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의 굴레

일러스트=바로크

 
어느 봄날, 한문 수업시간, 나는 앉은자리에서 일어나 삿대질을 해가며 고래고래 소리쳤다. “당신 같은 악질 교사가 있기 때문에 대한민국학교가 미개한 거야!” 하자마자 나는 교실을 빠져나왔다. 급우들은 숨죽이며 상황을 지켜보고, 한문 교사는 득달같이 나를 쫓는다.
 
유년시절, 부모님이 법적으로 갈라서면서 모친을 따라 학교를 경주로 옮겼다. 집은 지금의 황리단길이 자리 잡은 동네인 황남동으로 이사했다. 그 시절, 황남동은 속되게 말해서 후진 동네였다. 경주바닥에 오랫동안 눌러살던 터줏대감들의 동네였고 따라서 텃세도 심했다. 나는 부모님의 가정폭력과 이혼으로 인해 정서적으로 위축되어 있었고 어느새 소위 말하는 왕따가 되어있었다. 왕따라는 낙인은 중학교를 진학하면서까지 따라왔다.

경주바닥이 워낙 좁은 터라 소문은 쉽사리 가시질 않는 듯했다. 초등학교 고학년에서부터 시작된 낙인은 중학교를 타고 올라와 나를 괴롭혔다. 중학교로의 진학에서 같은 초등학교 동기들을 만날 리 없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나를 가장 심하게 괴롭히던 녀석을 같은 학교에서 마주했고 심지어 같은 반으로 배정받았다. 그 일 하나만으로도 나는 대인기피증이 도졌다.
 
입학하고 나서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내가 진학한 중학교는 남중인 데다가 경상도의 호전적인 문화까지 더해져 ‘수컷‘들의 서열 싸움으로 난장판인 학교였다. 결국 중학교를 졸업하기 전까지는 소위 말하는 일진들에게 주먹다짐을 신청하며 나 스스로를 온전케 하기 위해 애쓰는 시간이었다. 싸우다 코피가 터지고, 무릎이 터져 처참히 깨지기도 했다. 일진 무리에 빌붙던 한놈을 패다가 경찰에 신고당하기도 했다. 왕따라는 낙인으로부터 나를 되찾기 위한 싸움인 것이다.
 
나는 상급학교에서 반배정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또 반에서 가장 덩치 큰 놈과 싸웠다. 내가 만만한 놈이 아니라는 걸 주변에 인식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이것은 인정욕구를 바라서거나 학교에서의 나의 서열을 높이기 위한 싸움이 아니었다. 그것은 생존본능이었다. 그 일로 나는 왕따라는 낙인 대신, ‘나쁜 아이’, ‘문제아’라는 낙인을 얻었다.
 
문제아로 낙인찍힌 대가는 혹독했다. 까탈스러운 한문 교사에게 시도 때도 없이 맞아야 했다. 맞을 만해서 맞은 것은 아니었다. 한문 교사는 학생들의 숨소리가 크다는 이유로 체벌을 가했고, 동료 교사와 법적 다툼을 벌이는 등의 소란을 일으켰다. 한문 교사에게 가장 많이 희생된 게 바로 나처럼 문제아로 낙인찍힌 녀석들이었다.
 
나는 참지 못하고 한문 교사에게 ’ 미개하다 ‘고 소리쳤다. 학생들을 엄격하게 통제하는 교칙과 교사들을 보면, 이 학교는 마치 영화에서나 보던 유신 시절의 고등학교를 연상케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다니던 학교의 이름은 문화고등학교다. 학교의 이름을 들었을 땐, 청소년들의 생기발랄한 문화가 꽃피워야 할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나는 한문 교사를 비판하기 이전에, 내가 다니던 학교를 비판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피해망상과 불안장애를 얻을 정도로 괴로운 학창 시절을 보냈다. 왕따일 때에는 왕따라서 폭력에 휘둘렸고, 문제아일 때에는 문제아라서 폭력을 휘둘렀다. 12년간의 학교생활을 끝마치는 고등학교 졸업식은 지긋지긋한 폭력의 굴레로부터 해방되는 날이었다.
 
이번에 국가수사본부장으로 임명된 정순신의 아들이 악질적인 학교폭력 가해자라는 사실 역시 밝혀졌다. 사회적 강자를 방치하면 약자는 언제든 희생될 수 있다. 하지만, 약자들이 그저 폭력에 노출되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약자들은 약자라서 폭력을 행사하기도 한다. 누구에게도 보호받지 못한다는 불안감이 폭력성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처럼, 폭력은 사회경제적 문제다.
 
흔히 학교는 작은 사회라고 말한다. 위계적인 한국 사회의 병폐들은 학교에 고스란히 반영된다. 위계적인 학교에서는, 폭력이 폭력을 부르는 악순환이 계속된다. 이 악순환을 끊어야 한다. 다음 세대는 폭력에서 자유로운 학창 시절을 보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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