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 :동일시 (Identification)

일러스트=바로크

 
20대 L 씨는 현재 대학교 2학년이다. 경영학을 전공하는 그는 학과 교수님을 존경하는 정도가 남달랐다. 처음에 교수도 자신을 좋아해 주는 학생이 그저 좋았지만 지금은 무섭다고 이야기한다. L 씨는 교수님께 잘 보이기 위해 발표 자료도 늘 열심히 준비했다. 점점 그의 행동은 교수님과 비슷할 정도로 닮아간다는 것이다. 발표 자료 스타일도 교수님과 비슷한 어법과 말투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급기야는 자신의 나이와 맞지 않는 교수님이 입는 옷과도 비슷하게 입고 다니게 되었다. 교수님을 존경한다며 모든 면을 똑같이 하려고 했다.

우리나라 속담에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말이 있다. 윗사람의 태도와 행동을 나도 모르게 닮는 심리 기제를 동일시(Identification)라고 한다. 동일시는 나와 남, 남과 남과의 경계를 불분명하게 인식하는 것이다. 단순히 흉내 내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부모, 형제, 선생님 등 중요 인물이라 느끼는 대상에 대해 닮아가고 싶어한다. L 씨는 교수님의 말투 및 행동, 걸음걸이까지 닮아가려고 했다. 중요한 건 L 씨는 단순한 존경을 넘어서 병적인 동일시가 일어나고 있었다. 자신의 정체성은 사라진 체 오로지 교수님처럼 되고 싶었다.
 


 
동일시는 남의 행동을 쫓아가거나 나의 분신인 것처럼 일체감을 느낀다.

 
처음 태어나서 아이가 가장 먼저 만나는 대상은 부모다. 부모의 말씨나 행동을 닮거나 배우면서 자란다. 아이는 성장하면서 넓은 범위의 사람들에게 영향을 받는다. 최초의 동일시는 어머니, 부모의 행동에서 이루어진다. 동일시는 자아 성장에 있어서 핵심적인 기전이다. 어릴 때 부모나 선생님, 그리고 친구 등의 행동을 동일시하려는 시도인 모방 놀이를 통해 다른 일을 할 수 있는 힘을 찾는다.

어릴 때 소꿉놀이 하면서 부모의 모습을 흉내 내 본 적 있을 것이다. 바람직한 동일시를 위해서는 주변에 좋은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 동일시 방어기제를 높게 사용하는 사람은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 어렵다. 자신의 중심이 없고 강하게 영향을 받는 대상과 밀착되어 있기에 의존적인 형태가 나타난다.

학교 폭력을 다룬 드라마 ‘더 글로리’를 들여다보자. 학교 폭력 피해자들은 실질적으로 드라마처럼 복수가 어렵다. 그전에 심신이 피폐해져서 병원 신세를 지거나 극단적 선택을 하기 때문이다. 학교 폭력 피해자 문동은은 자신을 괴롭혔던 박연진을 향해 복수를 계획한다. 문동은은 자신을 집요하게 괴롭혔던 가해자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자신의 내면에 가해자의 악함을 넣어 가해자와 동일시한다. 가해자만큼 자신도 파괴적인 힘이 있다고 믿는 것으로 두려움을 극복하며 견딘다. 폭력에 의한 두려움은 자기 안에 더 큰 파괴적인 힘이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래야 대항 할 수 있는 힘과 안전함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동일시 과정 자체라기보다는 양육자의 어떤 부분을 동일시하느냐가 더 중요하다

어릴 때 부모나 주변의 모델링이 되는 대상의 행동을 통해 동일시가 형성된다. 자신감과 자존감이 강화되도록 격려해주고 지지해주어야 한다. 오랫동안 건강한 동일시를 통해 성인으로 자라면서 개별화가 이루어진다. 남과 나가 분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개별화가 되지 못할 경우 병적인 혹은 적대적(공격적)인 동일시의 형태가 보여진다.

동일시는 아동의 성격 발달에 영향을 준다. 동일시 과정 자체라기보다는 양육자의 어떤 부분을 동일시하느냐가 더 중요하다. 긍정적인 부분이 아닌 부정적인 부분을 동일시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동학대가 끊이지 않는 것도 가해자와 동일시다. 학대받고 자란 자녀가 나중에 또 다시 학대를 하는 악순환을 반복한다.

성장 과정에서 동일시를 잃어버리기도 한다. 청소년기에는 특히 건강한 동일시가 필요한 시기다. 즉,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모델링이 꼭 필요한 시기라는 것이다. 이때 동일시를 통해 현실적인 목표를 발견하고 노력함으로써 자아가 발전하기 때문이다. 동일시 대상이 사라지거나 발견하지 못하면 ‘동일시 실패(identification failure)’상태가 된다. 실패상태가 되면 혼란과 불편감을 경험한다. 결국 그것이 게임중독으로 이어지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모방과 동일시를 혼돈해서는 안 된다. 모방은 타인의 특정한 행동이나 장점을 따라 하는 것이다. 동일시는 이런 단순한 모방을 넘어 그 대상이 가지고 있는 가치까지 내면화시키는 것이다. 그렇기에 겉으로 보이는 외모만 모방하는 것이 아니다. 대상이 가지는 근본적 태도나 관점까지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기에 자칫 자기가 없어지게 될 수도 있다.
 

 


 
동일시는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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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일시가 일어나는 경우는 대상이 나에게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중요하게 느끼는 사람들이다. 동일시는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며 적대적(공격적) 동일시, 병적 동일시, 의존형 투사적 동일시, 힘의 투사적 동일시, 성(性)의 투사적 동일시, 환심 사기의 투사적 동일시로 보여질 수 있다.

적대적 동일시는 미워하고 싫어하는 대상을 닮는 경우다. 이런 경우는 흔히 볼 수 있는데 공격적 동일시라고도 한다. 상대방의 행동 중에서도 나를 정말 괴롭게 하는 특징만 따라 한다. 예를 들어, 자린고비처럼 인색한 아버지가 싫어 비난하면서도 자신도 돈을 아끼는 행위를 들 수 있다. 특히 폭력적인 아버지 밑에서 자란 아이가 나중에 똑같이 폭력적인 행동을 보이는 것도 마찬가지다. 혹은 TV에 나오는 범죄자의 행동이나 모습들을 따라하기도 한다. 과거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희대의 탈옥수 신창원을 기억할 것이다. 신출귀몰한 신창원이 입었던 티셔츠가 불티나게 팔렸던 적이 있었다. 적대적 동일시의 형태다.

병적 동일시는 어떤 대상과 공생하려 한다. 그 대상이 가지고 있는 생각, 가치관 등 힘을 나누어 가지려고 한다. 그 대상이 없어지거나 힘을 잃었다고 판단 될 경우 사라지기도 한다. 신흥종교집단이나 독재자를 맹신하는 것도 하나일 수 있다. 이들은 자기 자신이 없다. 오로지 믿고 의지할 대상만 필요하다. 안정된 동일시는 그 사람 전부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배울 점을 가져와 자기화시키는 것이다. 앞서 말한 L 씨가 전형적인 병적 동일시다.
 

 
의존형 투사적 동일시는 가까운 사람에게 과도하게 의존하는 것을 말한다. 스스로 결정하는 것을 어려워하기도 하고 타인에게 결정까지 책임을 넘기기도 한다. 의존적이기에 주변인들을 쉽게 지치게 한다. 항상 누군가가 결정을 내려줘야 실행할 수 있고 독립적인 삶을 살 수가 없다. 힘의 투사적 동일시는 대인관계에서 자신이 주도권을 얻는 것에 집착하려 한다. 자신의 뜻을 따라오지 않는 사람을 비난하거나 무능력한 존재로 만들기도 한다. 이들은 상대를 마음대로 조종하려 든다.

성(性)의 투사적 동일시는 성을 대인관계의 확립, 유지의 수단으로 사용한다. 성적 어필을 통해 대인관계 형성을 하려는 경향이 크다. 자신에 대한 만족감을 얻지 못하고 성적 어필의 행위를 통해 집착하면서 사람들에게 다가간다. 자신의 의지대로 반응하지 않을 때 화를 내거나 성적 무능감이 있게 느끼도록 유도한다.

환심 사기의 투사적 동일시는 주변인에게 자기희생적인 사람으로 보이기 쉽다. 자신이 헌신, 희생하는 태도를 이용해 타인의 마음에 죄책감을 심어주는 대인관계 양상을 보인다. 매우 자존감이 낮아 외부에서 자기 가치를 증명받으려 애쓰는 경향이 강하다.

대상만 온전히 믿고 의존하는 삶은 나의 에너지가 사라져간다는 것이다. 상대방이 자신의 우위에 있는 존재라는 생각은 스스로 삶의 주도권을 타인에게 넘겨주고 사는 것이다. 나는 어떤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개별화 과정을 통해 내 삶의 주도권을 갖고 살고 있는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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