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 대신 한자를 그린 화가

박상옥의 작품들을 중심으로-
 

일러스트=토끼풀

들어가며

얼굴을 그리지 않는 화가가 있었다. 그 화가는 얼굴보다 한자를 더 선명하게 그렸다. 바로 박상옥 화백이다.
 
박상옥은 서울 출신 서양화가이다. “1939년 동경미술학교를 졸업하고 1949~1954년 국전에 출품해 제3회에서는 대통령상을 수상하고 국전 심사위원이 되었다. (1958). 목우회(木友會)의 창립회원이고 만년에는 서울교대에서 재직하였음. 부드럽고 소박한 필치로 한국의 풍물을 즐겨 다루었다. 『한일(閑日)』. 『연(運)』. 『피리부는 소년』등이 대표작”1)이다.

박상옥 화백의 작품 속 사람들은 직접적인 얼굴 형태가 드러나지 않는다. 필자가 박상옥의 작품을 처음 접했을 때 ‘유명한 작품이구나~’ 하고 넘겼지만, 장욱진 화백과 관련된 저서2)를 읽고 나서 박상옥에 관한 생각이 완전히 달라졌다.
 
박상옥은 장욱진의 <공기놀이>를 너무 좋아해서 빌려달라 했고, 이후에는 소장도 했었다.3) 이 때문이었을까? <공기놀이>와 박상옥의 작품은 얼굴 형태나 분위기가 너무 닮았다.
 
“박상옥이 <공기놀이>를 빌린 이후 주요 작품들은 장욱진의 <공기놀이>와 소재, 기법, 도상의 측면에서 매우 유사하다는 점이다. 특히 <한일(閑日)>은 기와집 돌담을 끼고 대문 앞의 좁은 장소, 아이들의 무거운 분위기, 아이 업은 소녀, 대문에 써서 붙인 ‘立春大吉(입춘대길)’이라는 글씨 등 상당 부분이 장욱진의 <공기놀이>에서 유래했음을 쉽게 알 수 있다.”4)
 
박상옥 작품의 얼굴 형태와 한자는 모종의 의사 표현을 했기에 논할 가치가 있다.―장욱진의 대표적인 그림들은 추상화가 많아 박상옥과 함께 다루기에는 무리가 있어, 이 글에서는 박상옥만 다룰 생각이다.―
 
박상옥에 관한 선행자료를 찾아보았을 때 예전이나 지금이나 향토적 세계관이나 전시대의 풍물에 대한 언급을 주를 이루었다. 신항섭 미술평론가가 얼굴과 한자에 관해서 언급한 바가 있었다. 하지만 얼굴에 대한 자체적 해석만 있었을 뿐5) 한자 글귀에 대한 해석은 없었다.
 
박상옥의 작품에서 얼굴과 한자 글귀가 중요한 이유는 박상옥의 심회와 염원을 보다 구체적으로 알 수 있고, 작품을 좀 더 구체적으로 파악하고, 연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왜 얼굴을 명확히 묘사하지 않았을까?

시대상의 이유’ 때문에 얼굴을 명확히 묘사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박상옥이 얼굴 묘사를 하지 않았던 시기는 ‘일제강점기’와 ‘6·25 이후’였다. 이 시기가 박상옥의 화풍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 독자들은 일제강점기를 듣게 되면 무슨 생각이 떠오르는가? 아마 ‘위안부’, ‘창씨개명’, ‘친일파’, ‘광복절’ 등등을 떠올릴 것이다.
 
일제강점기는 ‘일본이 우리의 것을 말살시키려는’ 시기이다. 당시 공식적으로 한글 사용은 금지됐고, 출판되는 도서와 신문이 검열됐다. 창씨개명을 강요·강조 받았으며, 일본식 교육을 받았을 때다.
 
‘6.25’는 전쟁 당시 같은 한민족인 우리가 같이 총부리를 겨누고 싸울 때였고, 6·25 이후 남한의 삶은 근 몇 년간 궁핍했다. 필자는 이러한 시대적 배경과 박상옥의 화풍은 연관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1) 일제강점기

일제강점기에 일본은 우리나라의 모든 것을 말살시키려 했다. 그리고 당연히 당시 한국인과 일본인 사이의 계급도 존재했다. 이로 인해 일제강점기는 한국인 노동자들의 차별에 대한 반항, 한국인의 완전무장해제, 애국계몽운동에 대한 탄압 등등의 일들이 발생했다. 이를 보았을 때 과연 우리의 것을 보존할 수 있었던 시기였는가? 안타깝게도 당시에는 많이 잃어갔다. 이러한 잃음과 아픔을 박상옥의 작품에서 느낄 수 있다.
 
대표적으로 박상옥의 <한정>은 얼굴 묘사가 안 돼 있다. 그리고 전체적인 분위기 또한 담담하다. <한정>의 경우 남자아이가 토끼를 만지며 담담하게 있고, 가족들 또한 분위기가 담담해 보인다. 맨 아래에 있는 토끼가 어린 소녀에게 관심을 보이지만, 소녀는 토끼를 담담히 쳐다보고만 있다.
 
어린 시절 토끼나 귀여운 동물을 만지면 “까르륵” 웃으면서 엄마나 친구들에게 동물을 보여주며 같이 즐거워했다. <한정> 작품 속 상황 또한 충분히 즐거울 수 있는 분위기인데, 그러한 분위기가 전혀 보이지 않고, 담담함과 정적만 느껴진다. 이러한 담담함과 정적은 당대 사회 분위기에서 나온 것이다.
 

2) 6.25

6.25는 한민족의 아픔이 담긴 전쟁이다. 같은 한민족끼리 총부리를 겨누고 싸울 때였고, 6·25 이후 남한의 삶은 근 몇 년간 궁핍했다. 이러한 아픔과 슬픔을 그의 작품에서 느낄 수 있다.
 
박상옥의 <후방의 아이들>은 얼굴 묘사가 안 돼 있다. 남자아이 두 명에서 격정적인 ‘씨름’을 하고 있는데 주변의 친구들은 담담히 쳐다보고만 있다. 아이를 업고 있는 키 큰 소녀는 부모를 잃은 건가? 라는 우울한 생각이 들게 된다. 그리고 맨 위의 아이는 쪼그려 앉는데, 그 아이 역시도 ‘부모를 잃은 건가?’라는 생각에 우울함이 느껴졌다. 격정이 무시된 담담함, 우울함, 6·25 이후의 삶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해볼 수 있는 작품이다.
 
우리는 박상옥의 작품에서 얼굴이 묘사되지 않은 작품 두 점을 보았다. 필자가 보기에 얼굴이 묘사되지 않았던 이유는 박상옥은 ‘얼굴의 개념’으로 ‘본인의 심회’를 표현했기 때문이다.
 
‘얼굴’이란 무엇인가? 얼굴은 개인임을 알리는 ‘고유한 표식’이다. ‘고유한 표식’으로 우리는 주변 사람을 알아볼 수 있고, 개인으로서 존재함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얼굴이 없다면 어떨까? 좀 그로테스크하지만 누가 누구인지 알아볼 수 없다. ‘이 사람이 누구인지’, ‘평소에 나와 무슨 말을 했는지’, ‘이 사람이 어떤 사상을 가지고 어떤 행위를 했는지’ 짐작할 수 없고, 결국 타인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 알 수 없게 된다.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의 지배 아래에 있던 우리나라는 모든 생활양식이 일본식으로 바뀌었고, 한국의 고유함을 잃어갔을 때다. ‘6·25’도 마찬가지이다. 단일민족이 두 개로 나뉘어 하나의 고유한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결국 분단됐다.
 
전쟁 이전과 이후의 분단은 우리 민족의 협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다른 나라의 이익에 의해 결정됐다. 그리고 분단 이후 한국은 근 몇 년 동안 우리나라는 궁핍하게 살았으며, 실향민과 고아들이 많아졌다.
 
박상옥이 얼굴을 명확히 묘사하지 않은 까닭은 ‘피지배자인 우리나라 사람들’, ‘고유함을 잃어버린 우리나라 사람들’을 표현한 자신의 ‘심회적(心懷的)’6) 장치이기 때문이다.
 

왜 작품 내 한자를 사용했을까?

앞서 언급한 <한일> – 입춘대길, <유동> – 입춘대길 그리고 <후방의 아이들> – 북진통일이 사용됐다. 박상옥의 1954년 작품인 <한일>에서는 ‘입춘대길’이 쓰였지만, 1958년 작품인 <후방의 아이들>에서는 ‘북진통일’이 쓰였다. 이는 4년 사이 박상옥의 심경변화와 한자 글귀에 의미가 있음을 알 수 있다.
 

1) 일제강점기

박상옥의 <유동>에서는 ‘입춘대길’이라는 한자가 쓰였다. ‘입춘대길’은 입춘을 맞이하여 길운을 기원하며 벽이나 문짝 따위에 써 붙이는 글귀이다. 당시 어느 집에서나 볼 수 있는 문구이다.
 
<유동>의 ‘입춘대길’ 글씨가 너무 선명하게 있다. 이를 봄을 기다리는 아이들의 심정을 표현한다고 말할 수 있지만, 이는 분명 다른 의도가 있는 글귀라고 생각한다. 앞서 말한 ‘입춘대길’의 뜻은 ‘봄이 시작되며 좋은 운수를 기원함’을 의미한다. ‘입춘대길’ 글귀는 적어놓지 않았어도 <유동>은 완성된 그림이다. 그런데도 적어놓은 이유는 일제 치하에 있는 우리들의 삶이 ‘언젠가 봄이 오고 좋은 운수가 올 겁니다.’라는 의미로 보인다. 1939年 <유동>에서 이 글귀는 당시 작가의 심회가 드러났다고 생각됐다.
 
그리고 박상옥의 치밀함이 작품을 돋보이게 하는데 한몫했다. 당시 우리나라 모든 작품행위는 일제에 의해서 모조리 검열됐다. 하지만 박상옥은 당시에 어느 집에서나 쓰는 말로 검열을 피했다. 더 나아 가서 박상옥이 광복에 대한 염원을 표현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점을 통해 박상옥의 치밀함을 알 수 있다.
 
‘1954년’은 6.25 전쟁이 끝난 다음 해다. 당시 우리나라는 미국의 보호 속에서 성장했지만, 가난했던 시기였다. 따라서 이 시기의 ‘입춘대길’의 뜻은 ‘지금은 분단되었지만 우리는 합칠 수 있을 것이다.’ 또는 ‘지금은 우리가 잘 못 먹고 살지만, 나중에는 잘살 것이다.’라는 박상옥의 염원이다.
 

2) 6·25 이후의 삶

<유동>에서는 ‘입춘대길’이 사용됐지만, 4년 뒤 ‘그림 3’<후방의 아이들>에서는 ‘북진통일’이 사용됐다. 이는 박상옥의 심경에 변화가 있음을 의미한다.
 
분명 4년 전까지 ‘입춘대길’을 사용했는데, 4년 뒤 ‘북진통일’이 사용됐다. 이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우리나라 당시 시대상을 알아봐야 할 것 같다. 4년 뒤 <후방의 아이들>을 그릴 당시 한국 사회는 남북의 정치적, 물리적 사건 사고가 있었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는 북한을 배척하는 사회 풍조가 보였다. 따라서 ‘북진통일’의 뜻은 ‘같은 한민족이지만 다른 이념으로 북한을 배척하는 한국 사회를 비판하는 의도’로 비친다.
 
<한일>과 <후방의 아이들>이 그려질 당시에도 일제강점기 못지않게 검열이 심했다.7) 박상옥의 두 작품에서 ‘입춘대길’과 ‘북진통일’은 당대 많이 쓰인 용어이다. 특히 ‘북진통일’의 경우 1958년 당시 한국 사회에서 많이 사용된 단어다. 박상옥의 한자는 당대 많이 쓰인 글귀를 통해 국가의 검열을 피한 치밀함과 동시에 자신의 염원과 심회 즉 그의 얼과 사회풍자를 담은 장치임을 알 수 있다.
 

마치며

박상옥 화백의 작품에 얼굴 묘사가 명확히 안 돼 있는가와 한자가 쓰였는가를 쓴 이유는 그의 심회와 염원, 시대비판 및 풍자를 할 수 있었던 하나의 장치였기 때문이다.
 
박상옥의 일제강점기 때 작품의 분위기와 불명확한 얼굴 묘사에서 식민지 시절 한국인들의 삶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알 수 있고, 한자 글귀에서는 우리는 좋은 날을 맞이할 것이라는 박상옥의 심회와 염원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당시 많이 쓰인 글귀로 검열을 피한 박상옥의 치밀함도 볼 수 있다. 이러한 치밀함은 검열을 피해서라도 자신의 것을 보여주고 싶어 한 작가의 열정이다.
 
6.25 전쟁 이후도 마찬가지이다. 전쟁 이후 작품의 분위기와 불명확한 얼굴 묘사에서 ‘전쟁 이후 한국인들의 삶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알 수 있고, 한자 글귀에서는 그런데도 우리는 좋은 날을 맞이할 것이라는 박상옥의 심회를 알 수 있다. 그리고 한민족이지만 다른 이념으로 북한을 배척하는 한국 사회를 비판하는 의도를 통해 박상옥의 염원과 사회비판을 볼 수 있고, 앞서 말한 검열을 피한 치밀함도 볼 수 있었다.
 
그림은 우리에게 단순히 ‘아름다움과 추함’(美醜)만 알려주는 것이 아닌 당대 혹은 당시 상황에 관한 작가의 생각이나 시대상을 알 수 있는 소중한 역사자료이다. 우리는 글을 통해 통탄함을 느낄 수 있지만, 그림을 통해서도 통탄함을 느낄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박상옥의 작품은 살아있는 ‘역사 교과서’ 그 자체이다.
 
역사적 아픔과 자신의 심회를 작품에 잘 드러낸 ‘박상옥’은 앞으로도 연구가 되어야 하는 화백이라 생각한다.
 

추천 인물 : 에마뉘엘 레비나스, 장욱진
 

1) 박상옥. (n.d.). 네이버 지식백과.
2) 김현숙 외. (2004). <장욱진 – 화가의 예술과 사상>. 태학사
3) 김현숙 외. (2004). <장욱진 – 화가의 예술과 사상>. 태학사
4) 김현숙 외. (2004). 앞의 책. pp. 27~28
5) 한국미술평론가협회. (2009). 한국현대미술가 100인. 사문난적
6) ‘심회적’은 신항섭 미술평론가의 말을 참고했다. / 한국미술평론가협회. (2009). 한국현대미술가 100인. 사문난적
7) 국가보안법 제정, 해방 뒤에도 텍스트와 공연 현장의 동시적 통제, 사전검열과 사후검열 방식 등 일제강점기의 틀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 출처: “검열의 뿌리, 조선총독부로 거슬러 올라가”, <한겨레>, 2015-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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