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여성의 날 특집] 남성성과 여성성이 무의미해질 때
나는 대한축구협회 KFA에 동호인 축구선수로 등록되어 있다. 매주 두 번씩 축구연습을 하고 경기도 뛴다. 나는 여성이다. 내 친구는 외출할 때 꼭 화장을 한다. 운동처럼 몸 쓰는 일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 친구는 남성이다.
2021년 이후 여성 예능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2021년 당시 ‘스트릿우먼파이터’가 성공을 거두고 ‘골때리는그녀들’이 여성축구를 다루면서, 그동안 대중매체에서 거의 다루어지지 않았던 분야의 여성들과 다큐 같은 날 것의 모습이 시청자들에게 신선함을 주었다. 흔히 ‘여성들이 이런 걸 한다고?’라고 여겨지는 분야의 여성 예능들이 성공을 거두면서, 불편함을 느끼게 하던 성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는 모습들로 정착을 하게 되었다.
1. 성차별과 갈등은 성별 이분법적인 사고에 기초하고 있다.
사실, 지금까지 제작자와 소비자 모두 꾸며지고 정형화되어 수동적인 여성성을 강조하는 형태로 여성 중심의 TV프로그램과 예능을 소비해왔다. 대표적으로 여성 아이돌 프로젝트 ‘프로듀스101’은 여성을 성상품화해 전시해놓은 것처럼 보이는 면이 많았다. 2016년에 방영되었으니 불과 7년 전인데, 당시 네티즌과 몇몇 기사들을 통해 비판을 받았음에도 전국적으로 인기를 끌었던 것을 보면 여전히 여성에 대한 기대치나 시선이 어느 정도에 머물렀는지 짐작해 볼 수 있다.
나 또한 어린 시절, 여성성이라는 굴레에 갇혀 살았다. 여성으로서 어떻게 사고하고 행동해야 하는지 사회에서 정해놓은 모습을 갖추려고 애를 쓴 것이다. 그러나 소위 말하는 남성성이 나에게도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른이 되어 사회생활을 하면서, 여성이지만 남성적인 면들도 가지고 있는 나의 모습이 타인에게는 부자연스럽게 여겨질 수 있음을 경험했다. 사회가 정해 놓은 여성이라는 틀에 ‘나’라는 개인은 완벽하게 맞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인식한 것이다.
내가 남성성을 가지고 있다는 말은 여성임에도 스스로를 남자처럼 느낀다는 의미는 아니다. ‘나’라는 존재는 사회 안에서 여성적인 모습과 남성적인 모습이라는 고착화된 틀로 재단을 받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정해진 성별과는 다른 생각과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못마땅해 하고 불편해 한다. 남녀의 구분은 끊임없이 나를 고통 속에 몰아넣었다. 남자였다면 겪지 않았을 차별과 편견들로 인한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예를 들어 여성이 아이를 양육하는 것이 당연시 되는 것, 여자여서 감히 외박은 꿈도 못 꾸는 것, 여성은 몸 쓰는 일, 험한 일은 잘 하지 못하고 피하려고 한다는 편견 같은 것 말이다. 사회구조와 대중문화를 통해 만들어진 여성성과 남성성이라는 구분으로 인해, 본인에게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처럼 불편함을 느낀 이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반대로 여성성을 타파하자는 움직임도 불편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화장을 하지 않을 때도 있지만 스스로를 꾸미는 것 자체를 좋아하기에 화장을 하고 헤어스타일을 바꾸며 기분을 전환하고, 어떤 목적 달성을 위해 옷을 골라 입기도 하는 행동이 꾸밈노동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여성운동에 반하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꾸미는 행위 자체는 죄가 없다. 외모를 통해 사람들을 판단하는 시선이 문제인 것이기에, 꾸미거나 꾸미지 않는 것 자체를 판단하는 사람들의 시선을 비판하는 것이 옳다.
나는 여성성과 남성성이라는 굴레 속에 갇혀 있을 필요가 없음을 깨달았고, 나의 행동을 억압하지 않는 진정한 자유를 경험했다. 그러나, 내가 속한 일부 공동체는 그런 나를 자연스럽게 받아 들였지만, 어떤 공동체는 나를 부적절하게 인식했다. 사회적 인간으로서 나를 꾸며내야 할 필요성을 다시 느끼게 된 것이다.
2. 남성성과 여성성이라는 것은 허상이다.
작년 한 해 동안 ‘성소수자를 위한 장례예식서’ 프로젝트를 함께 준비하고 올해 2월에 시연회로 마무리 했다. 이 프로젝트에서 가장 많이 고민하고 토론했던 것 중 하나가 차별적인 단어와 성별이분법적인 어휘를 빼고 바꾸는 작업이었다. 성소수자 문제와 페미니즘, 젠더 문제가 보통 함께 다루어지는 이유는 우리가 관습적으로 성별이분법적인 사고를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필연적으로 사회적 남성과 여성이라는 구분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이 겪는 갈등상황은 훨씬 더 많다. 가끔씩 말버릇처럼 여성 남성의 구분이 없어졌으면 좋겠다는 말을 하곤 한다. 여성성과 남성성이라는 것은 분명 존재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우리가 이름을 그렇게 붙이고 정의했기 때문이다.
태초부터 인류는 ‘구분하고 분류하는 작업’을 계속 해왔다. 아마도 언젠가 공동체성, 개별성 등 다른 말이 남성성과 여성성이라는 말을 대체할 날이 올지도 모른다. 최근에 MBTI가 유행하는 것처럼 말이다. 성소수자를 포함해 우리는 서로를 ‘별난이들’이라 지칭한다. 개인들의 개별적인 특성이 모두 다 다른데, 사회가 구분 지어 놓은 젠더의 특성과 역할이라는 것은 지극히 좁은 시선으로 바라 본 인간의 일면일 뿐이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남성과 여성의 일을 구분한 적이 없는데, 실질적으로 아이들은 그런 구분을 하지 않고 자랐다. 하지만 학교를 다니고 인터넷 매체를 접하면서 아이들은 사회가 구분 지어 놓은 젠더의 역할을 배웠고, 대화를 할 때 가끔씩은 나보다 아이들이 더 성별이분법적인 사고를 하고 보수적인 면을 보이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큰 딸의 최근 꿈은 군인이다. 가정에서 보고 듣고 배운 것과 대중매체 속의 달라진 여성과 남성의 이미지가 이런 꿈을 꾸게 하는데 한 몫 했으리라 생각한다.
반대로 막내는 이미 두 살 부터 꾸미는 것에 관심이 많았다. 딸 셋 중 유일하게 막내만 내가 화장을 할 때 옆에서 구경을 하고 화장품을 만지는 아이였다. 일곱 살까지 꿈이 메이크업 아티스트였다. 딸만 셋이다 보니 여성성이라고 정의하는 것에는 하나도 맞지 않고 제각각의 특성을 가지고 있는 아이들을 보며 개인의 특성은 성별로 구분할 수는 없다는 것에 더 확신을 가졌다. 만일 사회가 성적 고정관념을 주입하지 않는다면 아이들은 더 창의적이고 다양성을 가진 개인들로 자라날 것이다.
3. 성차별은 권력관계에서 형성된다.
최근, 책 [젠더의 아름다움]을 읽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활동에 참여했다. 젠더 화해 프로그램의 한국판이라고 할 수 있는 ‘GERY북클럽’을 통해 다양한 여성과 남성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내가 겪은 번민을 많은 이들 또한 겪고 있으며, 성별 차이에서 오는 차별과 어려움들에 대해 여러 성적 정체성을 가진 분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공통적으로 모아진 생각 중 하나가 성차별은 권력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이었다.
개인의 능력과 상관없이 여성이라는 이유로 커피를 타고 청소를 맡는다. 실제 업무와 상관없는 일을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남성 또한 마찬가지다. 사회복지나 아동교육 쪽에서는 남성이 차별을 받을 때가 많다. 남성이 권력을 가지고 있는 여성 상사에 의해 성희롱을 당하기도 한다. 업무 분야에 따라 남성과 여성이 개인의 역량과 상관없이 편견과 먼저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직장이 아닌 가정에서도, 권력이 없는 여성은 권력을 가지고 있는 남편이나 시댁으로부터 차별과 억압을 당하게 된다. 반대로 여성이 주도권을 가지고 있다면 매 맞는 남편, 착취당하는 남편이 된다. 양가 중 더 힘 있는 쪽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 일상에서는 권력형 성폭행처럼 권력형 성차별이 흔히 일어난다.
아직까지도 사회적으로 남성이 여성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사건이 더 쉽게 발생하고 그 비율도 높은 것이 사실이다. 그 원인을 생각해 보자면, 보통 힘의 위계에서 남성이 권력을 쥐고 있기 때문에 여성이 더 약하다는 사회적 편견을 갖게 되고, 여성은 쉽게 범죄의 표적이 된다. 남성이 여성을, 성인이 아동을, 젊은이가 노인을 학대하는 것은 모두 힘의 위계에 의한 것이다.
만일 학창시절 여자아이들과 남자아이들이 함께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고 힘겨루기를 하며 바느질과 요리를 배우고 성별과 나이의 구분 없이 서로를 존중하는 방법들을 배운다면 어떨까? 무조건 여성은 약하고 남성은 강하다는 편견과 나이로 인해 생기는 위계가 어느 정도 해소되지 않을까? 성별에 따른 구분이 필요 없고 힘 있는 사람이 권력을 휘두르지 않을 때 더 평등한 조직이 된다.
4. 젠더 화해는 가능하다.
한 사람의 내면에는 사회가 구분해 놓은 남성성과 여성성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져 있다. 젠더 구분으로 인한 차별의 역사는 이제 여성만의 것이 아니다. 여성도 남성도 젠더의 정해진 역할로 인해 모두 고통을 받고 있다. 여성이나 남성이라는 성별로 규정될 수 없는 사람들과 그런 구분을 원치 않는 사람들 또한 마찬가지다. 성차별로 인한 문제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남성과 여성이라는 기존의 성별이분법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개인과 인간, 각자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권력에서 오는 폭력이 발생하지 않도록 공동체적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성평등은 성에게 특정역할을 부여하지 않으며 개인의 다양성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젠더 화해로 가는 결정적 전환은 개인이 ‘다른’ 사람, 다른 젠더의 고통을 자기 자신의 경험처럼 받아들이는 순간 일어난다. 젠더 화해는 모든 인간이 하나라는 실용적이고 보편적인 깨달음의 길을 보여준다. 마음은 상대방과 공감으로 동일시될 때 녹아내린다.
참가자들의 종교, 문화적배경, 철학적신념, 영적 성향과 상관없이 젠더 치유를 통해 이러한 깨달음이 촉진될 수 있다. 사람의 마음은 보편적이고, 그 마음이 열릴 때 결합이 생겨난다. 이런 순간에는 그 사람의 종교, 신념, 젠더 정체성, 직업, 교육 수준이 문제되지 않는다.”
젠더의 아름다움 p.219
나는 젠더 화해 작업을 통해 모든 인간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과 서로 화해하고 사랑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열린 대화와 포용, 서로를 존중하고 연민하는 마음으로 시작되는 이해와 사랑이 우리의 갈등을 극복할 수 있는 열쇠가 될 것이다. 다소 생소한 젠더 화해는 성별을 뛰어넘어 서로를 받아들이며 남녀와 세대로 갈라져 싸움을 반복하는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여기에서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 중 하나로 여겨지는 공감은 단지 타인의 생각이나 경험에 동의하고 자신과 동일하게 여기는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올바른 공감이란 상대방이 겪었을 느낌을 그대로 인정하고 타인의 충족되지 않은 욕구가 무엇인지 알아차려 주는 것이다. 어쩌면 타인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과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다르다는 것을 확인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모든 것이 무의미해 질 때, 우리가 서로를 무언가로 규정하지 않을 때, 비로소 우리는 있는 그대로 서로를 대할 수 있다. 여성과 남성을 화해로 이끌어 남녀가 아닌 주체적인 한 인간으로서 스스로를 규정하는데 불편함이 없으며, 여러 가지 정체성으로 구분 짓고 차별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속에서 각자를 있는 그대로 마주보고 대하는 세상이 오길 간절히 바란다.
옳고 그름의 생각 너머에 들판이 있다.
그곳에서 당신과 만나고 싶다.
영혼이 그 풀밭에 누우면
세상은 더없이 충만해 말이 필요 없고
생각, 언어, 심지어 ‘서로’라는 단어조차
그저 무의미 할 뿐.
옳고 그름의 생각 너머 – 잘랄루딘 루미
참고자료.
젠더의 아름다움, 윌리엄 키핀, 신시아 브릭스, 몰리 다이어 지음, 정하린, 이순호 옮김
더 나은 관계를 위한 대화훈련, 용기와 회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