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복을 벗고 세상을 입다] 허상이 나를 살리는 순간

일러스트=토끼풀

 
열다섯에 중학교를 그만둔 뒤, 나의 관심사는 한결같았다. 넘치는 시간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일상 속 시간과 공간을 온통 점령하던 학교라는 존재가 사라지자, 나는 내 삶의 기틀을 다시 짜야만 했다. 이와 동시에 내게 주어진 숙제는 딱 하나였다. 나의 세계를 넓히는 것. 나에게는 이 넓은 세상을 탐색하고 알아갈 의무가 있었다. 스승에게 약속의 말을 내뱉어버렸기 때문이다.
 
자퇴 전, 나를 말리던 담임 선생님에게 나는 이렇게 답했다. ‘선생님, 저는 더 많은 것을 읽고 더 넓은 세상을 보고 작가가 되고 싶어요.’ 철없고 당돌한 그 한마디에서 어떠한 가능성이 보인 건지, 말리기는 이미 글렀다는 생각 때문이었는지, 선생님은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그 말을 믿겠다고 말했다. 너는 학교 밖에서도 배움을 찾아낼 수 있는 아이라고.

그러나 학교를 떠난다 한들 내 삶의 반경이 달라질 리는 없었다. 집과 학교 사이를 오가던 삶이 집안에 더 오래 머무는 삶으로 바뀌었을 뿐이었다. 당장 여행을 떠나기는커녕, 졸업을 위해 공부하거나 돈을 벌기에도 바빴다. 당시 내 1시간의 가치는 4천 원 남짓이었다. 비닐에 빵을 담고 커피를 내리고 바게트 써는 기계에 손을 베일까 무서워하면서 하루를 보내면 3만 원 조금 넘게 벌 수 있었다. 집에 돌아가면 퉁퉁 부은 다리를 주무르기 바빴다. 어쩌면 더 넓은 세상을 보겠다던 포부는 터무니없는 허상일지도 몰랐다.
 
설상가상으로 점장은 틈만 나면 아르바이트생을 괴롭히는 막돼먹은 인간이었다. 손님이 전혀 없더라도 의자에 걸터앉아 편하게 쉴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말라며 으름장을 놓거나, 본인이 커피머신 위에 현금을 올려둔 걸 까먹고선 CCTV를 돌려보자며 나를 의심했다. 나는 누구보다도 성실한 아르바이트생이었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는 듯했다.
 
“자퇴생인 게 찝찝하지만, 최저시급보다 40원이나 더 주니 감사한 줄 알고 똑바로 일해.”
 
나는 빵집 바닥을 닦으면서 그의 이야기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내곤 했다. 머릿속으로 음악을 흥얼거리면 지루한 매장에서 벗어나 지중해의 노을을 보기 위해 기차를 타는 내 모습을 상상할 수 있었다. 당시 푹 빠져있던 노래, 에피톤프로젝트의 ‘친퀘테레’가 내 상상을 거들어주었다.
 
‘지중해의 어느 저편에 아름다운 다섯 마을이 있어요. 비행기로 갈 수는 없고 피렌체에선가 기차를 타지요.’
 
이탈리아어로 친퀘(Cinque)는 다섯, 테레(Terre)는 땅이다. 오직 기차를 타야만 갈 수 있는 다섯 개의 땅. 얼마나 아름다운 마을이길래 이런 찬가가 나온 걸까, 사람들은 어떻게 이런 곳에 기차 없이는 어디도 갈 수 없는 이런 척박한 땅에 정착하게 됐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이국의 땅이 담긴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세상은 이렇게나 넓다고. 나는 언젠가 지중해의 붉은 태양을 볼 수 있을 거라고. 그렇게 자신을 다독이다 보면 하루가 흘렀다.
 
애석하게도 그 다짐은 몇 년이 지나서야 이루어졌다. 땅끝 해안가에 위치한 친퀘테레의 위치 때문이었다. 마음을 먹고 가지 않는 한 여행 중 우연히 들를 일은 없는 곳이다. 나는 오직 친퀘테레에 가기 위해 아주 비효율적인 여행 경로를 짰다. 인천에서 비행기를 타고 로마로 향했고 피렌체에 이르러 기차에 몸을 실었다. 고단한 여정 끝에 눈 앞에 펼쳐진 친퀘테레는 사람 사는 풍경이라기보다는 한 편의 명화에 가까웠다.
 
해안가를 따라 절벽에 붙은 집들은 모두 지중해를 바라보고 있었다. 노랑, 주황, 분홍빛으로 칠해진 건물 사이사이로 좁디좁은 골목길이 미로처럼 뻗어있었다. 나는 커다란 캐리어를 끌고 온통 계단뿐인 좁은 골목을 낑낑거리며 올랐다. 숙소에 짐을 풀고 주저앉은 것도 잠시. 마을 외곽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채비를 서둘러야 했다. 곧 해가 질 시간이었다.
 
다시 수십 개의 계단을 거쳐 절벽 끝에 난 좁은 비탈길로 향했다. 오랜 시간 나를 다독여주었던 허상을 실제로 마주할 생각에 가슴이 요동쳤다. 곧이어 지중해의 거친 바람이 거침없이 두 볼을 때렸다. 보이는 건 절벽 위의 집들과 바다뿐이었지만, 푸른 물결은 그 자체만으로도 아름다웠다. 나는 이어폰을 꽂고 그토록 고대하던 음악을 재생했다.
 
걱정은 저기 멀리에 푸른 물결이 부는 곳에 내던지고 이제는 그대와 나와 스치는 바람 이걸로 충분한 거지, 그래
 
그날 나는 태어나 가장 아름다운 석양을 보았다. 수평선을 넘어가는 태양은 오랜 기대에 보답하듯 선명하게 불타고 있었다. 푸른 물결이 온통 주황빛으로 물들 무렵, 내 걱정과 설움을 끝없이 펼쳐진 수평선을 향해 던졌다. 어떤 설움은 지는 해를 따라 한순간에 사라지기도 한다는 걸 그때 배웠다. 그렇게 어둠이 내릴 때까지 한참을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실체 없는 허상이 나를 살리는 순간이 있다. 지구 반대편의 풍경을 노래하는 목소리가, 언젠가 닿을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어린 나에게는 위로였다. 그 터무니없던 허상을 끝내 두 손에 거머쥐던 순간을 떠올려본다. 지금도 그 음악을 틀고 눈을 감으면 언제든 그날의 절벽 위로 돌아가곤 한다. 아, 삶의 한순간을 장식한 음악이 있다는 건 얼마나 큰 행운인가.
 

글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