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국에 기시다 총리를 응원하는 이유.
기시다 총리가 변화를 이끌어내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한일 관계 이야기가 아닙니다. 기시다 총리도 민주국가의 정부수반입니다. 기시다 총리가 소속된 자유민주당은 국민적 자부심을 키우고 안보 불안을 해소하고 싶어하는 일본 민심을 잘 파악하고 있습니다. 경쟁 상대인 입헌민주당과 공산당이 평화를 외치는 동안, 자민당은 강한 일본을 외쳤습니다. 게다가, 일본은 임기가 보장되지 않는 내각제 국가입니다. 빠르게 추락하는 지지율은 곧 신속한 정권 교체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고이즈미 내각 때부터 예리한 쿠키요미(분위기 파악)로 성장해 온 기시다 총리는 분명 이런 정황을 잘 이해하고 있을 것입니다.
애초에, 한일 관계는 우리나라에 유리한 이슈가 아닙니다. 먼저 한일 관계를 정치적으로 악용한 건 우리나라입니다. 국제법을 보나 역사적 사실을 보나, 급한 건 우리나라이지 일본이 아닙니다. 또한, 일본 사람들도 지금 윤석열 대통령의 방식으로는 다음 정부 때 또 반일 전선이 펼쳐질 수 있다는 걸 예상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인기 없는 정치인이라는 점을, 알 만한 사람은 다 알 것입니다. 민주국가에서 인기 없는 정치인의 약속은 공허할 수 밖에 없다는 점도 알 만한 사람은 알 것입니다. 이런 저런 상황을 둘러 볼 때, 기시다 총리가 한일 관계 개선에 진심으로 나서주기를 기대하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제가 기시다 총리에게 기대하는 것은 일본의 ‘사회개혁’입니다. 사회개혁은 야경국가, 작은 정부론을 거부하고, 국가가 사회적 문제를 해결할 의무를 져야 한다는 생각에 기초하고 있습니다.1) 우리나라에서는 사회개혁이라는 표현이 마구잡이로 사용되는 경향이 있지만, 역사적으로 사회개혁은 체제를 전복하는 혁명을 거부하고, 국가가 사회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며 기존 체제를 개선하는 것으로 통했습니다.
기시다 총리는 역대 어느 일본 총리보다도 적극적인 사회개혁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원래 기시다 총리는 일본에서 좋게 말하면 안정감 있는 정치인, 나쁘게 말하면 소극적인 기회주의자로 통했습니다.2) 하지만 총선이 닥치자, 기시다 총리는 정부가 주도하는 ‘재분배’를 뚜렷하게 공약했습니다. 이런 공약을 드러내는 슬로건이 바로 ‘새로운 자본주의’, ‘성장과 분배의 호순환’, ‘레이와 소득배증계획’입니다.3)
원래 일본은 우리나라 못지 않은 저부담 – 저복지 국가였습니다. 경제성장과 완전고용을 달성한 주역으로 평가받는 이케다 하야토 총리는 1961년에 전국민이 의무로 가입하는 건강보험과 국민연금을 도입했습니다. 다나카 가쿠에이 총리는 1973년 이후부터 대대적으로 인프라와 사회보장을 강화했습니다.4) 하지만, 일본의 사회보장제도는 종신 고용을 보장받는 정규직 노동자의 위험 부담을 사회보험으로 덜어주고, 개인보다는 가족의 생활을 보장하는 데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5) 그 규모도 영국이나 독일 같은 선진적인 사회국가에 비하면 그리 크지 않았습니다.
2019년 OECD에서 발표한 GDP 대비 공공사회복지지출 비율 통계에서는, 일본이 역사 깊은 사회국가인 영국을 추월했습니다.6) 하지만, 심각한 고령화 탓에 어쩔 수 없이 늘어나는 예산이 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합니다. 일본 정부의 사회보장 예산은 1991년 전체 예산의 16.6%에서 30%로 늘어났지만, 그 중에서 고령자와 관련된 예산이 70% 이상을 차지합니다.7) 이는 곧, 일본의 청장년 세대는 허약한 사회안전망에 겨우 매달려 있다는 뜻입니다. 일본은 여전히 사회국가로서는 낙제생인 셈입니다.
물론, 일본도 손 놓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최근 10년 동안 일본은 뒤늦게 사회개혁에 나섰습니다. 2012년에 두번째 내각을 꾸린 아베 신조 총리는 거시적인 경제 관리로 일본을 저성장의 늪에서 구출하는 동시에, 노동조건을 개선해서 기업 내부의 소득 격차를 억제하려 했습니다. 정규직 노동자 중심의 사회보장제도에 비정규직과 자영업자를 대거 포함시켰습니다.
하지만, 아베 총리의 사회개혁은 정부가 노사 관계를 다시 정립해 주는 데에 그쳤습니다. 집권 기간 내내, 아베 총리는 규제 개혁과 통화 정책으로 기업 경쟁력을 지원하는 대신, 기업이 새로운 유형의 노동자들에게 혜택을 주도록 압력을 넣었습니다. 그 핵심이 바로 최저임금 인상과 동일노동 동일임금 정책이었습니다. 여성과 아동을 위한 정책을 강화하기는 했지만, 전체적인 예산 규모는 선진국에 비하면 여전히 부족했습니다. 실제로, 아베 총리 집권기의 복지 예산은 어쩔 수 없이 늘어나는 부분을 빼면 상당부분 억제된 것으로 관찰되었습니다.8) 다시 말해, 아베 총리의 사회개혁은 정부의 힘으로 파이를 재분배하기 보다는, 전체 파이를 키우고 시장 내부에서 덜 불평등하게 분배되도록 유도하는 데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습니다.
흔히 기시다 총리가 아베 총리의 영향력에 갇혀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실제로, 기시다 총리의 ‘새로운 자본주의’는 아베노믹스의 연장선 위에 있습니다. 하지만, ‘기시다노믹스’는 아베노믹스와 완전히 똑같지 않습니다.
기시다 총리의 보좌관인 무라이 히데키는 기시다 내각의 새로운 자본주의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새로운 자본주의란, 과거의 신자유주의적인 자본주의로 인하여 과도한 부분과 지나친 부분을 시정하고자 하는 것이다.”9) 기시다 총리가 아베 총리의 정책을 다 뒤엎으리라고 보기는 힘들지만, 분명 기존 정책에 새로운 정책을 추가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정책이 바로 현지에서는 ‘사람에 대한 투자’라고 부르는 적극적 노동시장정책에 3년간 4000억 엔을 투입하는 것입니다.10) 이 외에도, 기시다 총리는 육아수당을 크게 늘리고, 상속세를 개선해서 너무 많은 돈을 쥐고 있는 앞 세대가 빠르게 다음 세대에 부를 나눠주도록 유도할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11) 세대 간 빈부격차가 큰 일본에 맞게, 세대 간 분배를 촉진하려는 것입니다.
물론, 위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인기 없는 정치인의 약속은 공허합니다. 그런데, 지금 기시다 총리는 한일 정상 회담 이후 지지율을 회복하고 있습니다.12) 일본의 경영인단체인 ‘케이단렌’과 노동단체인 ‘렌고’도 기시다 총리의 새로운 자본주의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13) 아직도 전임자의 퇴임 직전 지지율을 뛰어넘지 못한 우리나라 대통령에 비하면, 기시다 총리는 충분한 개혁 동력을 쥐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기시다 총리가 추진하는 사회개혁이 성공한다면, 우리나라도 긍정적인 영향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일본 경제가 안정된다면, 우리나라는 일본과의 경제 협력으로 간접 이익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보다 더 중요한 혜택은 우리나라 정치에 미칠 영향입니다. 일본의 사회개혁은 여태 우리나라를 옥죄고 있는 작은 정부론을 반박할 전례 하나를 더 추가해 줄 것입니다. ‘세계적인 추세’는 유행에 민감한 우리나라 사람들이 자주 활용하는 수사법입니다. 보수는 법인세 인하와 노동시장 유연화가 세계적인 추세라며 정당화했고, 진보는 여성 인권과 친환경 정책이 세계적인 추세라며 정당화했습니다. 아직까지 선진국을 뒤따르는 입장에 머물고 있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경제 개입을 강화하고 있는 유럽연합과 미국, 일본의 사례는 우리도 정부 개입을 늘려야 한다고 설득할 수 있는 근거가 되어 줄 것입니다.
엄격하게 따지자면, 기시다 총리의 사회개혁은 불안정하고 부족합니다. 자조론이 뿌리 깊게 자리잡데다가 계파 갈등이 극심한 일본 정치에서, 과연 기시다 총리가 얼마나 강경하게 개혁을 밀어붙일 수 있을지 좀 더 지켜봐야 합니다. 오랜시간 작은 정부 탓에 고통받는 일본 사람들을 구출하기에, 기시다노믹스는 너무 초라합니다. 덴마크 수준까지는 아니더라도, 독일, 오스트리아 수준으로 사회투자정책에 큰 예산을 투여하면 좋겠지만, 저성장과 높은 국가부체 탓에 그러기는 힘들 것입니다. 그래도, 일본과 주변국이 사회국가를 향해 한 발자국 더 나아간다면, 국제 경제에 깊게 의존하는 우리나라도 보다 적극적인 사회개혁이 필요하다는 데에 합의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한일 관계보다 일본 내부의 사회개혁에 더 관심이 갑니다.
참고문헌.
1. 오인영, 영국의 신자유주의와 자유당의 사회개혁입법(1908 – 1914), 영국 연구 제5호, 영국사학회, 2001, 46p.
2. 나카지마 다케시, 일본의 내일, 박제이 옮김, 생각의 힘, 2020, 143p.
3. 박수경, 일본의 최근 노동 및 사회보장정책 동향에 대한 고찰, 노동법논총 제55집, 한국비교노동법학회, 2022, 3p.
4. 일본의 사회보장제도, 주요국 사회보장제도 8, 한국보건사회연구원, 2018, 34p.
5. 일본의 사회보장제도, 주요국 사회보장제도 8, 한국보건사회연구원, 2018, 6p.
6. OECD 주요국의 공공사회복지지출 현황, 국회예산정책처, 2021.
7. 일본의 사회보장제도, 주요국 사회보장제도 8, 한국보건사회연구원, 2018, 148p.
8. 조영훈, 아베내각의 사회보장정책에 대한 평가: 사회보장지출 추이를 중심으로, 한국사회정책 제28권 제1호, 한국사회정책학회, 2021, 26p.
9. 박수경, 일본의 최근 노동 및 사회보장정책 동향에 관한 고찰, 노동법논총 제55집, 한국비교노동법학회, 2022, 11p.
10. 박수경, 일본의 최근 노동 및 사회보장정책 동향에 대한 고찰, 노동법논총 제55집, 한국비교노동법학회, 2022, 13p.
11. https://www.hankyung.com/international/article/202212285011i
일본 자산시장의 그늘 6, 정영효의 일본산업 분석, 한경 글로벌마켓, 2022년 12월 28일.
12.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3032012130000266
최진주, ‘양보 안 한’ 기시다, 한일 정상회담으로 지지율 상승…정치 득실 ‘플러스’, 한국일보, 2023년 3월 20일.
13. 박수경, 일본의 최근 노동 및 사회보장정책 동향에 대한 고찰, 노동법논총 제55집, 한국비교노동법학회, 2022, 35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