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만세운동 특집] 당신은 어디에서 왔나요?

일러스트=토끼풀

 
외국인이 묻는다. “Where are you from?” 만약 ‘우리 엄마 뱃속’이나 ‘지구’라고 답하면 이상한 사람 취급받을 것이다(공항 입국심사대라면 더더욱). 대신, 우리는 자연스럽게 이렇게 답한다. “I’m from korea.”
 
외국인과 만나는 순간부터, 우리가 평소에 의식하지 않던 우리의 정체성이 중요해진다. 정치적 망명 같은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우리는 개인이라는 신분으로 해외에 입국하지 않는다. 우리는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집단의 일원이다. 이 사실이 여권 하나로 국경을 건너게 해주는 신원 보증이자, 내가 어디서 왔는지, 어떤 사람인지 드러내 주는 이력서다. 세상은 각자의 정부를 가진 ‘국민들’로 나뉘어 있고, 사람들은 좋든 싫든 어느 국민에 속해 있는지로 서로를 파악한다.

‘나는 대한민국 국민이다.’
 
일상 속에서, 우리는 알게 모르게 이 국민 정체성에 따라 움직인다. 올림픽과 월드컵에서 우리나라 국가대표가 외국 선수와 경쟁하면, 우리는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우리 선수를 응원하러 나간다. 일본이나 중국의 정치인이 우리나라를 모욕하면, 우리는 자신이 모욕당한 것처럼 분노한다. 저녁 뉴스에서 방탄소년단이 해외에서 인정받는다는 소식을 접하면, 우리는 내가 인정받는 것처럼 기뻐한다. 이래도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사실이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런 일상을 지켜보면서도, 많은 사람들이 국민 정체성을 노른자 띄운 쌍화탕처럼 본다. ‘하나의 국민’이라는 의식이 세계화된 시대에는 더 이상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보다 극단적인 사람은 아예 국민 정체성을 싱크대에 쏟아버려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모두가 하나의 국민이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우리가 동남아 사람을 무시하고, 무슬림 사원 건설에 반대하고, 맹목적인 반일, 반미 정서에 휘둘린다는 것이다. 나라의 미래를 걱정하는 사람도 국민 정체성을 경계하기는 마찬가지다. 무슨 짓을 해도 출산율이 반등하지 않는 우리나라가 대규모 이민을 받으려면, 하나의 국민이라는 동질성을 버리고 다양성에 기반한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정말 국민 정체성을 가볍게 쏟아버릴 수 있을까? 우리가 하나의 국민이라는 생각을 공유하는 일에는 어떤 좋은 점도 없을까? 국민 정체성이 강해졌을 때 일어나는 문제가 국민 정체성이 약해졌을 때 일어나는 문제보다 심각할까?
 
국민 정체성을 비난하는 사람들은 국민 정체성이라는 기둥 표면에 자란 곰팡이만 볼 뿐, 그 기둥이 떠받치는 천장을 외면한다. 국민 정체성은 자유민주주의나 복지국가처럼 우리가 누리는 좋은 것들을 알게 모르게 지탱한다. 지금까지 너무 당연해서 의식하지 못했을 뿐, 모든 자유민주주의와 복지제도는 국민국가를 토대로 성장했다. 미국의 건국 아버지들은 많은 공통점을 공유하는 국민을 전제하고 새 정부를 꾸렸고, 북유럽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은 국민적 이익에 호소하며 복지국가를 건설했다. 모든 나라는 주로 자국민에게 투표권을 주고 복지혜택을 준다. 국경 밖 모든 사람에게 동등하게 권리를 보장하고 예산을 지출하는 나라는 없다.

“나는 신께서 하나로 연결된 이 나라를 하나로 결속된 인민에게 기꺼이 주셨다는 사실을 기쁘게 떠올리곤 한다. 이들은 같은 조상의 후손이며,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같은 종교를 믿으며, 같은 통치 원리를 따르고, 예절과 관습도 아주 비슷하다.”

– 존 제이, 미국 초대 대법원장¹

대체로, 사람은 낯선 사람이나 이방인보다 같은 집단 구성원을 더 신뢰한다. 여러 연구에 따르면, 우리는 아주 어릴 때부터 자신이 어느 집단에 속해 있는지 파악한다. 의도하지 않아도, 우리는 국기 같은 상징이나 피부색, 언어 습관, 음식 등을 공유하는 사람을 자연스럽게 같은 집단 구성원으로 인식한다.² 이런 인식이 한 번 자리잡으면 쉽게 바뀌지 않는다. 무리지어 생활하는 동물인 인간은 집단이라는 범주로 타인을 파악한다. 그리고 같은 범주에 속하는 이웃에게 친밀감과 애착을 느낀다. 이런 ‘내집단 편향’은 지금까지 안전을 보장해 준 전략이었다. 우리는 안전을 위해 집단에 소속되고 싶어하고, 소속된 집단을 지키려 한다. 이런 본능이 가족과 부족을 넘어서 가장 넓게 확장된 것이 바로 ‘국민(Nation)’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복지국가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다문화주의도 함께 지지하는 경향이 있지만, 둘은 모순될 수 있다. 우리는 서로를 가족처럼 여길 때 좀 더 가진 것을 내어 줄 수 있다. 실제로, 선진적인 복지국가는 하나 같이 국민 정체성이 강한 곳이다. 프랑스인의 국민 자부심은 유명하고, 북유럽 사람들의 동질성도 마찬가지다. 네덜란드도 최근에는 국경을 강화하고 있고, 영국도 마찬가지다. 복지국가는 내가 속한 집단의 구성원을 돕기 위한 것이었지, 생판 모르는 남을 돕기 위한 것이었던 적이 없다. 실제로, 인종 갈등이 심한 미국은 여전히 복지국가로 발전하지 못했다.³ 미국 내에서도, 인종 갈등이 심한 곳일수록 복지 혜택이 적다.⁴
 
역사를 보면, 하나의 국민 정체성이 약하고 다양한 국민집단이 공존하는 나라가 평화롭고 안정적인 사회를 유지한 사례는 거의 없다. 공산당의 강력한 힘 밑에 억지로 통합되어 있던 유고슬라비아는 공산당이 무너지자 마자 여러 소수 민족으로 분열되어 내란을 겪었다. 그게 바로 코소보 전쟁이다. 최근에는 시리아와 아프가니스탄이 비슷한 일을 겪고 있다. 두 나라 역시 하나의 국민 정체성을 공유하지 못하고 다양한 민족이 공존하는 곳이다. 세계적인 정치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이야기한 것처럼, 다양성이 무조건 좋은 것만은 아니다. 다양성은 혁신과 창조가 아니라 끝 없는 갈등과 체제 붕괴를 초래할 수 있다.⁵

“이민족으로 구성된 나라에서는 자유로운 정치제도가 거의 불가능하다. 상호 유대감이 없는 사람들, 특히 서로 다른 말을 쓰는 경우, 대의정부 작동에 필수적인 사람들의 통일된 생각이 존재할 수가 없다.”

– 존 스튜어트 밀⁶

선진적인 자유민주주의 국가이자 세계에서 가장 튼튼한 복지국가인 덴마크는 국경이 높은 곳이다. 전통적으로 덴마크인은 같은 덴마크어를 쓰고 같은 루터교를 믿으며 굉장히 동질한 덴마크 문화를 지켜왔다. 덴마크는 이런 동질함을 지키는 데에 진심이었다. 1990년대에 동유럽과 중동 사람이 대규모로 이주해 왔을 때, 스웨덴과 이웃나라들이 국경을 활짝 여는 동안, 덴마크는 주변국가들의 비난을 감수하면서 국경을 닫았다.⁷ 그 결과, 스웨덴과 이탈리아 등이 극우파의 준동과 문화 갈등 탓에 고생하는 동안, 덴마크는 그런 혼란을 멀찍이서 바라보고 있다. 현대 유럽의 혼란을 보고도, 덴마크가 틀렸다고 단정지을 수 있을까?
 
어느날 갑자기 모르는 사람들이 우리 집에 들이닥쳤다고 생각해 보자. 그런 상황을 편하게 느끼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내 집에 애착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낄 법한 불안감과 분노를 외부자 혐오라고 불러도 될까? 다른 동물들처럼 자기 영역을 소중히 여기는 인간은 자신이 사는 집에 애착을 가져서는 안 되는 걸까? 우리 집에 생판 모르는 타인이 들이닥쳐서 불편하다면, 불편함을 느끼는 자신이 아니라 갑자기 들이닥친 타인을 탓해야 하지 않을까? 낯선 것들이 갑자기 들이 닥칠 때, 내 집, 내 영역, 내 나라가 위협받는다고 느끼는 것은 전근대적인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것이다. 다시 말해, 인종 차별과 외국인 혐오를 조장하는 것은 우리 내면에 뿌리 내린 국민 정체성이 아니라, 국민 정체성이라는 엄연한 현실을 무시하고 무리하게 설계된 개방 정책이다.
 
국경을 빠르게 열고 싶어하는 세계시민주의자, 다문화주의자는 우리에게 과도한 것을 요구하는 걸지도 모른다. 사람은 누구나 무한히 관용적일 수 없다. 누군가가 개방적이라고 해서 모두가 개방적이어야 한다는 법은 없다. 모든 사람이 모든 차이를 극복하고 하나가 되기란 매우 어렵다. 국제적이었다는 로마 제국도 실패한 일이고⁸, 현대 미국도 아직 성공하지 못한 일이다. 마틴 루터 킹이 행진하고 반 세기가 지난 지금도, 미국에서는 인종 갈등이 정치의 핵심 이슈다.|
 
물론, 국민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에도시대 일본처럼 쇄국 정책을 펴자는 뜻이 아니다. 나치처럼 이민자를 모조리 죽여버리자는 뜻도 아니다. 내 나라가 소중한 사람이라면, 내 나라의 이익에 전혀 도움되지 않는 정책을 고르지 말아야 한다. 나라의 이익을 생각하면, 우리는 장기적으로 적절히 국경을 열어야 한다. 나라가 소멸되지 않게 적절히 이민을 받아야 하고, 국제 사회에서 책임 있는 나라로 인정받기 위해 통제가 가능산 선에서 난민을 받을 준비를 해야 한다. 지금까지 외국인을 향한 과도한 혐오가 도움이 된 적은 거의 없다.
 
우리는 자신이 속한 집단을 사랑하지만, 그 집단은 고정불변하지 않다. 먼 미래에, 우리는 동남아, 중국, 일본 문화와 결합한, 새로운 대한민국 사람이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국민 정체성은 사라지지 않지만, 그 내용은 변할 수 있다.
 
다만, 그런 융합을 이뤄내려면 속도를 조절할 필요가 있다. 이상적인 사람들은 우리가 당장이라도 동질한 환경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고 여기지만, 낯선 것에 적응하는 데에는 시간이 걸리는 법이다. 예로부터 인심은 곳간에서 난다고 했다. 그 관용적이라는 유럽인들도 장기간의 경제 위기를 겪는 동안 관용을 많이 잃었다. 하물며 주요국 중에서 불평등도 심각하고, 불행하다고 느끼는 사람도 많고, 복지지출도 부족한 우리나라가 다짜고짜 국경을 연다면, 모스크 건설 현장 앞에서 수육 파티를 여는 것으로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사회 통합은 그 속도가 느리고 통합 대상 규모가 작을 때 보다 쉽게 이뤄진다. 이는 유입 인구를 더 줄여야 한다는 주장의 합리적 근거가 된다.”

– 데이비드 굿하트⁹

기회를 찾으러 오는 외국인과 난민을 보는 따뜻한 시선으로, 당장 먹고 살기 힘들어서 예민해 질 수 밖에 없는 우리 국민의 마음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모두가 글로벌 시대에 익숙한 고학력 – 고소득층처럼 생각할 수는 없다. 그럴 기회를 가진 사람은 많지 않다. 지금 세계 곳곳에서는 애국적, 국민주의적 열정이 되살아나고 있다. 그것도 가장 세계화된 나라 한복판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 현실적인 사람이라면, 국민 정체성의 가치와 무게를 부정하기 어렵다.
 
우리는 앞으로도 대한의 아들딸일 것이다. 미국인은 미국 국민일 것이고, 일본인은 일본 국민일 것이다. 조금 변동이 있더라도, 세계지도는 계속 국민국가들을 나누는 경계선으로 꾸며질 것이다. 그 속에서 우리가 할 일은 우리 고향, 우리 조국을 지키려는 마음과, 다른 국민과 잘 어울리려는 마음 사이에서 타협안을 찾는 것이다. 국민 정체성은 호불호가 크게 갈리는 쌍화탕이 아니다. 우리가 사는 데에 필요한 생수다.

“경제적 이득을 위해서든 외계인 방어를 위해서든 인간 사회들이 서로 의지할 때라 해도, 차이점의 무게감이 감소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시 말해 전 세계 사람들이 인류 전체와 하나로 연결된 느낌을 가질 것이라는 범세계주의 관념은 하나의 몽상에 불과하다.”

– 마크 모펫10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참고문헌

1. 제이, 존, 연방주의자 2번, 페더럴리스트, 박찬표 옮김, 후마니타스, 2019, 25p.
2. 모펫, 마크, 인간무리, 김성훈 옮김, 김영사, 2020, 280p.
3. 알레시나, 알베르토, 복지국가의 정치학, 전용범 옮김, 생각의 힘, 2012, 227p.
4. 알레시나, 알베르토, 복지국가의 정치학, 전용범 옮김, 생각의 힘, 2012, 246p.
5. 후쿠야마, 프랜시스, 존중받지 못하는 자들을 위한 정치학, 이수경 옮김, 2020, 209p.
6. 밀, 존 스튜어트, 대의정부론, 존 스튜어트 밀 선집[전자도서], 서병훈 옮김, 책세상, 2021.
7. 힐슨, 메리, 노르딕 모델, 주은선 김영미 옮김, 삼천리, 2010, 224p
8. 모펫, 마크, 인간무리, 김성훈 옮김, 김영사, 2020, 549p.
9. 굿하트, 데이비드, 엘리트가 버린 사람들[전자도서], 김경락 역, 원더박스, 2019.
10. 모펫, 마크, 인간무리, 김성훈 옮김, 감영사, 2020, 57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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