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기부정>에 관한 소고 1

일러스트=토끼풀

 
<회기부정> 작품 링크 : https://brunch.co.kr/@proshuniv17/58
 
<회기부정>―이하 <회기>―은 대학문화상 소설 부문 가작 수상작품이다. 작품은 마지막 변호사 시험을 끝낸 주인공이 대학시절 선배를 고향에서 만나 일어나는 이야기이고, 안개를 통한 은밀한 욕망의 표출과 감춤을 표현했다. 이번 소고에서는 작가가 어떤 의도로 작품을 만들었는지, <회기> 속 이야기는 어떤 함의를 지니고 있는지를 작성해보고, 소설의 부족한 점을 비판적인 시각에서 바라보겠다.
 
‘<회기>에 관한 소고’를 작성한 이유는 ―프로작가들보다 많이―미숙한 대학생 소설이라도 비평을 할 수 있고, 비평을 통해 작품의 의미를 한층 더 다채롭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소고에서는 작가론적 비평과 작품 내용에 관한 비평을 시도했다.


 
1. 작가는 <회기>를 어떻게 서술했는가?

<회기>는 작가의 자전적 경험으로 쓴 작품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안개 속으로 뚫고 들어가자, 그곳은 안지(安地)였다.”, 안지댐에 대한 설명, 안개라는 장치와 작중 <무진기행>의 노출, 선술집에서의 주인공과 김형의 대화와 고양이와 만남에 관한 서술은 다양한 작품을 떠올리게 만들어줬기 때문이다.(가와바타 야스나리, 이청준, 다자이 오사무, 김승옥, 카뮈, 이상 등의 작가 작품의 오마주 및 인용을 볼 수 있음.)
 
황지웅(이하 황)의 이러한 글쓰기는 교양주의 소설을 떠올리게 한다. 실제로 교양주의는 다독을 중요한 것으로 꼽는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문열 작가가 교양주의 소설의 형태를 잘 보여준다. 이문열 작가가 한 작품을 만들 때 수십 권의 책을 보고 쓰는 것처럼 황의 글쓰기에서도 교양주의 소설의 형태를 잘 보여준다.
 
그렇다면 황은 왜 교양주의적 소설 형태를 보여줬을까? 그 이유는 젊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자전적인 경험을 통해 소설로 보여줄 것이 없는 미체험의 20대이기 때문이다. 당장 체험 세대인 박완서 작가와 비교해 보았을 때, 박 작가는 20대 때 전쟁을 겪으며 미군 PX에서 일하며 여러 경험을 했다. 하지만 황은 20대 때 대학을 입학하고 군대를 다녀온 일이 전부다.
 
박 작가는 20대에 큰 경험이 있었기에 <나목>을 쓸 수 있었지만, 황은 나이도 어리고, 특별한 경험도 없었기에 <나목>처럼 자전적인 소설을 쓸 수 없었다. 그렇기에 황은 기존 소설들을 인용하거나 오마주했다. 그러나 기존 교양주의 작품들과 차이점은 인용한 글들을 소화하지 못했고 ‘곧이곧대로 영향을 받은 ‘따라쓰기’’의 형태를 보여줬다.
 
황의 작품은 “다만 산만하고 짜임새가 헐거워 아쉬움이 남는다.”(고창근. (2022년 12월 05일). 소설 부문 심사평. 안동대신문. 10면.) 는 평을 받았다. 이러한 평을 받은 이유는 단편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본인이 감당할 수 없는 글을 썼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문장들은 오마주하고 인용했으니 글이 산만해졌고, 그 이야기들을 충분히 소화하지 못했으니 글의 짜임새는 당연히 헐거워질 수밖에 없다. 이는 ‘곧이곧대로 영향을 받은 ‘따라쓰기’의 결과였다.
 
문학평론가 이현우가 이문열 작가를 “자신이 아무리 진지하다 하더라도 책에서 본 내용을 똑같이 흉내 내려는 행동은 해프닝밖에 되지 않는다.”(이현우. (2021). 로쟈의 한국문학 수업(남성작가 편). 청림출판(주). p. 256)고 평한 것과 같이 황의 소설은 ‘흉내의 해프닝들이 연속되는 글쓰기’이자 ‘곧이곧대로 영향을 받은 ‘따라쓰기’일 뿐이다.
 


 
2. 안지의 안개와 사람들

<회기>에서는 대놓고 안지가 시골임을 대놓고 강조한다. “어휴 이놈의 촌구석은 다니기 너무 불편해 학교만 아니었어도…”라고 서술한 이유는 안지가 ‘시골 사회’임을 독자들에게 알려주기 위함이다.
 
‘나’는 안지의 안개를 이렇게 표현한다.
 
안지의 사람들은 ‘안개’를 싫어하고 회피의 대상으로 보았지만, 나는 그 반대였다. 안지의 안개는 ‘욕망’의 결정체다. 그래서 나는 안지의 안개를 긍정한다. (중략) 하지만 경제개발이란 그 욕망, 그 욕망으로 만들어진 결정체가 안지의 ‘안개’다.
 
안지의 안개는 안지댐 때문에 만들어진 것 즉, 경제개발 욕망으로 만들어진 욕망의 결정체이다. 그리고 그 욕망은 ‘숨겨진 욕망’이라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나’가 초밥집에서 눈치를 받았을 때, 선술집 안·밖에서의 시비 건 사람의 태도를 보았을 때 개개인들의 욕망이 전부 드러나 있지 않고 숨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안지 사람들은 안개를 부정하고 싫어하는 언행을 일삼지만, 실은 다들 속으로 어딘가에 자신의 욕망의 결정체인 동상을 세우고 싶어 한다. 하지만 다들 겉모습을 성자처럼 꾸며야 하는 불문율이 있어 욕망을 부정하는 척한다. 나는 안지 사람들을 고고한 대가람(大伽藍)을 소유하고, 자신의 대가람에 한구석에 동상을 세우고 싶어 하는 사람들로 생각했다.” ‘나’는 이미 고향 사람들을 잘 알고 있었기에 이렇게 표현한다.
 
‘나’는 안지 사람들이 안개를 부정하고 싫어하는 언행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들은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안지의 특별한 분위기 때문에 실현할 수 없다. 이러한 모습은 전근대적인 사회의 특징인 ‘공동체’를 보여줬다.
 
공동체의 특징은 그 안에서 “반목이나 갈등이 허용되지 않는다. 공동체가 깨지기 때문이다.”(이현우. (2021). 위의 책. p. 200) 욕망을 실현하면 공동체가 깨질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개인의 욕망을 현실화하기 위해 개인의 이익을 도모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된다면 공동체 내의 이해관계가 달라지기에 갈등과 대립이 발생한다. 공동체는 조화로워야 하기에 “다들 겉모습을 성자처럼 꾸며야 하는 불문율이 있어 욕망을 부정하는 척”할 수밖에 없다.
 
공동체는 다툴만한 이익이 없어서 정과 의리로 살아간다. 하지만 안지의 공동체는 개개인이 ‘동상을 세우고 싶어하는 모습’을 보여 이와는 상반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현대 시골 사회가 예전 시골 사회와 많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1960년대부터 지금까지도 도시로 나가는 시골 젊은이들은 많다. 하지만 60~90년대 시골 사회와 달리 현대 시골 사회는 공동체가 분해되는 모습을 보이고, 개인주의가 팽배해져 개인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모습을 보인다.―그렇다고 해서 시골 사회가 완전히 도시화 된 것은 아니다― 황은 이러한 점을 파악한 현대 시골을 작품에서 서술했다.
 


 
<회기부정>에 관한 소고 2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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