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눈 흘긴다 : 전치 (Displacement)
40대 초반인 P 씨는 아침마다 매일 실랑이 중이다. 초등학교 2학년이 된 큰아들은 P 씨가 챙겨주지 않으면 늘 지각이다. 평소에도 산만하고 주의 집중이 어려운 편이라 매번 신경을 써야 했다. 집안일로도 힘든데 남편은 연락도 없이 새벽에 들어오는 일이 잦았다. 요즘 들어 술을 자주 마시는 남편에게 잔뜩 짜증이 나 있었다. 참다못해 P 씨는 아침에 남편과 심하게 다투었다. 남편은 화를 내며 나가버렸다. P 씨는 분이 풀리지 않았다. 다투는 소리에 큰아들과 딸이 깼고 다짜고짜 큰아들에게 화를 냈다. ‘아빠 닮아서 게으르다. 얼른 서둘러라 또 지각하려고 하냐..’ 는 등 애꿎은 아이에게 화풀이했다.
우리나라 속담 중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눈 흘긴다.’ 는 말이 있다. P 씨는 분명 남편에게 화가 났다. 하지만 남편이 아닌 남편과 닮은 덜 위협적인 대상인 큰 아들에게 화가 옮겨갔다. 이런 현상을 전치(Displacement)라고 부른다. 전치는 신경증적 방어기제에 속하며 실제 대상에게 향했던 감정이 덜 위협적인 대상으로 옮겨가는 것을 말한다. P 씨는 전치의 방어기제를 사용하고 있었다. 자신의 감정이 큰아들에게 옮겨 화를 낸 사실을 지각하지 못했다.
강한 감정의 충동을 다른 대상에게 발산한다
전치는 다양한 상황에서 나타난다. 특정 정치인이나 지역을 싫어하는 행동, 그 지역과 관련된 사람들에게 이유 없이 화내는 행동도 전치에 해당한다. 상사에게 혼나고 부하직원에게 화풀이하는 행동, 선생님께 혼난 형이 동생에게 시비 거는 등의 행동도 전치라고 볼 수 있다. 비슷한 대상에게 감정전이(transference)가 나타나기도 한다. 자신의 불쾌한 감정을 그대로 배출해버린다. 감정전이는 과거에 경험했던 특정한 감정이나 무의식이 남겨진 정서를 다른 대상에게 체험하는 것이다. 이런 감정은 유년기에 주요한 대상과의 관계에서 경험한다. 어릴 때 좋은 관계를 유지했던 친구와 닮은 사람에게 유난히 친절한 경우다. 혹은 안 좋았던 경험이라면 이유 없이 미워한다.
전치는 범죄자들에게도 많이 나타난다. 2014년 7월 27일 새벽 3시 울산에서 살인사건이 발생했다. 범인 23살 장 씨는 그날 별거 중인 아버지와 술을 마셨다. 아버지가 “너는 돈도 안 벌고 뭐 하는 거냐” 는 말을 듣고 홧김에 집에서 칼을 들고나왔다. 2시간 거리를 배회하다가 생일 파티를 끝내고 집으로 가던 18살 여고생을 수십 차례 칼로 찔러 살해했다. 범인은 자신을 무시하는 아버지가 아닌 아무런 일면식도 없는 여고생에 화풀이했다.
연쇄살인범 하면 매번 회자 되는 테드 번디의 이야기를 해보면, 그는 전 여자친구와 헤어진 뒤 그녀를 떠올리는 흑갈색 머리의 백인 여성만 살해했다. 전 여자친구가 관계를 정리하자 자신이 거절당했다고 느껴 분노했다. 분노의 대상은 전 여자친구다. 하지만 전혀 다른 대상에게 화풀이 함으로써 연쇄살인을 이어갔다.
오래된 영화 <주유소 습격사건>에도 전치 방어기제를 사용한 장면이 나온다. 아무런 계획도 없이 모인 4명은 편의점에서 라면을 먹다가 주유소를 습격하기로 한다. 주유소와 전혀 접점이 없다. 그냥 편의점 앞에서 보였을 뿐이다. 사실 이들은 가정, 사회에 대한 불만과 결핍이 있다. 사회에 대한 불만을 전혀 관련성이 없는 엉뚱한 장소에 불을 지르는 행동으로 분풀이한다. 과거 숭례문 방화 사건도 마찬가지다. 토지 보상에 불만은 품은 60대가 어이없게 국보 제1호에 방화한 사건이다.
전치를 자주 사용하면 대인관계에 영향을 미친다
감정을 잘 표현하지 못해 덜 위협적인 대상에게 화풀이하는 일은 건강하지 못하다. 감정을 적절히 언어화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전치를 자주 사용하면 대인관계에 영향을 미친다.
전치는 순기능과 역기능이 있다. 상사에게 혼난 뒤 건설적으로 감정을 해소하기 위해 운동을 하는 것. 권투를 하면서 샌드백이 상사라고 생각해보자. 근력도 좋아지고 주먹도 단단해질 수 있다. 순기능은 안전한 상황에서 안전한 방법을 선택한다. 상담 장면에서는 역할 놀이를 통해 감정을 해소하기도 한다. 상담자가 그 상사가 되어준다. 상사에게 못했던 말들이나 감정을 상담자에게 쏟아낼 수 있다. 반면, 이상 동기 범죄, 화풀이 행동, 납치나 감금, 성폭력, 폭언하는 진상 고객 등 타인을 해롭게 하는 행동들이 전치의 역기능이다.
진화생물학자인 데이비드 바래시와 인간행동생물학자 주디스 이브 립턴 박사는 화풀이에 대해 “화풀이는 척추동물과 어류에서 대부분 나타나는 현상이다.”라고 말했다. 인간과 동물의 화풀이는 고통을 떠넘기기 위한 본능이라고 설명한다.
아프리카 사바나 초원에 주로 서식하는 개코원숭이는 서열에 민감하다. 스탠퍼드대학 생물학과 교수인 로버트 새폴스키 박사는 <영장류 회고록>에서 “개코원숭이 서열 관계는 폭력적으로 이어진다. 강자에게 당한 수컷 개코원숭이는 분풀이 대상을 찾아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그러다 약자 수컷에게 화풀이한다. 약자 수컷은 자신보다 더 약한 암컷을 때린다. 암컷은 자신보다 어린 개코원숭이를 못살게 군다. 어린 개코원숭이는 갓 태어난 새끼 개코원숭이를 괴롭히고 때린다. 이 모든 행동이 15초 안에 벌어진다.”라고 기록했다.
인간에게도 비슷한 본성이 바로 전치다. 앞서 본 P 씨의 행동을 들 수 있다. 여기서 P 씨 아들이 학교에 가서 자신보다 더 약한 친구를 괴롭힐 수 있다. 혹은 자신의 동생에게 애꿎은 화풀이를 할 수도 있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은 그냥 강자와 약자가 아니다. 좀 더 넓다. 단순한 힘부터 부, 권력, 지위 등으로 나타날 수 있다. 학교 폭력에서 행해지는 전치 현상이 그렇다. 자신보다 약한 대상에게 권력을 갖고 함부로 하려고 한다. 약한 대상자는 가해자의 권력에 힘을 잃는다.
서열에서 밀려난 개코원숭이는 ‘종속 스트레스’를 경험한다고 한다. 성호르몬이 감소 되며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가해자의 권력이 만들어 낸 학교 폭력으로 무기력해진 피해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학교를 떠나거나 극단적 선택이다. 약자가 보호받지 못하는 사회에서는 말이다.
전치에 의존하는 경우 다른 대상을 공격함으로써 도피하려는 것이다
전치에 의존하는 경우 자신이 느끼는 고통스러운 기분이나 화를 자주 어딘가에 해소하려고 한다. 위협적이거나 영향력 있는 대상에게 화풀이한다면 관계가 나빠질 수 있다. 자신보다 덜 위협적인 대상을 공격함으로써 안전하게 부정적 기분을 회피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부정적인 감정이 사라지지 않는다. 남에게 불쾌감을 전달한 후에도 자신이 느꼈던 감정은 그대로 남아있다.
자아가 건강한 사람은 자신이 욕구나 공격성의 대상을 분명히 안다. 그래서 현실적인 대안을 찾아 잘 해결하려고 한다. 전치의 의존성을 가진 경우 자아가 약하다. 자신은 한없이 나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문제를 해결할 힘이 자신에게 없다고 느낀다. 감정을 억누를 정도로 통제적이지 못하기에 엉뚱한 대상에게 화풀이하는 것이다.
누구도 타인의 감정 쓰레기통이 되고 싶은 사람은 없다. 자아가 건강한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P 씨는 자신의 행동이 어떤 결과를 낳는지 알았다. 앞으로는 큰아들이 아닌 정작 화나게 만든 남편과의 소통이 필요했다. 프로이트는 “표현하지 않는 감정은 절대 죽지 않는다. 산 채로 묻혀서 나중에 더 추한 모습으로 등장한다.”라고 말했다. 자신의 감정을 다른 대상이 아닌 분명한 대상에게 표현되어야 한다. 그것도 올바른 방법으로 말이다. 그리고 감정을 억압해서도 안 된다. 어떤 방식으로든 표출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