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움, 김수영의 설움.

일러스트=토끼풀

 
‘설움’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마다 눈물로 지새운 밤들이 생각난다. 정말 별것 아닌 이유부터 남들에게 말하지 못할 아픔까지 지닌 그 밤들은 설움으로 가득하다. 환기되지 못한 설움은 눈물로 사라지지 않고 응결되어, 다시 그 자리에 남았다. 바쁜 삶에 정신을 팔고 설움을 외면하던 중에 ‘시인 김수영’을 주제로 비평모임을 가졌고, 김수영의 많은 시를 접하게 되었다.
 
「방 안에서 익어가는 설움」, 「긍지의 날」, 「헬리콥터」 등등. 유독 ‘설움’의 시어가 들어간 작품들이 눈길을 끌었다. 세 편의 시를 보면서 ‘감정적인 설움’은 거의 느끼지 못했지만, 처음으로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설움’을 ‘텍스트’의 형태로 살펴볼 기회를 갖게 되었다. 이번 글에서는 위의 세 편의 시를 통해, 얕게나마 보았던 김수영의 설움에 대해 되짚으려 한다.
 

방 안에서 익어가는 설움

                                                김수영
 

 
설움을 역류하는 야릇한 것만을 구태여 찾아서 헤매는 것은
우둔한 일인줄 알면서
그것이 나의 생활이며 생명이며 정신이며 시대이며 밑바닥이라는 것을 믿었기 때문에―
아아 그러나 지금 이 방안에는
오직 시간만이 있지 않으냐(3연)
 

 
이 밤이 기다리는 고요한 사상마저
나는 초연히 이것을 시간 위에 얹고
어려운 몇고비를 넘어가는 기술을 알고있나니
누구의 생활도 아닌 이것은 확실한 나의 생활(7연)
 
마지막 설움마저 보낸 뒤
빈 방안에 나는 홀로이 머물러앉아
어떠한 내용의 책을 열어보려 하는가(8연)

 
“설움을 역류하는 야릇한 것만을 구태여 찾아서 해매는 것은/우둔한 일인 줄 알면서”. 「방 안에서 익어가는 설움」의 3연에서 볼 수 있는 구절이다. 아무런 도움 없이 이 구절을 해석할 때 ‘야릇한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어, ‘야릇한 것’과 ‘우둔한 일’을 연관 지어 “기본적인 욕구에 충실히 하다.” 정도로 해석했었다. 시의 마지막 구절에는 ‘책’이라는 시어가 나왔기에, ‘책’을 ‘기본욕구’에 상반되는 ‘지적인 것’이고, “기본적인 욕구에서 벗어나 현실을 바라보려 하는 시도” 정도로 이해하며 위의 해석에 힘을 실었었다. 하지만 이 해석은 이후에 비평모임을 거치면서 완전히 달라졌다.
 
먼저 ‘역류’를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역류’는 국어 사전상에서 “물이 거슬러 흐름. 또는 그렇게 흐르는 물”이라는 뜻이다. ‘거스른다’라는 동작에 집중해 3연의 구절을 다시 보면 “야릇한 것만을 구태여 찾아서 헤매는 것은”, ‘설움을 거스르고 싶다’라는 의미가 된다. 그렇다면 설움은 어디서 오는가? 김수영은 시의 제목에서 ‘방 안’을 언급했다. 방 안, 즉 어떠한 상상이나 가상이 아닌 현실에서 설움이 오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김수영은 “지금 이 방 안에는/오직 시간만이 있지 않으냐”라고 말한다. ‘시간’은 시의 7연에서 다시 언급된다. “나는 초연히 이것을 시간 위에 얹고/어려운 몇 고비를 넘어가는 기술을 알고 있나니”. ‘시간’이라는 시어가 반복되는 만큼 이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시간은 계속해서 흐르며 돌아오지 않는다. 이러한 잔인한 속성 때문에 시간은 늘 ‘결핍’의 상태로 안긴다.
 
김수영은 결핍이 된 부분을 채우려고 ‘책’을 열어본다. “빈 방 안에 나는 홀로이 머물러 앉아/어떠한 내용의 책을 열어 보려 하는가” 하지만 김수영이 열어본 ‘책’도 현실의 산물이기에 또 다른 현실을 마주한다. 현실에서는 설움만 온다. 하지만 김수영은 반 안의 현실에서 ‘책’을 편다. 이 행위를 통해 설움을 회피하지 않고, 받아들이며 더 나아가려는 김수영의 태도를 볼 수 있다.
 

긍지의 날

                                                김수영
 
너무나 잘 아는
순환의 원리를 위하여
나는 피로하였고
또 나는
영원히 피로할 것이기에
구태여 옛날을 돌아보지 않아도
설움과 아름다움을 대신하여 있는 나의 긍지
오늘은 필경 긍지의 날인가 보다(1연)
 

그리하여
피로도 내가 만드는 것
긍지도 내가 만드는 것
그러할 때면 나의 몸은 항상
한 치를 더 자라는 꽃이 아니더냐(2연 일부)

 
두 번째로 살펴볼 시는 「긍지의 날」이다. “구태여 옛날을 돌아보지 않아도/설움과 아름다움을 대신하여 있는 나의 긍지”. 굳이 먼 옛날을 바라보지 않아도 피로는 어제도, 오늘도 있다. 김수영은 ‘설움’과 ‘아름다움’을 대신하여 자신의 긍지가 있다고 말했다. 피로의 원천이자 최종점은 긍지이다. 긍지를 위해 있어야 할 피로는 ‘내’가 만드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나오는 설움과 아름다움은 곧 긍지가 된다. 긍지는 ‘성장’이고 ‘내가 자라는 날’이다.
 
“모든 설움이 합쳐지고 모든 것이 설움으로 돌아가는/긍지의 날인가 보다”. 이 시에서 말하는 설움은 ‘긍지의 과정’에서 나오는 것이다. ‘긍지의 과정’을 ‘노력’으로 바꾸어 생각해보니, 그 깊이가 ‘무산된 노력’까지 닿게 되었다. 애석하게도 노력을 쏟아부은 일이 허무하게 무산될 때가 있다. 그 노력의 과정 자체가 성과가 되기도 한다는 말이 있지만, 이를 부정적으로 받아들이면 ‘성과’ 보다는 ‘실패’의 맛이 진해진다. 실패, 정말 무서운 말이다. 실패를 겪기 싫어 외면한 일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시도조차 하지 않았던 것들이 너무나도 많아, 실패를 두려워하는 ‘설움’까지 느끼기도 했었다.
 
어쩌면 실패에서 자유롭지 않은 사람은 ‘실패’보다 ‘설움’을 더 많이 지녔을지도 모른다. 김수영은 얼마나 많은 실패를 만났을까? 그는 ‘설움’을 느끼면서도 “피로도 내가 만드는 것/긍지도 내가 만드는 것”이라며 제 일에 최선을 다하는 태도를 보인다. 언제쯤 ‘실패에 두려워한 설움’을 끝내고 나의 ‘긍지’로 치켜세울 수 있을지, 그 시간은 여전히 까마득하다.
 

헬리콥터

                                                김수영
 
사람이란 사람이 모두 고민하고 있는
어두운 대지를 차고 이륙하는 것이
이다지도 힘이 들지 않는다는 것을 처음 깨달은 것은
우매한 나라의 어린 시인들이었다
헬리콥터가 풍선보다도 가벼웁게 상승하는 것을 버거
놀랄 수 있는 사람은 설움을 아는 사람이지만
또한 이것을 보고 놀라지 않는 것도 설움을 아는 사람일 것이다
그들은 너무나 오랫동안 자기의 말을 잊고
남의 말을 하여왔으며
그것도 간신히 더듬는 목소리로 밖에는 못해 왔기 때문이다.(1연 일부)
 

비애의 수직선을 그리면서 날아가는 그의 설운 모양을
우리는 좁은 뜰 안에서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항아리 속에서부터라도 내어다볼 수 있고
이러한 우리의 순수한 치정(癡情)을
헬리콥터에서도 내려다 볼 수 있을 것을 짐작하기 때문에
“헬리콥터여 너는 설운 동물이다”(2연 일부)

 
마지막으로 살펴볼 시는 「헬리콥터」이다. “헬리콥터가 풍선보다도 가벼웁게 상승하는 것을 보고 놀랄 수 있는 사람은 설움을 아는 사람이지만 또한 이것을 보고 놀라지 않는 것도 설움을 아는 사람일 것이다”. 처음 이 시를 접했을 때 가장 큰 의문은 ‘설움’과 ‘헬리콥터’의 의미였다. “우매한 나라의 어린 시인들”이 “오랫동안 자기의 말을 잊고 남을 말을 하여 왔”다는 구절을 보고 자유를 잃었음을, 그리고 그들이 헬리콥터를 보고 “너는 설운 동물이다”라고 말했음을 예측했다. 헬리콥터가 ‘설움’보다는 ‘자유’의 의미에 더 가까우리라 생각했지만, ‘헬리콥터가 설운 동물인 이유’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었다.
 
비평모임 이후에는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었다. 헬리콥터는 비상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속도가 느리고, 느린 속도 만큼 남에게 모습을 보여야 하므로 서럽다고 한다. 김수영은 이 설움을 “남을 보기 전에 네 자신을 먼저 보이는/긍지와 선의가 있다”로 승화시킨다. 비록 남에게 모습을 보이는 행위는 서러울지 몰라도, 그 행위 자체는 ‘긍지’와 ‘선의’로 볼 수 있다.
 
환기되지 못하고 응결되어버린 ‘설움’을 생각하고 있자면, 나에게 있어 진짜 ‘설움’이란 무엇인지 생각하게 된다. 눈을 뜨고 앞으로 걸어나가야 하는 사실 그 자체인지, 혹은 앞으로도 수없이 겪어야 할 실패인지, 또는 하늘을 향해 자유롭게 날아오르는 헬리콥터의 자취인지. 김수영은 설움을 해소하기 위해 방 안에서 책을 펴고, 실패를 긍지로 받아들이며, 자유롭지만 모든 것을 내비치고 비행하는 헬리콥터의 자취를 바라보았다. 언제쯤 김수영처럼 감히 설움을 환기할 수 있을지, 그와 닮은 구석이 없는 설움을 어떻게 해소할 수 있을지는 여전히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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