, 앞으로 어떤 능력을 발휘할지다. 그래서 샌델의 능력 형성 과정 비판은 뽑는 사람의 입장을 함께 고려하는 순간, 그 지위를 상당히 상실한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재능이 있지만 충분한 기회를 향유하지 못한 사람이 재능이 없지만 부의 도움을 받아 재능을 매꾼 사람에게 패배하는 현재의 능력주의 사회는 불공정한 것 아니냐고, 이것은 뽑는 사람들 입장에서도 재능있는 사람들을 놓치기에 손해가 아니냐고 말이다. 우선, 운을 배제하고 재능과 노력을 평가하는 시스템을 이상으로 삼는 것이 다름 아닌 신념으로서의 능력주의다. 그 관점에서, 이 비판은 현재 능력주의 사회의 문제가 충분히 능력주의적이지 못해서 생기는 것이라고 외치는 꼴임을 먼저 짚고 싶다.

그리고, 만약 그렇게 재능만을 가진 사람들이 반드시 승리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선, 어릴 때부터 그 인간이 가지고 있는 재능이 무엇인지 탐색해서, 그 인간이 그 재능의 업무에만 종사하도록 만드는 수밖에 없다. 개인의 재능에만 근거해서 그 사람에게 숙명적인 역할을 부여하고, 그 재능을 살릴 수 있는 사회의 어떤 부분에 가서 사회의 충실한 부품이 되라고 하는 요구는 한 개인에게 너무나도 잔혹하다. 이런 뒤틀린 분업론이 과연 21세기 자유민주주의 사회에 적당한지는 글쎄, 난 잘 모르겠다.
 


 
공정성과 도덕성은 지상가치가 아니다

계속 강조했듯이, 공정하다는 착각은 분명 시사하는 바가 큰 저작이다. 좌우파를 막론하고 무의식적으로 따랐던 능력주의의 도그마를 깬 것, 그리고 한 사람의 승리가 결코 한 사람의 힘만으로 이루어진 게 아니라는 것을 경고하는 일은 충분히 가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샌델은 자신의 윤리학자적 정체성 때문에 효율성을 고려하는 일을 잊어버렸고, 공동체주의자적 정체성 때문에 뽑는 자들의 권리를 무시하는 냉혹한 일을 저질렀다.

내가 이런 문제 제기를 통해 시사하고자 했던 바는 결국 공정성과 도덕주의라는 도구만을 가지고 문제를 진단하고, 해법을 내는 것은 위험하다는 것이다. 이들은 분명 우리 인간 사회에 중요한 문제이지만, 결코 지상 가치들은 아니다. 옳음의 이름으로 현상을 단죄하려는 시도는 그 현상이 가진 많은 다른 점들을 보지 못하게 만든다. 부디, 내 글이 이 책을 읽은 사람들과 앞으로 읽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균형 잡힌 시선을 제공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면 좋겠다.
 


 
참고문헌
1. (2020), 공정하다는 착각, 와이즈베리
2. 장동진, 김만권.(2000).노직의 자유지상주의.정치사상연구,3(),195-220.
3. 이가람, “서울대·고려대생 ‘공정하다는 착각’ 빌릴때…연세대는 달랐다”, 중앙일보, 2023.01.25.,
4. 이재명, [이재명], (2021. 12. 21.), [이재명X마이클샌델] 어떻게 공정의 날개로 비상할 것인가?[Video], 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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