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서울의 빛과 어둠과 네온사인
① 여는 글 : 당신들의 「멋진 신세계」, 서울은 디스토피아인가.
‘디스토피아’는 토마스 모어가 지은 소설의 이름이자 그가 그린 이상적인 세계의 명칭인 「유토피아」를 비틀어 절망적인 사회를 빗대는 표현이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끔찍한 세상”인데, 인간성의 실종이야말로 디스토피아의 핵심일 것이다.
그의 저서 유토피아를 통해 토마스 모어 자신이 꿈꾸던 아름다운 세계를 항변하고자 했던 것처럼, 디스토피아는 다양한 작품 속에서 정치적 가치관으로 결정되는 미와 추를 표현하는 정치적 수사의 일종으로 쓰인다. 그중에서도 우리가 보편적으로 받아들이는 디스토피아의 초상은 마치 성서 속 지옥의 형상이다. 직접적이고 말초적인 폭력과 탄압, 절대적인 빈곤과 착취로 인간성을 강탈당하는는 세계. 그러나 과연 그런 세계의 조각만 디스토피아라고 할 수 있을까.
올더스 헉슬리의 디스토피아 소설 「멋진 신세계」는 그 인식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또 다른 디스토피아의 모습을 도발적으로 보여준다. 작품 속 세계에서 물리적인 폭력을 행사하는 절대악의 권력은 없다. 인간은 어떠한 신분이라도 철저한 계획에 따라 공산품처럼 생성되고 소멸하는 삶에 만족하며 적절한 노동만 감당한다면, 육체의 쾌락을 당연한 권리로 누릴 수 있다.
“저항을 포기하면 주어지는 적절히 안락한 삶”은 넘어설 수 없는 장벽이었다. 사회에 대한 의심과 인간성에 대한 흥미를 보였던 버나드 마르크스는 주변의 환심에 취해 끝내 소아적 인물로 전락한다. 비록 생각의 틀은 “세계의 상식”에 기초하고 있지만, 비문명인 존에게 사랑의 감정을 가졌던 레니나 크라운은 끝내 살해당한다. 비문명인 존은 지켜왔던 인간성과 인간성이 부재한 세계의 괴리를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그러나 이런 인간성은 아름다움의 기준으로 느껴지기는커녕 철저히 사소하며 옹졸하게 느껴진다.
주어진 계급을 벗어나고자 하는 상승 욕구나, 연애와 결혼을 통해 가정을 꾸리고 사회를 스스로 꾸릴 수 있는 사랑의 권리, 성스러움을 추구하며 인격적 고양을 소망하는 일을 포기하는 것. 괴기스럽게 표현되지만, 대전쟁의 과오를 씻어내고 신세계 창조의 새로운 장을 연 소설 속 세계에서는 물리적인 폭력 없이 받아들여지는 상식이며 진실이다. 안정과 풍요로 다수의 행복이 영원하게 유지되는 멋진 신세계의 대안은 인간성을 최후에도 지키고자 했던 존도 대답할 수 없었다. 이쯤에서 하나의 질문을 던지자. 인간성을 포기한다면, 누구나 행복한 세상을 두고 우리는 선뜻 디스토피아라고 말할 수 있을까.
다시 이야기하자면, 디스토피아는 정치적 수사다. 정치적이란 것은 하나의 자의적인 가치체계에 의해 만들어진, 인위에 의한 선과 악의 판가름이다. 올더스 헉슬리는 인간성의 상실을 이상에 반하는 세상으로 보았기에, 이 작품은 디스토피아로 쓰일 수 있었다. 그러나 쓰기가 작가 나름인 것처럼, 읽기 역시 독자 나름이다. 지금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과연 멋진 신세계를 디스토피아라고 단호하게 말할 수 있겠는가?
「멋진 신세계」 속 세계정부가 세계대전의 처참한 폐허 속에서 만든 사회적 합의는 사소한 인간성의 거세를 통한 풍요와 안정이었다. 조금만 덜 생각해도, 사람이 죽을 일은 없다. 조금만 덜 발전해도, 누군가가 굶는 일은 없다. 올더스 헉슬리가 디스토피아라며 만든 세계는 그 세계에서 사는 사람들에게는 유토피아로 느껴질 수도 있다. 어차피 세상이 불완전하다면, 차라리 한 가지를 포기해서 다른 한 가지를 구하는 것이 더 나을 수 있는 셈이다.
“현대 서울”이란 도시도 그렇게 태어났다. 서울의 역사는 깊다. 멀게는 삼국시대부터, 가깝게는 직접적인 영향을 준 조선과 식민지 시대의 흔적까지 모두 서울에 남아 있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사는 서울의 모습은 1953년 이후에 만들어졌다. 전쟁으로 피난민이 떠나가고 쑥대밭이 된 서울의 전경이 펼쳐졌다. 일제 식민통치와 미군정 탓에 50년 간 그곳에 살아가던 서울에 사는 주민은 도시의 주인이 될 수 없었지만, 폐허가 되고 나서야 정말 오랜만에 서울은 주민의 손에 맡겨졌다. 이처럼, 서울은 최소한 반쯤 새로 만들어진 도시였다.
전쟁으로 완전히 허허벌판이 되어버린 한국의 중심, 서울은 이곳저곳에서 사람과 돈을 끌어당기며 “풍요와 번영”이라는 목표를 향해 담대히 전진했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이제 서울에는 높은 고층빌딩과 수많은 인파, 거대한 규모의 경제활동과 창조되는 문화의 박동이 존재한다. 폭격과 살상과 기아로, 그곳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오감이 괴로웠던 서울의 악몽은 사라졌다. 1950년대의 참상을 본 사람들에게는 2020년의 서울은 유토피아다. 그들에게 지금의 서울을 디스토피아라고 외치는 것은 과거를 부정한 비논리적인 궤변일 테다.
그렇다고 서울을 완전무결한 유토피아라고 할 수 있을까. 과거의 서울 사람 뿐만 아니라 현재와 미래의 서울 사람도 그 대답에 만족할 수 있을까. 철거민이 있던 자리에 세워진 고급 아파트, 노동자의 피를 먹는 대기업, 빠르게 돌아가는 도심 속에서 움직일 자유조차 없는 소수자들도 서울의 전경 속에 있다. 그들에겐 서울은 디스토피아고, 언젠가 무너져야 할 성벽처럼 느껴질 수도 있으리라. 이처럼 서울이 서 있는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의 경계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정치적이다.
지금부터 서울의 이야기를 시작해보려고 한다. 멋진 신세계의 존, 버나드, 레니나처럼 꺼져버리거나 스스로 꺾일, 이상을 향하는 잡념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누군가에게는 서울이란 도시에서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의 경계를 찾아내는 순간이 되기를 소망하며, 서울을 걸어보려고 한다. 서울의 빛과 어둠과 네온사인 속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