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in Movie] 딜리셔스, 맛의 민주화


맛의 민주화

ㅡ 《딜리셔스》, 첫 프랑스 레스토랑에 대한 놀라운 이야기
 

《딜리셔스》(2022), 출처: Rotten Tomatoes

 
‘딜리셔스’, 모두를 위한 좋은 요리

영화《딜리셔스(Delicious)》는 최초의 프랑스 레스토랑이 어떻게 등장했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18세기 프랑스혁명을 배경으로 음식, 맛의 즐거움, 평등에 대한 이야기를 코믹하고 유쾌하게 풀어낸다. 밝고 화려한 성의 인테리어, 촛불이 어른거리는 따뜻한 호박색 실내와 함께 한여름의 푸름, 단풍색 가을, 희부연 겨울 안개, 눈 풍경으로 시시각각 변화하는 아름다운 자연은 옛 명화 몇 점을 보는 듯한 즐거움을 준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관객은 바쁘게 돌아가는 주방을 지휘하는 마스터 셰프 피에르 망스롱을 발견한다. 샹포르 공작의 주방은 요리사들의 부산한 움직임과 소음, 활기로 에너지가 넘친다. 피에르는 샹포르 공작의 개인 셰프다. 그는 뼛속까지 특권의식에 절은 공작과 귀족 손님들의 만찬을 위해 오트 퀴진(Haute cuisine, 최고의 고급 요리)을 준비하고 있다. 잘난 척하는 자칭 미식가들은 피에르가 정성껏 만든 요리를 맛보며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그러더니 갑자기 ‘딜리셔스’라고 이름 붙인 그의 창의적인 디저트를 조롱하기 시작한다. ‘딜리셔스’는 밀가루, 계란, 버터가 끈적끈적한 반죽으로 변할 때까지 손으로 주무르고 성형한 후 조심스럽게 자른 감자와 트러플 조각으로 채운 한입 크기의 감자 타르트였다. 당시 감자는 아일랜드 같은 빈곤한 나라 사람들만 먹거나 말, 소, 돼지 등의 가축 사료로 쓰이는 작물이었다. 대부분의 유럽 지역에서 감자는 식재료가 아니었다. 피에르가 굴욕을 당한 것은 이 금기를 깼기 때문이다.

1789년 프랑스혁명 이전, 미식요리는 전적으로 귀족의 영역이었다. 실제로, 명문가의 명성은 식탁의 품격이나 수준과 상당히 연관돼 있었다. 손님들의 악평 세례를 받자, 가문의 품위가 손상되었다고 생각한 공작은 피에르에게 ‘딜리셔스’에 대해 사과하라고 명령한다. 그는 굴복하지 않았고 결국 해고된다. 자신의 새 요리에 긍지를 가졌기 때문에 셰프로서의 자존심을 굽히기 싫었던 것이다. 일자리를 잃은 피에르는 낡고 허름한 주막에서 아들 뱅자맹과 함께 여행자에게 야채수프같이 간단한 요깃거리를 팔며 생계를 유지한다. 실의의 나날을 보내던 어느 날, 미스터리의 여성 루이즈가 찾아와 그에게 요리를 배우고 싶다고 한다(그녀는 샹포르 공작 때문에 남편을 잃고 그에게 복수하려는 공작부인이다). 
 
처음에, 피에르는 ‘요리는 남자의 일’이라며 그녀를 신임하지 않았으나, 루이즈는 그가 절망을 극복하고 다시 요리사의 꿈을 꾸도록 영감을 불어넣는다. 그녀는 훌륭한 요리와 서비스를 제공하는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레스토랑을 만들자고 제안한다. 피에르는 루이즈의 도움으로 오래된 주막을 수리한 후 지친 여행자들이 쉬어갈 수 있는 휴식 공간을 마련한다. 망스롱과 루이즈가 평민과 귀족이라는 신분 격차, 그리고 남녀가 불평등하다는 편견을 넘어서서 요리를 통해 유대감을 형성해 가는 것을 지켜보는 관객은 결국 중요한 것은 따뜻한 인간애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것만이 모든 차별과 불평등을 녹일 수 있는 무기라는 것을. 피에르와 루이즈는 계급과 지위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이 좋은 식사의 행복과 기쁨을 즐길 수 있는 장소를 함께 만들어 간다.
 

앙트안 귀스타브 드로즈, ‘기차역 식당’, 1864년

 
또 한 사람, 피에르에게 영향을 주는 존재는 그의 아들 뱅자맹이다. 혁명이 점점 가까워지는 시간, 책을 좋아하는 뱅자맹은 프랑스혁명 당시 민중의 자각, 근대 시민 정신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뱅자맹은 피에르에게 부유한 귀족의 주방으로 돌아가지 말고 스스로 식당의 주인이 되어 보다 많은 사람들을 위해 요리하라고 권유한다. 이제 망스롱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레스토랑의 본격적인 모델이 될 서비스 양식을 실험하기 시작한다. 주문을 받고 서빙하는 웨이터, 웨이트리스, 먹음직스러운 다양한 요리, 지친 여행자 앞에 놓인 메뉴, 각자의 테이블에 둘러앉아 식사할 수 있는 시스템 등.
 
‘딜리셔스’는 단순히 한 창의적인 셰프가 만든 디저트를 넘어선, 귀족의 족쇄와 억압에 굽히지 않은 프랑스 민중의식을 상징한다. 피에르는 마침내 최초의 레스토랑을 열게 된다. 부유한 미식가 샹포르 공작은 앙시앵 레짐(Ancien Régime, 구체제)을 상징하는 인물인 반면, ‘모두를 위한 좋은 요리’를 슬로건으로 내세운 그의 레스토랑은 자유, 평등, 박애의 프랑스혁명 정신을 대변한다. 
 

정치적 평등이 맛의 평등으로!

사람들은 언제부터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기 시작했을까? 프랑스혁명 이전, 집 밖에서 먹을 수 있는 유일한 장소는 대부분 선술집이나 주막이었다. 이곳들은 값싸고 간단한 음식들을 제공했다. 맛을 즐긴다기보다는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한 것이었다. 혁명 이후, 많은 귀족들이 단두대에서 처형되거나 외국으로 망명했고 일자리를 잃은 그들의 개인 요리사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너도나도 파리에 레스토랑을 열었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알려진 레스토랑의 기원설이다. 이는 두 가지 면에서 사실이 아니다.
 
첫째, 프랑스를 첫 번째 레스토랑의 탄생지라고 보는 것은 다분히 유럽의 역사를 중심으로 한 관점이다. 레스토랑으로 규정할 수 있는 최초의 식당은 이미 1100년경, 백만 명이 넘는 인구를 자랑한 중국의 도시 카이펑과 항저우에서 등장했다. 둘째, 혁명 이전, 1765년에 이미 블랑제(Boulanger)라는 요리사가 시작한 레스토랑이 있었다. 레스토랑이라는 단어는 ‘복원하다, 부활하다, 원기를 회복하다’라는 프랑스어 동사 ‘restaurer’에서 유래했으며, ‘restaurant’은 몸을 회복시키는 보양식이란 의미다. 여기서 판매한 부용(bouillon )은 물에 고기, 양파, 허브 및 야채를 넣고 끓여서 풍미가 우러나면 걸러서 만든 맑고 구수한 국물 요리였다. 부드럽고, 소화하기 쉬웠으며 영양분이 가득했다. 이 초기 레스토랑의 목적은 사람들의 건강을 회복시키는 간단한 음식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블랑제의 레스토랑은 일종의 태번(tavern: 주막이나 여관에 딸린 식당)으로, 모든 손님들이 커다란 공용 테이블에 둘러앉아 식사를 했다.
 
오늘날과 비슷한 레스토랑다운 레스토랑은 1782년 앙투안 드 보빌리에 (Antoine de Beauvilliers)가 리슐리외 거리의 팔레 르와얄 지역에 세운 ‘그랑드 타베른 드 롱드르(Grande Taverne de Londers)’였다. 루이 16세의 동생인 프로방스 백작의 요리사였던 보빌리에는 파리에서 레스토랑 사업을 시작한 최초의 요리사였다. 영화 속 피에르 망스롱에 해당하는 인물이다. 미식문화는 원래 귀족의 개인 주방에서 나온 것이었고, 이 레스토랑도 한동안은 귀족을 대상으로 했다. 우아하고 고급스러운 인테리어의 레스토랑에는 테이블이 각각 독립적으로 설비돼 있었으며 잘생기고 세련된 매너를 갖춘 웨이터가 주문을 받고 서빙했다. 당시 가장 참신한 아이디어는 메뉴를 도입해 다양한 요리를 제공한 것이다. 보빌리에는 요리 목록을 적은 메뉴판을 만들어 고객이 직접 음식을 선택하고 개별 테이블에서 식사하는 방식으로 운영했다. 파리의 상류층 고객은 이 최초의 프랑스 미식 레스토랑에서 완벽한 웨이터의 서비스, 훌륭한 와인, 고급 식기에 담긴 맛있는 요리를 체험하는 동안 베르사유 궁정에서 식사하는 것처럼 느꼈을 것이다.
 

일러스트=토끼풀

 
프랑스혁명을 전후하여, 보빌리에를 벤치마킹한 귀족의 개인 요리사들이 잇따라 레스토랑을 열었다. 특권계층이 독점하던 오트 퀴진, 즉 양질의 요리는 귀족의 개인 주방에서 부유계층의 공공 주방으로 이동했다. 주로 부르주아지 고객을 대상으로 했지만 더 이상 귀족만을 위한 요리가 아니었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는 음식의 민주화가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어차피 프랑스혁명도 농민, 노동자의 자유와 평등을 위한 것이 아니라 부르주아지를 위한 것이었으니…)
 
18세기 말은 군주제와 신분제의 종말이자 레스토랑 시대의 시작이었다. 파리의 부유하고 교양 있는 신흥 부르주아지의 세련된 입맛을 만족시키기 위해 레스토랑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났다. 새로운 엘리트 계층 고객은 개인 요리사를 둘 만큼 부유하진 않았지만, 대중의 식사와 구별되는 고급스러운 요리와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레스토랑을 원했다. 이런 레스토랑들이 점차 유럽을 비롯한 전 세계에 퍼지게 된다. 음식의 의학적인 측면에 초점을 둔 부용 레스토랑은 사라지고, 먹는 즐거움이라는 개념이 나타났으며 다양한 요리법이 발전했다. 단순히 건강을 위한 국물 요리 부용만을 팔던 레스토랑에서 와인과 닭고기 등 다채로운 식음료 메뉴를 가진 식당으로 진화했다.
 
프랑스혁명 덕분에 보다 많은 사람들이 소수 귀족계급의 개인 식탁에서만 허용되던 고도로 숙련된 셰프들의 훌륭한 요리를 즐길 수 있게 되었다. 귀족의 몰락으로 셰프들은 더 넓은 범위의 고객을 대상으로 요리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프랑스혁명이 이룩한 정치, 사회적 평등은 다수가 훌륭한 요리를 즐길 수 있는 식생활의 민주화로 확장된 것이다.
 

에필로그

영화는 음식을 키워드로 하여, 신분제 사회의 족쇄로부터 벗어나 자유와 평등을 쟁취한 민중의 시대를 보여준다. 《딜리셔스》의 주제는 인간의 생명을 유지하게 하고 에너지를 제공하는 ‘음식의 힘’만큼이나 ‘힘의 음식’에 관한 것이다. 음식은 생명의 원천이기 때문에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 모두에게 필요하다. 모든 생명이 소중한 만큼 음식도 원래 평등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 특권계층과 민중의 먹거리에는 양과 질에서 큰 격차가 있었다. 고풍스럽게 반짝이는 구리 냄비에서 조리된 온갖 미식요리가 값비싼 중국 도자기에 조심스럽게 담겨 샹포르 공작과 그 일행에게 제공된 영화 장면에서 보다시피 말이다. 미식의 향유는 곧 권력의 상징이며 사회적 특권과 지위의 과시였다.
 
반면, 1789년 혁명 직전 프랑스 농민은 세금의 압박과 기근에 시달리고 있었다. 구제도의 특권계급인 샹포르 공작은 그들만이 미식의 즐거움을 알 수 있고, 평민은 아무것도 모르며 그저 배고픔을 위해 먹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딜리셔스》는 계급을 초월하여 농민, 노동계급에 이르는 모든 사람에게 훌륭하고 정성껏 준비된 음식을 제공한다는 먹거리의 민주화를 이야기한다. 결국 샹포르는 자신이 그토록 경멸한 민중에 의해 몰락했고, 피에르의 레스토랑은 맛의 평등, 맛의 민주화의 메카가 되었다. 이제 ‘좋은 요리’는 신분을 넘어서 모두에게 허락된 기쁨과 즐거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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