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정희의 〈완구점 여인〉이 보여주는 것들.
<완구점 여인>1)은 1986년에 발표됐다. 평론에 따르면, 작품의 시대는 1960년대 중반이다. ‘나’가 아버지와 함께 ‘부둣가로 바다 낚시를 다녔다고’ 말한 바 있는 것을 보면, 작품의 공간적 배경은 인천일 것이다.2) 그러나 이사간 곳은 어딘지 알 수 없다. 그동안 이사를 했다는 말이 없어 인천에서 일어났다고 생각해도 무방할 것 같다.3)
‘나’는 교실에서 학우들의 책상을 보고, “예순넷의 책상들이 모두 나의 차지“(p. 80)라고 표현했다. 그 다음 ‘나’는 책상 속과 그 근처에 있는 물건들 그리고 쓰레기통을 뒤지며 물건들을 음미했다. 여기서 궁금한 점이 생긴다. 그녀는 왜 쓰레기통까지 뒤졌을까?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금전적 가치가 목적이라면, 책상 속과 근처 물건들을 훔치면 된다. 쓰레기통까지 뒤질 필요 없다. 왜 그랬을까?
책에서는 먼저, 돈을 훔치는 것은 오뚝이를 사기 위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겠지만(“이러한 작업으로 나는 오뚝이를 사 모은다.”라고 서술되어 있다.), 발에 맞지 않는 덧신까지 훔치는 걸 보면 단순한 도둑질이 아니다.4) ‘나’의 전반적인 욕구 불만 상태를 드러내기 위한 묘사로 볼 수 있다.5) 그렇다면 어떤 욕구 불만 상태를 드러낸걸 까? 이는 타인과 소통하고 싶은 욕구 즉, 대화하고 싶어 하는 욕구이다.
영화 <캐스트 어웨이>에서 ‘척 놀랜드’는 사람이 아닌 배구공을 의인화시켜 ‘윌슨’이란 이름을 지어주고 대화를 하고 노는 모습을 보여준다. 마지막에 윌슨을 구해주지 못해 절망하는 모습도 모여준다. 이처럼 대화란 삶의 본성이다. “산다는 것은 대화에 참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중략) 자신의 전체를 말속에 집어넣으며 이 말은 인간 삶의 대화적인 직조물 속으로, 세계적인 심포지엄속으로 들어”6)갈 만큼 중요하다.
하지만 ‘나’에게는 대화의 단절 밖에 없다. 집에서는 계모가 자신을 못살게 굴고, 학교에선 선생이 ‘나’의 가방을 느닷없이 털어보기 때문이다. 집에서도 대화가 안 되고, 학교에서는 도둑으로 찍힌 ‘나’는 더 이상 가정과 학교에서 소통할 수 없었다. 누군가와 소통하고 싶은데 그럴 수 없게 외롭게 방치되어 있는 상태이다.7) “물건을 훔치다가 “나는 갑자기 이야기가 하고 싶어졌다.”라고 느끼는 것도 그 때문”8)일 것이다. ‘나’가 분필 토막을 들고 화장실로 가 “선생님 나쁜년, 엄마 나쁜년, 이라고 오래오래 낙서했”(p. 100)을 때, 누구와도 대화할 수 없는 ‘나’의 절규를 알아차렸다.
문학 평론가 김현은 오정희의 소설에서 ‘붉다’라는 말이 의미심장하다고 말했다. “‘붉다’라는 말은 피·불·노을 등과 금방 연결되는 어사다. (중략) <완구점 여인>을 조심스럽게 읽으면, 그녀가 왜 ‘붉다’라는 말에 그토록 집착되어 있는가를 짐작해낼 수가 있다.”9)
‘나’는 동생이 이 층에서 떨어져 죽은 것을 보았다. 이때 “그 동생이 죽는 장면은 붉은색으로 가득차 있다. 동생의 시멘트 바닥에 던져진 머리는 피투성이였고, 그가 손에 쥐고 있던 도화지에는 붉은 크래용으로 꽃이 그려져 있다. 그때부터 주인공의 의식 속에는 붉은색이 동생의 죽음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어 동생과 관련된 모든 것은 무의식중에 붉은색과 결부된다. (중략) 그녀가 사들이는 것도 언제나 붉은 오뚜기이다.”10)
이외에도 종소리 또한 중요 사건의 시발점이라 볼 수 있다. <중국인 거리>에서 수녀가 죽었을 때, 어머니가 산고의 비명을 질렀고 동시에 ‘나’가 초조(初潮)를 했을 때. <완구점 여인>에서 완구점 여인과 동성애를 했을 때 모두 ‘종소리’가 나왔다. 이로써 종소리는 중요 사건에 대한 시발점이라 볼 수 있다.
‘나’는 왜 완구점 여인을 사랑했을까? 그 이유는 ‘나’의 남동생을 완구점 여인에게 동일시했기 때문이다. 남동생과 여인 둘 다 다리를 사용할 수 없고, 휠체어를 타는 불구자다. “주인공은―‘나’는― 그녀의 동생과 동일시되는 여인과 여성끼리 동성애를 즐”11)겼다.
그녀의 완구점이 다방으로 바뀌었을 때, ‘나’가 알고 있던 완구점과 완구점 여인은 없어졌다. 즉 이제 동생의 모습을 여인에게서 찾아볼 수 없다. 동생과 동일시한 여인이 사라졌으니 더 이상 ‘나’는 사랑할 수 없다. 그래서 바뀐 그녀와의 추억(?)이 담긴 오뚜기를 버렸다.
그렇지만 ‘나’가 오뚝이를 없애는 것은 상실과 같은 부정적인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오뚝이를 수동적으로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주체적으로 버리”12)기 때문이다. “오뚝이를 없애 버려야겠다고 결심하는 것은 완구점 여인과의 관계 맺기가 불가능해지자 이젠 더 이상 타인과의 관계에 매달리지 않고 ‘홀로서기’에 나서겠다는 ‘나’의 결단인 셈”13)이다.
동생도 잃고, 사랑하는 여인도 잃고, 자신의 일상에 한 부분이었던 문구점도 잃게 되었다. 이 점에서 주인공의 삶은 충격 그 자체이다. 그렇지만 충격은 “허위의 관계가 벗겨진 곳에서 진정한 관계를 드러낸다.”14) 그렇기에 이제 주인공은 허위의 관계가 이루어진 세계가 아닌 진정한 관계의 세계로 들어간다(자신이 산 오뚜기를 다 버린 것도 그러한 의미일 것이다). 그렇게 주인공은 살아가고 성장한다. 이러한 의미를 전부 담은 <완구점 여인>은 대단한 작품이라 말할 수 있다.
「난 커서 양갈보가 될 테야. 매기언니가 목걸이도 구두도 옷도 다 준댔어.
손끝도 발끝도 저리듯 나른히 맥이 풀려왔다. 눈꺼풀이 무겁고 숨이 차 오는 건 방 안이 너무 어둡기 때문일까. 숨을 내쉴 때마다 박하 냄새가 하얗게 뿜어져 나왔다. 나는 베란다로 통한 유리문의 커튼을 열었다. 노오란 햇빛이 다글다글 끓으며 들어와 먼지를 떠올려 방 안은 온실과도 같았다. 나는 문의 쇠장식에 달아오른 뺨을 대며 바깥을 내다보았다. 그리고 다시 중국인 거리의 이층집 열린 덧문과 이켠을 보고 있는 젊은 남자의 얼굴을 보았다. 그러자 알지 못할 슬픔이 가슴에서부터 파상을 이루며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왜 그러니? 어지럽니?
이미 초록색 물의 성질을, 그 효과를 알고 있는 치옥이가 다가와 나란히 문에 매달렸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나는 이층집 창문에서부터 비롯되는 감정을 알 수도 설명할 수도 없었으며, 그 순간 나무 덧문이 무겁게 닫혀지고 남자의 모습이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유리 목걸이에 햇빛이 갖가지 빛깔로 쟁강쟁강 튀었다. 그 중 한 알을 입술에 물며 치옥이가 말했다.
나는 양갈보가 될 거야.」 – 오정희. <중국인 거리> 中.
1) 오정희 (2012). <중국인 거리>. 사피엔스 21 / 위 책을 인용할 때 소설 내용을 인용할 때만 이탤릭체&페이지 표시만 하겠다.
2) 오정희 (2012). 앞의 책. p. 107
3) 오정희 (2012). 앞의 책. p. 107
4) 오정희 (2012). 앞의 책. p. 109
5) 오정희 (2012). 앞의 책. p. 109
6) Mikhail Bakhtin (2006). <말의 미학>. (박종서 김희숙, 역). 길. p. 454
7) 오정희 (2012). 앞의 책.
8) 오정희 (2012). 앞의 책. p. 110
9) 김현 (2000). <문학과 유토피아>. ㈜문학과지성사. p.271.
10) 김현 (2000). 앞의 책. p. 271.
11) 김현 (2000). 앞의 책. p. 273.
12) 오정희 (2012). 앞의 책. p. 109
13) 오정희 (2012). 앞의 책. p. 109
14)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2015). 어린왕자(황현산, 역). 열린책들. (원본출판 1943년). p. 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