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동네 미술관 투어] 2. ‘시의 정원’ 展

일러스트=토끼풀

 
이런 질문을 받았다. “전시나 작품을 감상하는 취미를 갖고 있으면 좋은 점이 뭔가요?” 필터 없이 대답이 튀어나왔다. “일단 주말이 심심하지 않고요. 낯선 여행지에서도 세상과 내가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어요.” 너무 솔직 했나, 주말이 심심하지 않다니. 뭐 어떤가. 바야흐로 봄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봄을 즐겨야 한다. 봄을 즐기기 위해, 주말이 심심하지 않게, 그리고 타인의 세상과 내가 미처 보지 못했던 세상을 만나기 위해 잠시 밖으로 나가보면 어떨까.
 

4년 만에 개최된 매화 축제와 광양 매화 마을의 모습 / 사진=광양시 홈페이지

 
전국에서 가장 먼저 봄을 알리는 마을이 있다. 바로 전남 광양의 매화 마을. 해마다 봄이 되면 전국 각지의 상춘객으로 발 디딜 틈이 없었던 마을은 코로나로 인해 4년 만에 다시 축제를 개최했고, 그간 인간의 손이 닿지 않았던 꽃과 나무들은 그 자태에 자연스러움과 여유를 더했다. 마을 전체가 한 폭의 그림이고 예술이다. 자연보다 아름다운 것은 없다는 말은 사실이지 싶다. 동시에 ‘자연이 이렇게 아름다운데 인간이 만든 예술은 무엇을 담아야 하나’ 라는 생각이 든다면 ‘시의 정원’에 방문해 보면 어떨까.

전남도립미술관 ‘시의 정원’ 展
 
‘시의 정원’ 이라니. 제목에서부터 호기심을 유발하는 전시는 문학과 미술이 만나는 지점을 통해 축적된 시간과 그 안에 배어 있는 우리의 삶의 태도를 조망한다. 전시에 참여한 네 명의 현대미술작가들 – 이매리, 안유리, 리밍웨이, 임흥순 – 은 남도의 문학에 영감을 받거나, 문인들과 협업해 예술의 이름으로 사회와 시대를 기록한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세계를 인식하고, 발언하는 행위는 근사한 삶에 근사해지고 싶은 인간 욕망의 또 다른 행위인지 모른다.

전남도립미술관 ‘시의 정원’ 전시 포스터 / 전시는 4명의 작가가 보여주는 옴니버스 영화 같다. 사진=전남도립미술관 홈페이지

 
전시는 시각예술가 안유리 작가의 작품으로 시작한다. 작가는 해남 출신 시인 고정희의 시를 포함, 국적이 다른 여성 시인들 – 일본의 구리하라 사다코, 폴란드의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미국의 마야 안젤루 – 의 시를 깊이를 알 수 없는 검푸른 심해 영상 위에 한 글자 한 글자 내보낸다. 영상에 등장한 ‘히로시마’, ‘단어를 찾아서’, ‘그래도 나는 일어서리라’, ‘프라하의 봄 7: 85년의 C형을 묵상함’의 시는 각각 히로시마 원자폭격, 나치와 소비에트, 흑인 민권운동, 광주 민주화 운동을 배경으로 한다. 전시장에 들어선 사람들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이 한글자 한글자를 끝까지 지켜본다. 축적된 시간 속 어딘가에서 우리는 서로 만나고 있다. 봄날의 꽃을 만나기 위해 견디는 겨울의 시간이다.
 

안유리, 스틱스 심포니, 2022, 2채널 영상설치, 15분 51초 Photo by Sangtae Kim / 현재는 작품을 편히 관람할 수 있도록 의자가 설치되어 있다 / 사진=전남도립미술관 홈페이지

 
겨울을 견디면 봄이 온다. 이 과정은 우주가 존재하는 한 계속된다. 미술작가 이매리(1963~)는 인류의 탄생, 인간의 삶과 죽음, 민족과 국가의 생성과 소멸을 주제로 역사의 지층 속 수없이 피고졌을 개인을 꺼내든다. 금분으로 써 내려간 성경과 에즈라 파운드,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는 황야에서 방황하고, 약속된 땅을 찾고, 그것을 잃고, 도시를 건설하고, 그것이 파괴되고, 그럼에도 남은 인류에 의해 계속되는 역사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럼에도 계속되는 역사는 끊임없이 순환하는 생명을 꽃피우는 위대함의 또 다른 이름인지도 모른다.
 

이매리, 지층의 시간 2020, 2020, 혼합재료, 350x650cm / 사진=전남도립미술관 홈페이지

 
생명이 있는 모든 것들은 만남을 통해 성장하고 변화한다. 영국 테이트모던, 프랑스 퐁피두센터, 미국 메트로폴리탄미술관 등 유수 기관에서 전시를 개최한 대만 작가 리밍웨이(1964~)는 ‘소통’과 ‘관계 맺기’를 키워드로 우리가 일상에서 쓰지 않았던 감정의 근육을 건드린다. 이번 전시에서는 ’아버지의 해방일지’』, 『’빨치산의 딸’로 잘 알려진 구례 출신 소설가 정지아와 함께 구례를 여행한 뒤 신작 를 제작했다. 이 작품에는 꼭 가봐야할 곳, 놓치면 후회할 곳 과 같이 객관화된 여행 정보는 없다. 대신 한 개인이 자신의 눈으로 해석하고 담아낸 여행지도가 있을 뿐이다.
 

리밍웨이, 여행자, 2001-2023, 2채널 영상, 컬러, 사운드, 나무상자에 기념품, 전남도립미술관 구례투어 제작지원, Photo Courtesy of Perrotin Tokyo, photo by Kei Okano / 사진=전남도립미술관

 
더불어 리밍웨이는 자신의 대표작품 에 관객을 초대한다. 개인적 상실의 경험을 바탕으로 시작한 작품은 이제 한 개인을 넘어 동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이 스스로에게 가장 좋은 친구가 되고, 자신에게 중요한 타인과의 관계를 맺기 위한 연결고리를 제공한다. 작은 공간에 지금은 부재하는 누군가를 위해 써내려가는 글은 내가 나에게 건내는 위로와 화해의 시간이기도 하다.
 

리밍웨이, 편지쓰기 프로젝트, 1998-현재, 나무부스, 편지지, 편지봉투, 각 290x170x231cm 총 3점 / 사진=필자

 
마지막이다. 2015년 베니스비엔날레에서 은사자상을 수상 등 화려한 수식어가 더 익숙한 영화 감독이자 미술작가 임흥순(1969~)은 전시에서 완도 출신 소설가 임철우의 백년여관에서 영감을 받고 동명의 작품을 선보였다. 임철우의 소설 『백년여관』은 4.3 항쟁의 희생자 가족, 1980년 광주항쟁의 피해자, 1950년 보도연맹원 학살사건의 희생자 가족이 주요 인물로 등장하여 가상의 섬 영도로 모여든다는 내용의 소설이다. 임흥순은 소설 속 주인공과 소설가가 지닌 태도 중 ‘책임감’에 초점을 두고 한국 현대사의 비극적인 사건에 대한 작가의 시선을 영상과 사진, 설치작품으로 선보였다. 작품은 이름 없이 사라져간 이들, 누군가는 이름 없이 기억하고 싶지만 절대 그럴 수 없는 이들을 통해 사건을 마주하고 회복하는 시간을 권한다.
 

임흥순, 백년여관, 2023, 2채널 영상, 컬러, 사운드, 사진, 설치, 가변크기, 전남도립미술관 제작지원 / 사진=전남도립미술관 홈페이지

 
생명이 있는 모든 것들은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친다. 그 몸짓은 대부분 처절하고 고통스럽지만, 정말 견대기 힘들다 싶을 땐 가끔 ‘그래 인심 썼다’ 는 듯 뜻하지 않은 선물 같은 순간이 찾아온다. 그래서 그 순간은 더욱 귀하고 소중하다.
 
우리는 말하지 않아도 안다. 이 모든 것이 쌓여 서로가 서로를 지탱하는 필요충분조건이 된다는 것을. 자연과 인간이 만든 예술도. 봄날 만개한 꽃을 즐겨보자. 그리고 꽃이 피어나기 위해 견뎌야 했던 시간도 함께 느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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