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복을 벗고 세상을 입다] 결국 취향이었어

일러스트=강동현

 
로마에 첫걸음을 내디딘 건 스무 살의 겨울이었다. 이전까지 내가 로마에 대해 가진 이미지는 ‘신화 속, 명화 속에 나온 바로 거기’였다. 오드리 헵번이 계단에 걸터앉아 젤라토를 먹던 도시. 아주 오래된 길들이 살아 숨 쉬고 그 끝에 천 년은 거뜬히 버틴 건물이 자리하고 있는 땅. 도시 전체가 거대한 박물관과 같아서 유명한 유적지만 둘러보기에도 시간이 부족하다는 여행객들의 성지.
 
제법 쌀쌀한 겨울바람에 놀라 얇은 코트 깃을 여미며 좁은 골목길을 걸었다. 울퉁불퉁 튀어나온 돌들에 캐리어가 신음하듯 흔들렸다. 들어있는 게 옷가지뿐이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예약해 둔 호텔을 찾는 것이 첫 미션이었다. 낡고 저렴한 호텔은 1박에 6만 원 남짓이었는데, 당시의 나에게는 굉장히 큰돈이었다. 물론 게스트하우스 6인실 같은 곳에 묵었다면 훨씬 저렴했겠지만, 혼숙에 익숙하지 않았을뿐더러 밤새 누군가 내 짐을 털어갈까 전전긍긍하며 버틸 자신은 없었다.

로마는 첫인상부터 범상치 않았다. 숙소를 예약할 때부터 낡은 시설에 대한 마음의 준비는 해둔 상태였지만, 막상 수동으로 철문을 직접 여닫아야 하는 엘리베이터를 태어나 처음 보고 있자니 감회가 새로웠다. 삐걱거리는 문을 밀어내며 이렇게 오래된 기계에 나를 맡겨도 될지 잠시 의문을 품기도 했다. 다행스럽게도 이곳의 사람들은 이런 모습에 익숙한 듯 태연하게 행동했고 나도 덩달아 익숙한 척을 했다.
 
이탈리아는 나의 첫 유럽 여행지였다. 나는 여행을 떠나기 한참 전부터 이탈리아 여행에 관한 온갖 블로그 글을 섭렵했다. 여행 후기를 얼마나 읽어댔는지, 태어나 처음 가본 테르미니역이 익숙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여행에 대한 기대도 한몫했지만, 사실 스무 살의 나에게 지구 반대편에서의 실패란 너무나 치명적이라는 게 그 이유였다. 1년 내내 모은 돈을 들고 짬을 내어 떠난 여행. 그 한정된 시간과 자본 안에서 가능한 실패 없이 최고의 경험을 하고 싶었다.
 
지구 반대편에서도 배고픔은 약속한 듯 제시간에 찾아오곤 했다. 나는 현지인들이 자주 간다는 레스토랑을 찾았다. 구글맵을 뒤져 평점과 후기를 확인하는 건 필수였다. 햇살이 잘 드는 명당자리에 앉아, 여느 때처럼 파스타를 골랐다. 당시 나를 안심하게 했던 한 가지 사실은 이탈리아에서는 아무 파스타나 시켜도 늘 맛있다는 거였다. 우리나라에서 맛없는 김치나 뚝배기 불고기를 마주할 일이 드문 것처럼, 이탈리아에서 파스타를 시켜서 실패할 확률은 거의 없었다.
 
반면 음료는 달랐다. 무난하게 콜라를 마신다면 실패가 없겠지만, 나는 음료를 고를 기회가 주어진다면 언제든 레드와인을 시키는 편이었다. 화이트와인이나 위스키 메뉴에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잠시 멈칫했다. 메뉴판 중앙에 ‘아페롤 스프리츠’라는 이름이 크게 적혀 있어서다.
 
아페롤 스프리츠는 이탈리아의 대표적인 식전주다. 이탈리아의 증류주인 아페롤에 탄산수와 얇게 저민 오렌지를 넣으면 아페롤 스프리츠 칵테일이 된다. 순간 머릿속에 수많은 블로그 글이 스쳐 지나갔다. 이탈리아에 가면 꼭 아페롤 스프리츠를 마셔봐야 한다고. 이탈리아 음식에 이보다 잘 어울리는 술은 없을 거라던 사람들의 말이 떠올랐다. 나는 레드와인이 적힌 메뉴판을 힘겹게 내려놓고 아페롤 스프리츠를 주문했다. 레드와인을 주문하는 게 가장 실패 없는 길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국민 술’이라는데 한번 맛은 봐야 하지 않겠는가.
 
약간의 기다림 끝에 파스타와 음료가 나왔다. 잔에 담긴 말간 오렌지색의 액체에 마음이 들떴다. 한눈에도 달콤하고 청량한 맛이 날 것 같았다. 기대 끝에 잔을 들고 크게 한 모금을 삼킨 나는 이내 인상을 찌푸렸다. 내가 이미 알고 있는 맛이었다. 어릴 적 열이 오르면 한 숟가락씩 삼키던 오렌지 맛 해열제. 달고 쓰고 인위적인 오렌지 향이 났다.
 
내가 첫입에 매력을 발견하지 못한 것일지도 모른다며 몇 모금 더 꾸역꾸역 넘겨보았지만 결국 반도 마시지 못한 채 잔을 멀리 밀어두어야 했다. 좋은 경험을 한 셈 치고 와인 한 잔을 더 시키고 싶었지만, 주머니 사정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 이후로도 이탈리아에 며칠 더 머물렀지만, 다시는 아페롤을 입에도 대지 않았다.
 
당시 나는 나의 어리석음에 한탄했다. 레드와인을 시켰다면 틀림없이 행복했을 텐데, 나의 적고 소중한 예산을 맛없는 탄산 해열제에 써버리다니! 하지만 이제 와 생각해 보면, 그건 좋은 경험이었다. 그때 나의 주류 취향을 확실히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 내 선택에 문제가 하나 있었다면, 내가 사랑하는 와인 대신 아페롤을 주문한 이유가 ‘남들도 다 이걸 마시기 때문’이라는 거였다.
 
가끔 나 자신의 취향보다 타인의 평가가 더 그럴싸해 보일 때가 있다. 저 멀리 보이는 공원의 풍경이 정말 여유롭고 멋져 보이는데도, 유명한 유적지에 가 봐야 한다는 이유로 끝내 외면하고 발길을 재촉하는 어리석은 선택을 기어이 내린다.
 
몇 번의 경험 끝에 알게 되었다. 꼭 먹어야 한다는 말을 듣고 따라 먹었던 음식과 유명하다는 이유만으로 갔던 곳들은 기억 속에서 사라진 지 오래라는 걸. 콜로세움도 포로 로마노도 분명 멋진 곳이었지만, 지도도 보지 않고 불쑥 들렀던 성당에서, 젤라토를 먹다 다리가 아파 무턱대고 주저앉았던 계단에서 보냈던 시간이 내게 훨씬 더 오랜 위로가 되어주었다.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취향이란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방향’을 뜻한다. 어쩌면 젊은이가 확고한 취향을 갖지 못하고 세간의 인기와 평가를 따르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마음의 방향을 정할 만큼 폭넓은 세상을 보지 못했으니까. 그러나 수많은 선택이 쌓이며 세상은 자꾸만 넓어진다. 한 뼘 넓어진 세상만큼 마음이 생기는 방향도 조금 더 자유로워진다.
 
어쩌면 여행이란 경험 끝에 비로소 취향을 찾아내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입맛에 맞던 와인을 벗어나 해열제 맛 칵테일을 맛보면서. 잘못 들어선 길에서 의외의 경로를 찾아내면서.
 

글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