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는 아직 건강합니다

일러스트=토끼풀

 
마르크스가 죽은 뒤에도, 여러 사회과학과 전문의가 자본주의에 시한부 판정을 내렸습니다. 마르크스 교수에게 직접 배운 펠로우들은 계급 대립이 혁명을 일으킬 정도로 심해져서 자본주의가 사망할 것이라고 진단했습니다. 최근에 후배 펠로우들은 자본주의가 자신이 더럽힌 공기를 빨아들여서 사망할 것이라는 진단을 추가했습니다. 이들의 진단에 따르면, 계급 양극화와 기후 위기는 자본주의의 목숨을 위협하는 핵심 원인입니다.
 
마르크스와 그 펠로우들이 대린 시한부 판정은 19세기부터 비판받았습니다. 첫번째 비판자는 마르크스에게 직접 배운 펠로우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마르크스 사후, 엥겔스, 카우츠키와 함께 최고의 마르크스주의 이론가였던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은 마르크스의 시한부 판정에 오류가 있다고 진단해서 유럽 사회과학과 전체를 뒤흔들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이 받은 충격은 교황이 예수의 재림을 부정하는 것 같은 수준이었다고 합니다.¹

베른슈타인은 실증 근거로 마르크스와 펠로우들의 시한부 판정을 반박했습니다. 베른슈타인의 관찰에 따르면, 맑시스트 펠로우들의 진단과 다르게, 자본주의는 건강을 회복하고 있었습니다.
 
맑시스트 펠로우의 대표자였던 카를 카우츠키는 자본주의가 성장하면서 필연적으로 사회 전체가 극소수의 유산 계급과 최대다수의 무산 계급으로 양극화될 것이라고 예측했습니다. 그 때가 오면, 같은 이익을 공유하는 압도적 다수의 무산 계급이 민주적으로 정권을 차지하고 경제를 통제하는 상태, 즉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실현되리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자본주의가 스스로 계급 갈등을 키우고 무산계급을 투쟁 조직으로 결집시키면서 자멸한다고 본 것이었습니다.²
 
하지만 현실은 달랐습니다. 주식회사가 발달하면서 유산자와 무산자의 경계가 애매해 졌습니다. 높은 임금을 받는 전문직 종사자는 무산자보다는 유산자와 이해관계를 공유했습니다. 소상공인과 자영농, 공직자 같은 중간 계급도 꾸준히 성장했습니다. 무산자가 하나의 투쟁 조직으로 결집하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무산 계급은 계급 이익보다 국민 이익에 충성할 때가 많았습니다. 이는 1차 세계대전 때 수 많은 무산자가 외국 무산자를 적으로 여기면서 확실해 졌습니다.
 

“재산 소유자들이 증가하고 있다는 것은 더는 반박하기 어려운 사실이다.”

–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³

 
지금도 자본주의는 시간과 장소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변하며 생명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유럽의 자본주의는 꾸준한 계급 타협, 강력한 사회보장제도와 결합해서 굉장히 사회주의화되었고, 미국의 자본주의는 정부와 중앙은행의 경제 관리 기술이 발달한 덕에 위기에서 신속하게 빠져나오고 있습니다. 맑시스트 펠로우들은 심폐소생기가 억지로 숨을 붙이고 있을 뿐이라고 여기겠지만, 그런 것 치고 자본주의는 너무 건강합니다. 이런 상황을 볼 때, 자본주의가 반드시 계급 혁명을 자초해서 사망한다는 판정에는 분명 무리가 있습니다.
 
최근 전세계인에게 직접 피해를 주고 있는 기후 위기는 계급 양극화보다 더 선명하게 자본주의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기후 위기라는 공멸을 앞두고, 많은 사람들이 자본주의의 정당성을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자본주의가 약속한 풍요 자체를 내려놓자는 탈성장 담론까지 유행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기후 위기도 자본주의의 명줄을 끊기에는 약합니다. 자본주의는 기후 위기에도 유연하게 대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유럽 정부들은 자발적으로 환경 규제를 강화하고 신기술 개발에 투자하면서 깨끗한 공기를 되찾았습니다. 가장 먼저 스모그 현상을 겪은 서유럽은 지금 세계에서 가장 대기 오염이 적은 곳이 되었습니다. 깨어 있는 기업인들도 한몫했습니다. 선진적인 기업은 탄소 배출량 감소를 성과로 내세우며 기후 위기 대응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이 성과가 과장되었다는 비판도 있지만, 친횐경 기술을 개발하고 보급하는 주역이 기업이라는 점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산업 자본주의가 들어선 이후로 공기와 물이 더러워진 것은 사실이지만, 이런 문제를 순전히 자본주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조금 비겁합니다. 자본주의는 어디까지나 소비자를 위해 물건을 생산하는 경제 질서입니다. 경제 질서는 여러 사람들이 공모할 때에만 유지됩니다. 대다수가 환경을 무시하고 무절제하게 소비한 탓에 자본주의가 지저분하게 성장한 것이지, 자본주의가 다수에게 환경을 위협하는 제품을 소비하도록 강제했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19세기 영국 정부가 인도를 약탈한 이유는 목화를 원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었지, 기업이 사람들에게 억지로 목화로 만든 옷을 입히려고 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지금 자본주의는 자신이 어지른 것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바닷가에 원자력 발전소를 건설한 것도, 산 중턱에 풍력 발전기를 설치한 것도, 넓은 사막을 태양광 패널로 덮은 것도, 따지고 보면 자본주의입니다. 물론 기후 위기를 뒤집을 만큼 빠르지는 않지만, 정치적 선택에 따라서 나라마다 대기질을 조절하는 속도가 다르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 기후 위기 대응이 늦어지는 원인은 자본주의가 아니라 정치입니다.
 
게다가, 인간이 기후 위기를 일으켰다는 주장하기에는 섣부르다는 비판도 만만치 않습니다. 분명 세계 곳곳에서 일상적이지 않은 기후 현상이 나타나고 있지만, 그게 정말 종말을 예고하는 종소리인지, 그리고 인간이 자초한 일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습니다. 실제로, 유엔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인간은 허리케인이 더 가혹해진 데에 거의 양향을 미치지 않았습니다.⁴ 우리의 과학력은 기후를 다 이해하기에는 한참 부족합니다. 다 이해하지 못한 문제를 두고 명확한 원인을 찾는 것은 무리입니다. 기후는 분명 변하고 있지만, 그게 순전히 인간, 특히 자본주의 탓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습니다.
 
우리는 날씨가 아니라 날씨 때문에 삶의 터전을 위협받은 사람을 봐야 합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기후 위기를 멈춘다는 애매한 목표를 위해 자본주의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가 발달하면서 더 값싸고 안전한 제품을 더 폭넓게 공급하도록, 정부의 힘으로 경제적 불평등을 조절하고 인프라를 확대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기후 위기에 대응하는 법은 자본주의를 더 생산적으로, 그리고 더 사회적으로 발전시키는 것입니다.
 
베른슈타인이 이야기한 것처럼, 자본주의는 유연합니다. 그래서 강합니다. 현대 자본주의는 19세기 자본주의와 다릅니다. 사실상, 현대 경제는 민간 투자와 정부 계획이 결합된 혼합경제입니다. 그 혼합경제의 주도권이 누구에게 기울어져 있는가가 다를 뿐입니다. 스웨덴처럼 노사정이 공동으로 국민경제를 경영하는 곳도 있는가 하면, 중국처럼 정부가 다른 경제주체를 철저히 통제하는 곳도 있고, 미국처럼 기업과 정부가 서로 갈등하며 주도권을 주고받는 곳도 있습니다. 각국은 자신의 처지와 이념에 맞게 자본주의를 바꿔왔고, 덕분에 자본주의는 여러 위기에서 빠르게 회복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 자본주의를 악마화해서 공격하는 일이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바꾼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계급 양극화와 기후 위기는 자본주의를 무너뜨릴 수 없을 것입니다. 이미 다른 교수 밑에서 수련한 펠로우들이 자본주의를 멱살 잡고 살리고 있습니다. 거대한 혁명의 전제조건인 ‘하나의 이해관계에 대한 인식’이 사라지고 있는 요즘, 반자본주의라는 거대 담론은 힘을 얻기 어려울 것입니다. 더 나은 세상을 바라는 사람이 해야 할 일은 보다 일상적인 것들입니다. 보다 사회적인 정부를 선출하고, 정부 개입을 효율적으로 확대해서 경제를 잘 관리하는 것, 그리고 서로 경계심을 누그러뜨린 상황에서 차근히 다음 시대에 대해 논의하는 것, 이런 소소하지만 확실한 개혁이 반자본주의 담론보다 생산적일 것입니다.
 
1. 버먼, 셰리, 정치가 우선한다, 김유진 옮김, 후마니타스, 65p.
2. 코와코프스키, 레셰크, 마르크스주의의 주요 흐름 제2권, 변상출 옮김, 유로, 85p.
3. 버먼, 셰리, 정치가 우선한다, 김유진 옮김, 후마니타스, 67p.
4. 쿠닌, 스티븐, 지구를 구한다는 거짓말, 박설영 옮김, 한국경제신문, 1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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