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홀로 길을 걷네. 4] 산나물이 올라오는 집, 텃밭에 채소 씨앗을 넣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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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토끼풀

 
올해는 유난히 꽃소식이 빠르다. 삼월 초순부터 남녘에는 동백과 매화에 이어 산수유가 한창이고, 이미 벚꽃도 분분한데, 북한산 밑에는 아침저녁으로 겨울 잠바를 입어야만 한기를 막을 수 있었다. 삼월 하순이 되어서야 겨우 봄기운이 대문 앞으로 내려왔다. 아이들이 지우개 가루를 뭉쳐 작은 공을 만들듯이, 싸늘한 바람 속으로 산수유가 가지 끝에서 먼지 다발처럼 작고 노란 꽃술을 띄우기 시작했다. 목련은 아직 포근한 외투 속에서 몽우리만 부풀리고 있다. 부엌에서 긴 겨울을 난 호접란과 율마를 낮 동안 처마 밑에 내놓고 봄볕을 쬐게 했다.
 
그러나 밤에는 어김없이 기온이 영하의 호수에 꼬리를 적시고야 만다. 책을 보다가 핸드폰을 보다가 공상하다가 잠자리에 들 때쯤 밤의 기온을 확인해 보면 깜짝 놀랄 만큼 기온이 내려가, 싸늘해진 아이들을 침대방 내 머리맡에 들여놓아야 했다. 얼마 전 영하 3도까지 기온이 내려간 날 집을 비워서 호접란에게 냉해를 입혔다. 율마는 간신히 견뎌 주었는데, 호접란은 잎사귀 끝이 누릇누릇해져서 잘라내고 떼어내야 했다.

텃밭 농사도 너무 늦으면 안 되기에, 옆방의 화가에게 거름흙을 좀 사다 달라고 부탁을 넣었다. 이제 땅을 일굴 차례. 사부작사부작하는 호미질이 전부인 내가 밭 흙을 뒤집기엔 무리였다. 수유리 언니와 김포의 선생님에게 기별했다. 며칠을 기다려 반가운 분들이 도착할 무렵 나는 돼지고기 삶아서 보쌈을 만들고, 방풍나물을 무치고 찰밥에 냉이된장국을 끓였다. 그 전날 후배 작가 한 사람도 우리 집에 와 있었다. 다들 아침을 건너뛰거나 허술하게 먹을 거라고 생각해서 이른 점심을 차렸다. 멀리서 온 친구들에게 따뜻한 밥을 먼저 드리는 게 내 마음에 좋았기 때문이었다.
 
오자마자 담장 밑의 밭 두 이랑을 뒤집어 놓은 선생님은 맛있게 식사하고, 쉬는 틈에 신나게 수다전을 펼쳤다. 제가 옛날에 이렇게 저렇게 실수를 많이 했어요. 와하하, 크크큭, 그래서요? 한참 시간 보낸 뒤에, 아 밭일을 마저 해야지! 하면서 북쪽 텃밭 두 이랑의 흙을 일구었다. 그동안 안 해 본 일을 하던 일일 농부가 구슬땀을 닦으며 쉬자, 우리는 커피를 내렸다. 그 청일점 일일 농부의 수다는 한층 열기를 더해서 소싯적 연애담으로 이어졌고, 솔직하고 철없는 지난날의 영웅담에는 아슬아슬 선을 넘는 이야기가 섞여들었다.
 
어제 도착한 후배 작가의 페미니즘 역린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일촉즉발의 긴장이 오갔다. 아니, 선생님이 그런 사람이었어요? 이대로 가면 아무래도 후배와 일일 농부 선생님이 싸울 것만 같았다. 이야기를 멈추게 하려고 후배 작가가 세게 브레이크를 걸었지만, 세대가 다른 일일 농부는 잠시 어색해졌다가 그걸 농담으로 받아넘기고 또 이야기를 계속했다. 양쪽의 눈치를 살피느라 마음이 불편한 나는 대문 밖의 텃밭은 나 혼자 일굴 테니 오늘은 그만하자고 제안하고 다 같이 외출을 나갔다.
 
텃밭 일궈 주려고 기분 좋게 모여서 밥 먹은 것까진 좋았는데, 수다가 산으로 가자, 조마조마해지기를 두어 번 반복하다 멈추고 말았다. 휴~ 조율 안 된 배는 이렇게 산으로 가는구나. 굳은 흙을 뒤집는 것보다 입으로 간 밭을 정돈하는 게 훨씬 고되었다.
 
다음 날, 나 혼자 대문 밖으로 나갔다. 거름흙 한 푸대를 열어 이랑에 뿌리고, 호미로 흙을 뒤섞으며 밭을 일구었다. 어느새 잡초들이 맹렬하게 자리를 잡고 있어 만만치 않았다. 냉이를 발견하면 따로 모으고, 잡초는 뿌리에 붙은 흙을 털어내고 가장자리로 던졌다. 가만히 보니, 잡초 중에서도 뿌리가 깊은 것은 홀로 내려가고, 뿌리가 얕은 잡초는 옆으로 옆으로 이웃과 어깨동무해서 자란다. 얘들도 다 생각이 있구나, 하하.
 
월동 부추가 뾰족이 자라는 이랑 옆에는 부추 씨를 한 이랑 더 뿌리고, 몇 뿌리 올라온 움파 옆에는 파 씨를 더 뿌려서 한 이랑 가득 파꽃이 피게 해야지. 아직 남은 두 이랑에는 순하게 잘 자라는 공심채와 방울토마토도 한 이랑씩 심기로 했다. 이제 집 안에 둘, 대문 밖에 하나, 세 개의 텃밭이 준비됐구나.
 
다음 날은 씨를 넣는 날!
 
돋구어진 이랑에 호미로 줄을 잡아서 거름흙을 더 넣고 씨앗을 뿌리기 시작했다. 남쪽 담장 밑의 두 이랑은 상추와 쑥갓을 위한 자리다. 세상에나 무릇 씨앗이란 작기도 하지. 하얀 상추씨는 바람에 날아갈 듯 깃털처럼 가벼웠고, 쑥갓 씨는 뾰족한 보라색인데 광택이 있어서 보석 같았다. 밭에 드나들기 편하도록 긴 이랑에 호미로 짤막한 가로줄을 긋고 조로록 씨앗을 넣고 얄팍하게 흙을 덮었다. 그리고 북쪽 밭으로 옮겨갔다.
 
첫째 이랑은 오이 자리, 둘째 이랑은 가지를 위한 자리. 잘 여문 오이씨는 하얗고 단단했다. 작년처럼 지그재그로 사이를 벌려서 두 알씩 흙 속에 넣었다. 가지는 종묘상에 씨앗이 나오지 않았는데, 4월 중순 경에 모종으로 심으라고들 했다. 그래서 가지 이랑은 그대로 비워두었다. 씨를 심은 이랑에 물을 주었다. 물뿌리개로 준 물은 깊이 스미지 않는다. 어서 촉촉하게 봄비가 와야 할 텐데…
 
북쪽 텃밭의 오이와 가지 이랑 뒤에는 일고여덟 평 정도의 밭도 들도 아닌 땅이 남아있다. 옹벽 밑의 이곳에는 아무것도 심지 않고 가만히 둔 곳이다. 해마다 저절로 산나물이 올라오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삼잎국화라는 나물이 봄부터 가을까지 돋아나고, 가을에는 노란 꽃을 피운다. 그 사이에 취나물도 조금씩 올라와서 이곳이 원래 야산이란 것을 말해주고 있다. 부드러운 삼잎국화는 데쳐서 나물로 먹으면 봄여름 내내 밥상이 향긋하고 맛이 있었다. 서리가 내리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연한 잎을 따고 데쳐서 냉동실에 넣어두고 겨울까지 두어 번 먹기도 했다.
 
담장 안에서 산나물을 채취해 먹는 맛이란 얼마나 뿌듯하고 신선하고 쌉쌀했는지! 인간의 영역이라고 옹벽을 치고 그 밑에 집을 지었지만 산나물은 해마다 자기 자리에 돋아나 작은 모둠을 이룬다. 여기 살던 사람들이 다른 계획으로 땅을 파헤치지 않고 그대로 두었으니, 올봄에도 다시 삼잎국화는 힘차게 올라오고 있다. 사람과 산나물과 식용채소가 함께 살아가는 집, 종자와 경로가 다른 생명체가 서로 묘한 균형을 이루고 있는 집! 이 집에서 가장 흥미로운 시간, 봄이 돌아왔다. 씨앗들아, 흙냄새 흠씬 맡고 찬찬히 뿌리를 내리렴! 식물의 뇌는 뿌리에 있다지? 너희들도 깜깜한 땅속에 처박혀 오롯이 홀로 땅 기운을 받아야 멈추었던 생명이 깨어나겠지. 나 또한 긴 밤 불빛 없는 바람 속에 혼자 머릴 처박고 있기를 좋아한단다.
 
간절히 사람을 좋아하면서도, 또 한편 끝없는 어둠 속에 엎드려 고요를 느끼길 좋아하니, 나는 사람인가, 아니면 사람 좋아하는 또 하나의 씨앗-인간인가? 아니면 둘 다일까, 또는 둘 다 아닐까? 여튼 나는 아이들이 독립해 나간 뒤 홀로 한없이 느리고 정밀해져 있다. 그러니 내가 수용할 수 있는 주파수에는 한정이 있고 소음을 견디는 힘도 빈약하다. 이 느린 인간이 때때로 마음이 갈급하여 아련한 환상을 보다가 들리지 않는 소리를 듣다가, 그리워서 울고 설레어서 잠 못 든다. 집이든 길이든 자연 속의 어떤 순간이든 상관이 없다. 그 첫 만남이 내게 큰 영향을 주는 까닭은 그것이 일상이라는 작은 운명의 시간에 나만의 무늬를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내게도 정해진 시간 동안 움직이고 말해야 하는 직장생활을 하던 시기가 있었다. 이제 시스템의 팔에서 풀려난 후에는, 생각으로나마 완전 다른 생태계에 얹혀서 뿌리를 내려보고 싶어진다. 21세기라는 세상의 사고방식과 기술 시스템에 따라가지만 나는 여전히 이런 자본과 권력의 자기복제 메카니즘이 낯설고 서툴다. 아무래도 시인은 한 공동체의 중심이 아니라 제일 가장자리 또는 밑바닥에 서식하는 존재인 것 같다. 평생 소박하고 평범한 생활을 꾸려보려 했으나 좀처럼 허락되지 않았으니, 남은 시간 동안 여기서 내 색깔 내 방식대로 일상을 가꾸어보자.
 
날씨가 몹시 가물었다. 두 달 이상 비 한줄기 내리지 않았다. 사람은 가물어도 물을 찾아 마실 수가 있지만, 봄나무의 뿌리나 씨앗들은 이 메마른 봄에 얼마나 힘이 들까? 며칠 전 산책길에서 먼지바람이 작은 용오름을 만들면서 위로 뱅뱅 솟구치다가 희미하게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작물은 아직 자라지 않았는데, 산속에는 더 먹을 것이 없으니 이때부터 슬슬 야생 짐승이 마을 어귀로 내려올 때인 것 같다. 마을 회관 뒤, 산으로 올라가는 낙엽 사이로 제법 커다란 짐승 발자국이 보였다. 멧돼지가 먹이를 찾아 지나간 것 같다. 조심해야겠다.
 
몇 년 전, 강화도에 갔을 때 바닷가 수풀에서 고라니를 보았다. 산자락에 붙어있는 우리 집 앞에서도 한번 고라니를 보았다. 얼마나 신선하던지! 아직도 그날의 놀라움이 생생하다. 무심히 대문 밖을 나서서 텃밭 울타리 옆으로 내가 지나갈 때, 후다닥 큰 짐승 한 마리가 펄쩍 뛰며 달아났다. 조금만 천천히 갔으면 사진을 찍었을 텐데, 저도 놀랐는지 급히 달아나서 사진을 찍지 못했다. 집 뒤의 야산은 바위가 거의 없는 흙산이다. 가끔은 야생동물이 먹이를 찾아 낙엽을 헤집으며 동네까지 내려오기도 한다는 걸 알았다. 평소에 볼 수 없는 완전히 다른 동물이 내가 사는 곳과 연결된 어디에 산다는 사실이 나를 행복하게 했다.
 
얼마 전 인터넷에서, 대전 현충원 묘역에 꽃사슴이 나타나 남겨진 제사음식을 먹거나 참배객들이 주는 과일을 받아먹기도 했다는 뉴스를 보았다. 청정한 현충원에 꽃사슴이 놀러 왔다가 떡이며 과일이 남겨지는 것을 발견한 것일까? 보통 야생동물이라면, 사람이 나타날 때 위험해서 달아나거나, 방어하고 공격할 텐데, 꽃사슴은 참배객들 사이에서도 여유롭게 움직이고 음식도 받아먹었다니 그 우아한 친화력이 참 놀랍다. 고라니도 현충원 꽃사슴처럼 가끔 우리 동네에 와주면 참 좋겠다.
 
고라니와 사슴은 어느 정도 다를까 궁금해서 찾아보았다. 사슴과 고라니 둘 다 소목의 사슴과에 속하는 짐승이다. 사슴은 수컷만 뿔이 있고 송곳니가 없으며 무리를 지어 생활한다. 고라니는 암수 모두 뿔이 없는 대신 송곳니가 있다. 무리보다는 단독생활을 하는 편이며 새벽이나 해 질 녘을 좋아한다고 한다. 나는 가끔 고라니가 보고 싶다. 저물녘에 서쪽으로 노을이 질 때, 허물어진 담장을 바라보기도 한다. 고라니야 잘 있니? 너는 이번 봄이 어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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