꿩은 머리만 풀에 감춘다 :부정 (Denial)
우리나라 속담 중에 ‘꿩은 머리만 풀에 감춘다’라는 말이 있다. 급하게 몸을 숨기다 보니 겨우 머리만 풀 속에 묻는다는 뜻이다. 머리만 풀에 감춘다고 보이지 않을까?
어리석게도 꿩은 자신이 숨었다고 안심하다가 발각된다. 우리는 살면서 감당하기 어려운 사건이나 상황을 접하게 된다. 그런 상황을 인정하기 거부하게 된다면 머리만 숨기게 되는 꼴이다. 일단 당장은 그 상황에서 벗어난 듯 보이지만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는 오히려 악순환이 반복된다.
30대 초반인 L씨는 혼전임신을 했다. 지금의 남편과 하룻밤에 아이가 생겼다. 남편이 딱히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었으나 아이를 지우는 것은 생각도 못 할 일이었다. 둘은 결혼했고 첫째 아들이 태어나고 7년을 살면서 둘째 아들도 태어났다. 부부 생활은 갈등이 많았고 그녀는 이혼하고 싶어 했다. 첫째 아들에 대한 마음은 매우 양가 적이었다. 아들을 사랑하지만 만약 없었다면 남편과 결혼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자주 생각했다.
그러다 첫째 아들이 집 앞 골목에서 놀다가 자동차에 치여 그대로 사망했다. 충격이 큰 그녀는 첫째 아들의 죽음을 인정하지 못했다. 자신 때문에 죽은 것 같다는 죄책감에 사로잡혔다. 시간이 오래 지나도 아이를 놓아주지 못하는 아내로 인해 남편도 지쳐있었다.
현실의 고통스러운 면을 인정하는 것을 회피하려 한다
부정(Denial)은 현실의 고통스러운 측면을 회피하고자 하는 방어기제다. 가장 흔히 사용되며 삶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 삶이 늘 즐겁고 행복하고 유쾌하면 좋겠지만 그럴 수 없다.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는 순간 고통, 괴로움, 욕심, 시기, 원한, 질투, 슬픔, 미움 등 재앙이 이미 인간 세상으로 쏟아져 나왔다. 이런 감정들은 결코 피해 갈 수 없다. 잘 생각해보면 인생에서 고통이나 힘든 상황을 겪어봐야지 성장할 기회가 생긴다. 온갖 역경을 견디고 벗어나야 비로소 판도라의 마지막에 남겨있던 희망이 보인다. 고통을 회피하거나 부인한다고 해서 있었던 일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직면하고 고통을 감내해야지만 새로운 삶이 있을 수 있다.
부정의 방어기제는 두려움에 대해 직면하기보다는 도망가기를 권유한다. 진짜 기분을 받아들이기 힘들어 그 순간 마음을 보호하기 위해 현실을 부인하게 되는 것이다. 불안해서 술을 마시거나 어딘가에 몰입해 중독에 빠지는 것도 부정의 형태로 볼 수 있다. 근본적인 두려움에서 벗어나고 싶어 자신에게 해로운 방법의 부정을 택한 것이다.
때로는 부정의 방어기제가 도움이 될 때도 있다. 너무 감당하기 힘든 상황들을 경험했을 때 잠시의 부정은 필요하다. 어머니가 병환으로 돌아가셨다고 하자. 슬프고 힘든 상황이지만 장례식도 치러야 하고 오는 문상객도 맞이해야 한다. 그 잠시만은 부정 속에서 자신의 마음을 숨겨야지 장례식을 무사히 마칠 수 있다. 불안한 마음이 생기면 운전 중이나 혹은 건물 안에 들어갔을 때도 ‘혹시 누가 내 차를 박으면 어떡하지…’, ‘갑자기 건물이 무너져 버리면 어떡하지…’ 등의 생각 때문에 운전도 못 하거나 밖으로 나가는 것조차 두려울 것이다. 하지만 이런 위험을 부정하기 때문에 운전도 하고 밖으로 나오게 된다.
부정에는 3가지가 있다. 첫째는, 현실과 불편한 사실 모두를 부정하고 싶은 간단한 부정이다. 둘째는, 축소하는 부정은 사실은 인정하기는 한다. 하지만 심각성에 대해서는 합리화 시키려는 거다. 마지막은 투사다. 현재 일어난 사실과 심각함을 인정하지만 남을 탓하는 것으로 책임을 전가하면서 부정한다. 부정을 ‘자기 기만적 조증’이라고 부르는데 이유가 있다. 자기기만은 사실과 다르거나 진실이 아닌 것을 합리화하면서 사실로 정당화하는 것이다. 쉽게 말해 사실이 아닌 일이나 반대되는 사건에 대해 증거가 충분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실과 다른 방향으로 합리화하면서 믿고자 한다.
자기기만은 원래 대인기만(Interpersonal deception)에서 파생된 개념이다. 조증(Mania)은 말 그대로 비정상적으로 느끼는 기쁨으로 지나치게 낙관적이다. 낙관성이 높은 사람일수록 부정의 방어기제를 자주 사용할 수 있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을 숨기고 그 마음을 인정하지 않는 것도 부정의 방어기제에 해당한다. 자기 기만적 조증은 사실을 왜곡하고 합리화 시켜 다른 방향으로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니 암에 걸렸다고 의사가 이야기해도 믿지 않고 자신이 편리한 데로 스스로를 기만하는 행위를 한다.
부정의 대상이 감정일 수도 있다
부정의 대상이 상황이나 환경이 아닌 감정일 수 있다. 스스로 그 감정을 용납할 수 없을 때 부정을 사용한다. 용납할 수 없는 감정은 있을까? 물론 누군가를 죽이고 싶거나 살인하겠다는 감정은 용납될 수 없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다. 살아온 가정환경에서 필요한 감정에 대한 억압이 이루어진 경우다. 가정 내 분위기가 인정하지 못하는 감정이 있다.
예를 들어 ‘남자는 울면 안 돼. ’라는 가정 내의 규칙이나 가치관으로 인해 슬프지만 참는다. 또 화가 나는 상황에서도 그 감정을 부인하며 화가 나지 않았다고 말한다. 아내는 매번 남편의 생일을 챙겨주었다. 남편은 매번 아내의 생일을 잊어버리고 넘겨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화나거나 서운한 것이 맞다. 하지만 아내는 남편을 이해하는 것처럼 말하며 ‘괜찮아… 그럴 수도 있어.. 난 화나지 않았어 ’ 혹은 ‘ 서운하거나 속상하지 않아’ 고 생각한다. 아내는 어린 시절 가정 내에서 한 번도 부모님이 생일을 챙겨준 적이 없다. 불우한 환경 속에서 감정이 억압되어 있다. 솔직한 자신의 감정마저도 스스로에 부정하고 숨기게 되는 것이다.
어쨌든 감정을 부정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인식을 부정하는 셈이다. 진짜 기분이나 감정을 들여다보기보다는 부정의 방어기제를 통해 인지하기 거부하는 것이다. 감정의 부정은 연인들 간에서도 나타날 수 있다. 상처받기 싫어서 썸만 타고 싶다고 어느 방송에서 연애 고민을 털어놓은 방송인이 있었다. 그녀는 나는 좋아하는 데 상대방의 마음을 그렇지 않을까 봐 누군가와 관계를 맺는 것이 두렵다고 했다. 사실 자신을 정말 불안하게 만드는 것이 있다. 그것을 찾지 못하면 부정이라는 방어기제를 통해 계속 썸만 타려고 하고 제대로 된 연애나 결혼까지 이어질 수 없다.
트로이의 마지막 왕 프리아모스의 딸인 카산드라는 빼어난 미모는 물론 미래를 예측하는 능력을 갖고 있었다. 태양의 신, 예언의 신인 아폴론은 카산드라의 미모에 반해 사랑을 고백한다. 아폴론의 사랑을 받아주는 조건으로 카산드라에게 예언 능력을 준다. 예언 능력을 받은 카산드라는 마음이 바뀌어 아폴론의 마음을 거부한다. 이에 화가 난 아폴론은 카산드라의 설득력을 뺏어버려 예언을 할 수 있지만 그 누구도 예언을 믿지 않을 것이라는 저주를 내리게 된다.
사실 카산드라는 신이 아니기에 아폴론처럼 평생 젊음을 유지하고 살 수가 없다. 인간인 자신은 늙고 병들어서 언젠가는 아폴론이 자신을 버릴 것이라는 두려움이 있었다. 부정의 방어기제는 카산드라처럼 문제에 대해 직면하기보다는 회피를 선택한다.
신경증적 상태의 부정 방어기제는 현실을 왜곡시킨다
사람들은 자신이 듣고 싶은 것만 듣거나, 믿고 싶은 것만 믿으려는 경향이 있다. 때로는 부정이 긍정적인 역할도 한다고 앞서서 이야기했다. 부정의 방어기제는 현실의 사건이나 감정을 감당할 수 없을 때 나타난다. 인정하지 못하기에 회피하거나 공상으로 도피하며 일시적으로 기분 좋은 현실로 대체시키려고 한다.
예를 들어, 어머니가 사망했지만 인정하지 못하고 며칠 동안 다른 곳에 가셨다고 생각한다. 부정의 방어기제가 작동하면 마치 어머니가 살아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등의 현실 왜곡의 형태가 나타난다. 시간이 길어질수록 일상생활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세계 속에 고립된다.
L씨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녀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집 앞 골목이라 안전하다고 생각했고 문 앞에서 놀던 아이가 죽었다. 어느 부모도 인정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특히 그녀는 첫째 아들을 미워했던 부분이 있었다. 아이가 없었다면 결혼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자주 했기에 죄책감에서 더욱 벗어나기 힘들었다. 부정의 방어기제를 사용하며 그 속에 갇혔던 그녀에게는 둘째 아들이 있었다.
몇 년을 방황하던 그녀는 상담을 통해 남겨진 둘째 아들을 볼 수 있었다. 힘든 여정이었지만 현재는 셋이 잘살고 있다. 방어기제는 인식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변화 가능하다. 무의식적으로 나타난 것이 문제다. 자신을 살피고 주변에서 하는 말들을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다. 회피하지 않고 직면하기 위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