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홀로 길을 걷네. 3] 핏빛을 머금은 평화, 떨어진 동백꽃을 들고
동백꽃 데리러 통영에 다녀왔다.
통영에 사사는 강제윤 선생님의 북콘서트에 참석하기로 했다. 강 선생은 <입에 좋은 거 말고, 몸에 좋은 거 먹어라>라는 책을 출간했는데 내용인 즉, 지난해 10월에 돌아가신 말기암 어머니의 간병일기였다. 강 선생의 어머니 이끝임 씨는 2020년 1월 구강암 말기 판정을 받아 수술을 받으셨다. 수술은 무사히 받았지만 항암치료로 혀의 맛세포와 구강세포가 기능을 잃은 상태라 물마저 마시기 힘들게 되었고, 침샘이 말라 고통이 컸다. 마른 잎사귀처럼 쇠약한 엄마는 씹을 수도 삼킬 수도 없고, 냄새에도 민감한 상태였다. 싱싱한 해산물을 구해다 어머니의 구술 레시피로 미음을 끓였다.
금방 꺼질 듯한 어머니는 외지에서 돌아온 아들과 3년을 더 살다가 쓰러지셨는데, 남은 시간 동안 엄마는 아들을 걱정하고 아들은 엄마를 끌어안고 다가온 이별에 저항하였다. 페이스북을 통해 간병일지를 따라 읽던 나는 큰 감동을 받았다. 세상에 이 한국 땅에! 엄마를 돌보느라 병원 근처에 방을 얻고, 기저귀를 갈고 요리를 하면서 아기 돌보듯 엄마 얼굴을 쓰다듬는 아들도 있구나. 엄마의 일생에 저렇게 절절한 공감을 하고, 그 존재에 대해 한없이 깊은 감사와 사랑을 바치는 성성한 아들이 있었구나! 수술과 투병의 나날, 3년간 이어진 절정의 사모곡에 나는 깊이 몰입하고 고마웠던 것이니.
나의 어머니는 1996년 2월에 쓰러지셔서 2005년 9월에 돌아가셨는데, 못다한 마음, 불효의 시간이 오롯이 떠올랐다. 혼자서 아이 둘을 데리고 직장생활을 하던 나는 간병 5년만에 엄마를 요양원에 보내드릴 수밖에 없었다. 직장과 야간의 간병을 병행할 수가 없었던 것인데, 내 처지를 뻔히 아는 엄마는 주말마다 딸이 오는 시간을 기다리며 버려진 아기처럼 외로움 속에서 5년을 버티셨다. 몸은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지만 정신은 초롱같이 맑은 엄마 생각에, 밤마다 안타까워 숨이 막혔다. 그 10년간의 희망과 절망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 한복판이 찌르르 울리고 뼈가 저리다.
엄마가 만약 내 딸이었다면, 내가 아프고 엄마가 나를 돌봤다면, 아무리 일상이 힘들다 해도 어떻게 아픈 딸을 그렇게 오랫동안 격리시켜 둘 수가 있었겠는가? 다시 생각해도 뜨건 속울음이 올라오곤 한다. 엄마는 뇌졸중 후유증으로 몸은 불편했지만, 고통이 엄습하는 상태는 아니었고 끝내 외로움을 견디지 못해 숨을 놓은 것이다. 그것을 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1934년 생 가난한 집 7남매의 첫딸이었던 우리 엄마, 단정한 소녀였고 용기있는 여자였던 나의 홀어머니는, 한번도 행복한 삶을 살아보지 못한 채 병을 얻었고, 육신의 아픔과 천형 같은 고독을 안고 혼자 가셨다.
강 선생은 SNS를 통해 어머니의 삶과 투병 중의 어려움을 공유해 왔다. 많은 친구들이 모여서 어머니의 마지막을 지켜본 감동을 나누고 어머니께 책을 헌정하는 자리였다. 나는 사실 우리 엄마와 많이 닮은 그분의 삶에 대해 더 듣고 싶었지만, 많은 친구와 축하객이 모여 공연을 하는 모임이라 애도의 시간을 더 늘일 수는 없었다. 첫 순서는 춤추면서 어머니의 초상화를 그리는 한국화가 신은미의 퍼포먼스였다. 미리 준비한 화선지에 음악과 율동을 따라 회색빛 머리카락이 흐르더니, 얼굴 윤곽과 눈매가 돋아나고, 엷은 웃음이 피어나는 얼굴에 붉은 동백꽃을 둘러 완성이 되었다. 어머니가 동백꽃을 가장 좋아하셨다고…. 어머니 얼굴은 커다랗게 피어나 잔잔한 웃음으로 지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어지는 노래로는 ‘동백 아가씨’가 나오고, 기타를 거문고처럼 연주하는 크로스오버 국악연주, 음유시인의 노래가 이어졌다. 공연이 끝나자, 강 선생은 지인들이 후원해준 신선한 회와 굴, 멍게를 차려서 멀리서 온 지인들을 대접해 주었다. 매운탕이 나오고 충무김밥이 나오고 수제맥주가 있는 멋진 파티가 이어졌다. 흥이 남아서 노래도 부르고 밤이 깊어갔다. 나는 곁에 앉은 참석자 부부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다음날 무엇을 할 것인지 물어보았다. 장사도에 동백꽃 보러 간다고 하기에 나도 그분들과 함께 가기로 했다. 그리고는 방에 와서 뜨거운 물에 몸을 씻고 곯아떨어졌다.
이튿날 아침, 창밖으로 바닷물이 넘실대고 그 위로 배들이 바삐 지나가고 있었다. 레스토랑에 내려가 8시 반에 아침을 먹고, 9시 반에 출발해서 여객선 터미널로 향했다. 통영에서 출발한 배는 양쪽에 한산도와 거제도 사이로 나아갔다. 날씨는 먼지 한 점 없이 쾌청하여 섬의 어느 지점에서는 대마도가 보일 거라고 했다. 파도는 남실남실 그저 나의 고민을 설문대 할망처럼 웃으며 어루만져 주는 듯했다.
선착장에 도착해서 계단을 오르니 구실잣밤나무와 동백나무가 봄빛을 적당히 벌리어 우리를 숲길로 안내했다. 이름하여 까멜리아 해상공원. 군락을 이루고 있는 동백꽃 사이로 키 작은 소나무와 관목들이 편안하게 자라고 있었다. 군데군데 만들어 놓은 전망대에 서면 가까이에는 초록의 잎사귀가, 난간 너머로는 확 트인 바다가 우리를 반겨 주었다. 그 신선한 빛깔과 바닷물의 윤슬에 겨우내 얼었던 마음이 말랑말랑 터지고 있었다.
장사도는 뱀사(巳)자가 아니라 실사(絲)자였다. 굼실굼실 기어가는 누에를 닮은 섬. 갸름하고 예쁜 섬을 해상공원으로 만드느라 많은 정성을 들였다. 동백꽃 군락지에는 드라마를 찍었다는 꽃터널이 있었고, 산책로 곳곳에는 작가들의 조각작품을 배치하여 쾌청한 바람과 천연의 햇살 속에서 예술품을 감상할 수 있었다.
내가 특히 인상 깊게 본 것은 산책로 관목 곁에 놓아둔 ‘달팽이 여인’ 조각이었다. 달팽이집에서 쑤욱 허리를 내민 여린 속살이 미녀의 상체로 변신한 모습인데, 이제 막 껍질 밖으로 힘겹게 빠져나온 그녀는, 기진한 듯 뿌듯한 듯 팔을 베고 누워 있었다. 그리스 신화 속의 반인반수의 변신 형상과는 또 다른 놀라움을 안겨주었다. 반은 연체동물에 반은 여인인 달팽이 여인이라니…. 생명을 받은 피조물끼리는 이렇게도 서로 몸이 이어지고 바꿔지기도 하는 것일까? 인간과 동물의 생명길을 넘나드는 아름다운 상상에 젖게 하였다.
또 한 곳에서는 바다에서 솟아오른 수영하는 여인들이 섬을 뛰어넘는 장면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수영하는 사람들의 미끈한 나신이 돌고래처럼 목하 섬의 숲 사이를 지나가고 있는데, 이 또한 새인지 사람인지 모를 한 순간의 꿈을 포착한 것 같았다. 한참을 서성이다가 앞으로 걸어갔다.
불 밝힌 동백꽃 터널에서는 사진도 찍고 바다에서 불어오는 산들바람과 깨끗한 햇살을 마음껏 받아안았다. 동백꽃은 초록잎과 붉은 꽃잎의 선명한 대비로 인해서 역사 속의 4.3항쟁이나 빨치산 항거, 위안부 할머니의 슬픔을 극대화시켜 주는 꽃이었는데, 자세히 보니 주황빛이 섞인 것, 분홍빛이 감도는 홑겹 꽃도 있어서 행복한 향기가 풍기는 소녀들처럼 풋풋하고 어여뻤다. 나무 밑에 떨어진 동백꽃 두 송이를 주워 주머니에 넣었다.
출항지의 배 시간에 맞추느라 안타깝게도 옻칠박물관은 그냥 지나왔다. 30여 분 동안의 돌아오는 배에는 갈매기들이 훨훨 우리를 배웅하듯이 말하고 있었다. 이 바람처럼 여한 없는 삶을 사세요.
배에서 내려 중앙시장으로 들어가 늦은 점심을 먹었다. 시장은 마치 명절 즈음의 풍경처럼 사람들로 북적였다. 이곳 사람들은 아직 먹거리를 대도시처럼 배달해 먹는 사람이 많지 않은 것 같았다. 저녁거리를 마련하러 온 사람들과 관광객들이 싱싱한 생선과 해물 상자 사이를 줄지어 지나갔다. 사람들을 맞이하는 상인들의 표정에 활기가 넘쳤다.
나는 손님이 없는 한적한 식당에 들어가 생선구이를 주문했다. 쥐치와 어린 조기, 방어 한 토막, 작은 돌돔이 구워져 나왔고, 반찬과 따끈한 밥을 맛있게 먹었다. 몸도 마음도 흐뭇해졌다. 이제 언덕길로 올라가 동피랑 벽화마을을 한 바퀴 돌았다. 올망졸망 지붕을 맞댄 산동네에는 햇살을 받는 담장마다 재미난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나는 햇살 내린 야외테이블에 앉아 바닷물의 윤슬 너머 다정한 섬들을 내려다보며, 바람 한 모금에 커피 한 모금을 번갈아 마셨다.
서울행 고속버스 시간을 계산해서, 잔멸치와 파래를 사가지고 통영종합터미널로 나왔다. 멸치볶음도 하고, 강선생님 어머니의 구술 레시피에 나오는 초간단 파래김치를 해볼 생각이다. 그래서 오늘처럼 맛있게 밥을 먹어야겠다. 매표소 창구에서 예매한 버스표를 받았다. 버스는 5시10분에 출발했다. 안전벨트에 몸은 비록 묶여있으나 마음은 이런저런 상념으로 뒤척였다. 핸폰으로 장사도의 산책길과 바다풍경 사진을 넘겨 보았다. 참 평화로웠다.
내 자리는 맨앞 줄 오른쪽 1인석이라 전방의 도로가 훤히 내 앞으로 다가왔다. 6시가 넘자 땅거미가 내렸다. 남녘에는 꽃이 피지만 밤은 아직도 겨울의 끝이다. 벗었던 점퍼로 무릎을 덮었다. 어느새 해는 지고 고속도로 전방은 캄캄해져 있었다. 멀리 터널이 까맣게 입을 벌리고 하얀 차선만이 말없이 서울로 버스를 유도한다. 전조등이 빨갛게 눈을 뜨고 있다. 주머니에서 동백꽃 두 송이를 꺼내자, 산비탈에도 여기저기 점점점 동백꽃 닮은 봉홧불이 반짝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