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 광장과 「국가의 탄생」, 불온한 자들의 외침과 서울 종로
“아프리카인을 미주로 옮겨온 것은 분열의 파종이었다”
영화사(史)의 거대한 이정표로 꼽히나 동시에 희대의 문제작인 영화 『국가의 탄생』의 인트로는 이렇게 시작했다. 시청자에게 작품의 뜻을 전달하기 어려운 무성영화에서 문자로 된 도입부가 가지는 의미는 당연하게도 매우 크다. 감독이자 각본가인 데이비드 와크 그리피스가 이 영화를 통해 말하자고 하는 바는 상술한 단 한 문장에 압축되어 있을 것이다.
분열의 파종이라는 말과도 같이, 이야기는 노예제 폐지로 인해 촉발된 미 남북전쟁(Civil War)을 소재로 했다. 돈독한 사이였던 북부의 스턴먼과 남부의 캐머런 두 집안은 남북전쟁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남부의 재건을 위해 스턴먼 집안에서 파견한 흑백 혼혈인 실라스 린치는 백인의 권위에 탐욕으로 도전하며 캐머런 가의 영애를 죽음에까지 몰게 된다.
그러다 린치가 캐머런 일가를 탄압하며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하게 되나. 정의로운 KKK단에 의해 사악한 음모가 처단되며 “아리아 인종의 정체성”을 가진 양가의 자식이 마침내 하나가 되는 것으로 이야기가 끝이 난다. 결국, 작품의 주제 의식을 요약하자면 분열의 씨앗이 된 흑인은 악이며, 미국인의 단결을 통한 지위 수호는 추구해야 하는 선이다.
이 영화가 처음 나오고도 100년이 훌쩍 넘었다. 자연스럽게 저작권이 풀리면서 유튜브 등의 플랫폼에 공개 게시되었는데, 댓글 창에선 영미권 시청자들의 다툼이 일어나기도 한다. Black lives matter, 이른바 BLM 시위로 다시금 격화된 미국 내의 인종 갈등으로 혼란스러워진 사회상에 “그가 옳았다”며 작품의 주제 의식에 추파를 던지는 인종차별주의자들의 댓글이 원인이다. 그들은 그리피스가 ‘예언’한 것처럼, “주제에 맞지 않은 권리를 얻은 흑인은 미국 분열의 원흉으로 미국인의 정체성을 무너뜨리며 미국 사회를 병들게 한다”라고 주장한다.
단순 유튜브 댓글 창을 넘어 미국 사회와 정치 안에서도 이러한 주장은 힘을 얻어가는 추세다. 유색인종의 권리 투쟁은 정치권력을 넘어 사회, 문화, 종교 등 다양한 영역에서 벌어지며 성과와 동시에 다양한 갈등을 마주하고 있다. BLM 시위 중 발생한 상점가 약탈과 같은 도덕적 해이 현상과 ‘인어공주’ 영화화의 진저 배제 논란과 같은 권력화 과정에서의 딜레마 등, 수없이 많은 갈등으로 사회의 피로감은 분명히 커졌다. 일각에서는 이 모든 문제가 ‘불온한 자’인 흑인이 무한히 많은 권력을 가졌기 때문이라며, 증오와 분노를 흑인에게 쏟아붓고 있다.
정치 투쟁은 체계와 질서에 의한 기존 위계질서에 도전한다. 이 위계질서, 즉 제도란 선악의 개념이 없는 가치중립적인 용어로 정당성을 부여한다.1) 당연시되는 규범과 모델로 자리 잡은 위계질서의 파괴로 인한 후속 효과는 그 최종적인 결과물과 관계없이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새로운 제도가 정착하기 전까지 우후죽순 나타나는, 극단주의의 출현, 도덕적 방종, 노선의 갈등으로 대표되는 잡음은 정치 투쟁을 마주한 대중의 피로도를 만드는 요인이 된다. 그러며 정치투쟁을 받아들이지 않고 기존 제도를 유지하자는 목소리는 점차 힘을 받는다. 이른바 “반동”이 생기는 이유다.
정치 투쟁의 주동과 반동 대립은 사회 갈등에 불을 붙이는 요인이 되며, 투쟁자의 목표 자체도 부정의 대상으로 올리게 만든다. 정치 투쟁이 지속적인 지지를 받아 버텨나가며 제도를 정착시킨다면 투쟁의 결과물은 새로운 체계와 질서가 되겠으나, 실패한다면 외려 기존 제도로의 복귀를 넘어 후퇴에까지 이르게 만든다. 불온한 자의 정치 투쟁이, 불온하게 인식되는 길 중 하나다. 그런 논리대로라면 “사회적으로 모든 불온을 통제”하는 것, 즉 갈등을 없애는 것이야말로 사회 변화를 위해 필요한 합리적인 대안이겠다.
온전한 합법 노선과 온전한 도덕 노선을 견지하고, 철저한 비폭력으로만 응수하는 길, 즉 불온을 통제하여 사회 갈등을 일으키지 않는 길만 가도록 개별 운동 주체가 아닌 사회가 강요하는 것. 그리고, 그 기준에 따라 투쟁 전체를 평가하는 것. 그것이 가능하다면 바람직한 결론이겠다. 그러나 불가능하다, 물론 개별 운동 주체가 스스로 단속하는 것, 또한 사회가 본연의 규율의 역할을 하는 것은 해야만 하는 일이다. 허나 사회가 모든 운동을 “옳은 방향”만으로 조율하고 평가하며 모든 논의를 종결시키는 것은 얼토당토않은 일이다.
종로에 그 역사의 흔적이 있다. 종로는 한국의 중심부 서울에 흔치 않은 대중 광장인 ‘광화문광장’이 있는 곳이다. 상충하는 사회적 욕구는 한정된 자원의 배분을 통해 해소하여야 하지만, 통제할 수 없는 불특정 다수의 개인이 모인 라운드 테이블에선 항상 온전한 협상이 이뤄지지 않는 경우가 나타나기도 한다. 해소되지 않은 욕구가 언젠가 임계점을 넘어가기 시작하면 시민적 합의로 만든 절차 외에서 협상을 위한 산발적인 정치적 투쟁에 돌입하게 된다. 종로는 더 많은 사람에게 더 큰 불만을 모을 기회, 개인의 불만을 사회의 의제로 만들 기회가 펼쳐진 장소다. 해소되지 않은, 임계점이 넘어버린 의제가 향할 대상도 명확한 장소다. 청와대, 정부청사, 미 대사관 등 한국 정치권력의 상징과 중심이 어디에 있는가. 종로다.
하여간 지역으로서의 종로가 가진 특성은 이 정치적 투쟁에 촉매가 되는 탓에, ‘한국 사회 불온한 자’들의 외침이 가득한 상징적 장소가 되었다. 당장 커다란 시위만 모아봐도, 시민집회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고 평가되나, 동시에 시위의 근거와 폭력성에도 비판이 있는 08년 촛불집회, 평화적, 합법적 시위로 정권 퇴진의 목표는 달성했지만, 전면적 사회개혁의 성과를 도출하는 데에는 실패한 16년 촛불집회가 있다.
상술한 기준대로 이 두 집회에 오컴의 면도날을 잘못 들이대면 어찌 되겠는가. 전자는 시민이 통제하지 못하여 사회 분열이 일어나 완전히 실패한 정치 투쟁으로 보아야 하는가? 후자는 시민 통제에 성공하여 사회 분열이 없얶고 소기의 목적도 달성해 완전히 성공한 정치 투쟁으로 평가해야 하는가? 아니다. 결코, 그럴 수 없다. 오히려 그런 판단만 반복하게 된다면, 정말 중요한 판단에는 손을 놓게 만든다. “사회 변화에 대한 본질적인 판단”에 쓸 에너지를, “투쟁의 각론 검토”에만 쓰게 만드는 것, 도대체 무슨 가치가 있을까.
사회 투쟁에는 갈등이 따른다. 영국 BBC의 2018년 설문조사2)에서 드러난 바와 같이, 역동적 사회변혁을 겪고 있는 한국 역시 사회 갈등이 심각한 국가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동시에 한국은 세계에서 순위권으로 민주주의가 매우 성숙한 축에 속하는 국가이기도 하다.3) 갈등이 죄라면, 분열을 일으키는 불온한 외침이 죄라면, 이 모순은 도대체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되묻고 싶다.
개별 운동의 준법성을 지적하고, 모든 시민이 만족할 수 있는 대안을 찾아내는 노력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다. BLM 시위에서 상점가에 약탈이 벌어지든, 도덕적 방만에 기반한 운동이 벌어지든 사법 처리도 하지 말고 그냥 알아서들 침묵하라는 냉소주의적인 궤변을 펼치고 싶은 것도 아니다. 사회 변화의 방향을 제대로 판가름하지도 않고, 진보하자면 모조리 다 옳다구나 하는 모험주의를 찬양하는 것도 아니다.
단지, 사회 변혁과 정치적 투쟁의 과정에서 마땅히 지어야 하는 부채, 사회 갈등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관리할 의사 없이 “분열의 파종”이란 낙인을 찍고 무책임하게 방치하며 도덕적 우월감을 충족하려는 시도가 이어진다면 그 어떤 변화도, 유지도 없이 퇴행만 반복될 뿐이다. 투쟁을 통한 배분 과정에서 나타나는 이견과 인간 본연의 한계로 나타나는 각론의 실패를 본론 전체의 파멸로 여기는 태도는 결국 21세기에 성인의 탄생을 망상하는 꼴이다. 그것도 집단으로.
「국가의 탄생」의 마지막 장면은, 결혼한 두 백인 가정의 남녀가 신혼여행을 떠나 미국의 현실을 개탄하며 당대 앵글로 권력이 추앙하는, 진정한 “신의 나라”, 평화로운 백인우월주의 질서가 이뤄지는 “그들만의 유토피아”가 펼쳐지길 소망하는 것으로 끝난다. 결국, 영화 저변에 깔린 정서는 흑인이 권력을 얻는 것 자체에서 얻는 두려움뿐만이 아니라, 당장 흔들리는 구체제의 질서와 변동하는 사회의 값을 치를 수 없다며 버티는 소아적 감정이 배경에 있었던 셈이다. 그들은 그 어떤 것도 계산하지 않고, 판단하지 않은 채 말초적 자극에만 반응하는 “오리 삑삑이 인형”과도 같은 태도로 사회 변혁에 임했다.
우리도 마찬가지일지 모른다. 변동하는 한국 사회의 두려움을 외면하는 것만큼 미련한 행동은 없다. 종로 광화문에 열린 분열의 광장을 닫지도, 도덕적 실패에 개탄하고 냉소하지도 말자. 불온한 자들의 외침에 따르는 부채를 안고, 적극적인 판단으로 채무 관리를 해나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추구해야 하는 “현대 민주주의의 정체성”, 진정한 선이 아니겠는가.
주석.
1. Meyer&Rowan(1977), Institutionalized Organizations: Formal Structure as Myth and Ceremony. American Journal of Sociology
2. Ipsos(2018), “BBC Global Survey: A world divided?”
3. The Economist Intelligence Unit(2023). “Democracy Index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