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홀로 길을 걷네. 5] 경주남산, 천년 만에 깨어난 마애대불과 보살유희좌상불
텃밭에 채소 씨앗을 뿌려두었으니, 씨앗은 땅과 날씨에 맡기고 소풍 한번 다녀와야지 싶었다. 어디로 갈까 생각을 하다가 나는 멀리 가는 여행 대신, 오래된 시간 속을 걷고 싶어서 경주를 택했다. 경주는 재작년 가을에 가서 단풍과 함께 안압지의 밤풍경에 빠졌다가, 용담계곡의 고요한 단풍과 운곡서원의 찬란한 은행나무를 보고 왔었다. 이번에는 세상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야외박물관, 경주의 금오산 또는 남산으로 갈 터이다. 경주남산은 2000년 12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된 귀중한 보물인데 이제사 처음 가본다.
아침 6시 40분에 압구정동에서 버스를 타야했다. 그러면 5시20분에는 집을 나서야 했는데 새벽에 도시 외곽에서 버스를 기다리느니, 부암동에 비어있는 후배 화가의 집을 생각했다. “나 하룻밤 자고 가도 될까?” “물론이죠!” 야호, 이른 저녁을 먹고 가방을 챙겨 집을 나섰다. 부암동 언덕은 내가 좋아하는 동네, 여기서 하룻밤이라니 지금부터 여행이다. 후배 화가의 집은 인왕산 치마바위가 바라보이는 백사실 계곡의 입구에 있었다. 나도 잘 아는 그 어머니와 딸이 살고 있던 집, 목탄그림 한 점이 현관 앞에서 나를 맞았다.
새벽의 알람소리를 듣고 커피를 한잔 내려 마시고 세수하고 집을 나섰다. 경복궁 역에서 3호선 전철 타고 압구정역에 내려 버스에 올랐다. 온 산천이 연두와 연분홍, 더 진한 녹둣빛으로로 물이 올랐다. 서울을 빠져나가자, 계곡과 언덕이 커다란 연둣빛 꽃다발을 든 채 지나가는 버스와 차들에게 인사를 하는 듯했다. 눈을 떼기 어려운 촉촉한 봄기운이 바람과 함께 밀려와서 버스 속의 나를 스치고 지나갔다. 겨우내 추위를 견뎌온 메마른 몸을 말랑말랑하게 포옹해 주는 듯했다. 밤새 잠을 못 이룬 나는 살짝 풋잠에 들었다가 깼다. 경주에 도착하니 11시, 오후 산행을 위해 이른 점심을 먹었다.
열암골 탐방은 금오산의 남동쪽 입구에서 시작된다. 과연 어떤 모습의 불상들을 만날지 기대가 됐다. 이쪽은 원래 찾는 사람이 없어 한적한 골짜기였으나, 2005년 폐사지 주변에서 기적같이 부처님의 머리가 발견되고, 2007년에는 마애대불까지 발견되면서 유명해진 골짜기다. 산길 따라 올라가는데, 이미 진달래는 지고 없었다. 흩어진 돌부리와 부서진 바위 사이로 진달래보다 꽃잎이 크고 색깔은 더 여린 꽃이 보였다. 안내하는 선생님이 이 꽃의 이름은 연달래라고 알려주셨다. 진달래가 스무 살 아가씨라면 연달래는 점잖은 4,50대 아주머니 같은데, 예전엔 진달래가 예쁘더니 이제 이 꽃이 더 좋다고 경주남산연구소 김구석 선생님이 말했다. 다투어 피어나던 봄꽃은 지고, 그 산길에 연달래가 나와서서 우리를 마중해 주니, 우리가 꽃구경을 하는 게 아니라 꽃이 사람구경을 하는 듯도 했다.
골짜기에 뒹구는 돌멩이와 작은 바위 사이로 깨진 탑의 조각을 보면서 폐망한 나라에는 절과 석불마저 온전히 이어지지 않는 것을 보았다. 열암골에서 처음 만난 불상은 쓰러져 엎어진 채로 발견되었다. 자그마치 높이 5.6미터에 가까운 거대한 마애불상인데, 무심하게 지나치면 길쭉한 바위로만 보여서 그 앞쪽에 불상이 새겨진 것을 알 수가 없었다. “저 길쭉한 바윗돌 옆으로 가서 아래쪽을 한번 들여다 보세요” 하는 안내 말씀을 듣고 우리는 ‘저기 뭐가 있다는 건가?’ 하며 쓰러진 바위 옆으로 다가갔다.
바윗돌 아래로 머리를 숙여 그늘을 들여다보았다. 밋밋한 곡선이 지나갈 뿐 특별한 무언가가 보이지 않았다. 아래쪽 끄트머리는 더욱 어두웠는데 자세히 보니 거기 부처님의 왼쪽 얼굴이 엎어져 있는 것이 아닌가! 왼쪽 이마와 눈썹, 볼, 입모양이 눈에 들어왔다. 이 길쭉한 바위는 앞면에 부처를 새긴 마애대불이었던 것이다. 아직도 발견 당시의 그 자세로 넘어져 있었는데, 다행히 얼굴은 땅에 닿지 않은 채 아슬아슬한 틈이 남아있었다 . 거대한 폐사지 경주 남산 불상이 충격적인 각도로 우리를 압도해 왔다. 그 오랜 세월 저 큰 몸으로 엎어진 채, 역사의 무상함을 관상하고 있었던 걸까?
쓰러진 마애대불 옆으로 이삼십 미터 위에는 온전한 모습으로 복원된 석불좌상이 하나 연화대좌에 단정히 앉아 있는데, 이 부처님은 오랫동안 몸체만 존재했고 얼굴이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2005년 경주남산지킴이 김구석 선생님이 얼굴을 발견해서, 지금처럼 복원한 것이다. 자세히 보니, 머리와 얼굴 윤곽은 온전했지만 코와 입이 뭉개져 나가고 목주름 부분에 석불의 몸체를 찾아붙인 선이 보였다. 천년의 세월을 지나 몸은 얼굴을 찾았고, 얼굴은 몸을 찾았다. 얼굴 뒤의 보리수 광배도 몇 조각으로 깨어졌던 것을 이어붙였다.
자연의 힘인지, 역사의 쇄망 때문인지 큰 불상은 엎어져서 천년, 석불좌상은 목이 잘린 채 천년을 지냈다. 모진 풍파를 겪고 앉은 석불좌상은 코와 입이 뭉개진 상태이나 얼굴 전체에 흐르는 기운과 눈썹만으로도 자애로운 아우라는 그대로였다. 열암골 석불좌상은 이처럼 얼굴이 훼손됐고, 크기는 작았지만 석굴암의 본존불상과 닮아있었다. 석굴암의 본존불은 우리나라 불상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모든 불상의 기준이 된다고 했다.
머리가 아래로 쏟아진 채 넘어진 마애대불은, 그 위로 임시 지붕을 만들어 본격적인 복원을 준비하고 있었다. 문화재청에서 이 마애불상을 복원한다면 무거운 바위를 일으켜 탄탄한 연화대좌에 세우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정상적인 모습으로 세우지 말고 얼굴아래 비탈길을 더 깊이 파내고 이렇게 엎드려 있는 불상을 지금 이대로 볼 수 있도록 했으면 한다. 어떤 시대라도 중생의 삶은 힘들고, 개인의 내면에는 상처가 있다. 괴로움에 헉헉거리던 한 나그네가 무심히 금오산에 오르다가, 골짜기 아래에서 엎드려 쓰러져 있는 부처와 이마를 맞대고 만난다면, 그 순간 홀연히 돈오에 들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나면 남아있는 일상의 날들 속에서 좀더 가볍게 돈오점수의 삶을 가꿔갈 수 있지 않을까?
전생인 듯 아득했던 날, 나는 혼자서 뇌경색으로 쓰러진 어머니와 두 아이들을 데리고 직장에 나가고 있었다. 세상의 햇빛은 내게 너무 눈부셨다. 차오르는 울음을 흘려보낼 어둑한 공간이 필요했는데 거기가 성당이었다. 나는 때때로 성당 뒷자리에 들어가 넓고 어둑한 공간에서 가만히 울다 나왔다. 세상에 수많은 성인상과 불상이 있지만 한결같이 아름다운 자리에 고요한 얼굴이다. 나하고는 그 거리가 너무 멀었다. 경주남산에도 전국의 어떤 절에도 고매한 부처님은 많으나 함께 울어주는 부처님은 없다. 나는 무너진 골짜기에서 얼굴을 맞대고 울어주는 부처, 소리치는 부처를 보고 싶다.
남산은 비안개가 감싸고 있었다. 봉수대 근처에 오니 연달래 꽃잎이 팔랑이는 나비떼처럼 군락을 이루어 흔들리고 있었다. 고위봉 정상에는 크지 않은 바위들이 절벽 위에서 표표히 소나무를 기르고 있었다. 멀리 경주 시내를 내려다 보다가 아래쪽 바위 옆에 들어서니 또 한번 확트인 벼랑 끝이다. 몸을 돌려 뒤를 보니 얇게 파낸 바위 안쪽에 둥두릿하고 편안한 얼굴의 외할머니같은 보살상이 새겨져 있었다. 이름하여 신선암 마애보살유희좌상이다.
자손들의 일상을 보살피는 후덕한 얼굴에 왼쪽 무릎은 접고 오른쪽 다리는 대좌 아래로 늘어뜨려 그지없이 편안하다. 머리에는 보관을 썼지만 관 아래로 머리채가 흘러내려 어깨에 닿아있다. 오른손에는 꽃가지를 들고 외손으로는 막 설법을 펼칠 듯하다. 옷 주름이 피어오르는 구름무늬와 만나서 얼핏 보면 구름 속에서 내려온 듯도 하고, 어쩌면 바위 속의 방안에서 막 나온 듯한 모습이다. 신선사상과 불교사상이 한 몸으로 구현된 할머니부처님! 신라인들은 드디어 저런 할머니보살님을 모셨구나. 아니, 살아생전 보았던 그들의 할머니 얼굴에서 보살과 부처의 모습을 보고, 돌아가신 그분들이 높은 곳에서 영원히 경주땅을 지키고 보살펴 주기를 희원했구나
자애로운 할머니 마애불을 돌아 아래로 내려오면 칠불암이다. 작은 암자 옆에 육면체 바위기둥을 다듬고, 사방 네 명의 부처님을 새겼다. 게다가 병풍을 두른 듯한 뒤편의 바위에는 삼존불이 새겨져 있으니 무려 일곱 구의 마애불상군이 우리를 맞는다. 어떤 행사가 있는 것일까? 어디서 이렇게 많은 부처님이 왔을까? 일곱 분의 부처님이 절벽 중간의 이 자리에 모여 있으니 놀라울 뿐이다. 네 명의 불상 중에서 정면을 향한 불상은 약병을 들고 있어, 약사불이다. 위기에 빠진 이는 누구일까? 평민일까 귀족일까 아니면 신라왕조일까? 암자 주변에 약사경과 금강경을 새긴 석재 파편이 발견되었다는데, 원래 사찰의 이름은 밝혀지지 않았다.
봉화골을 따라 내려오면서 우산을 폈다. 종일 엉겨 있던 안개비가 방울이 되어 듣기 시작했다. 고즈넉한 연못 서출지를 지나서 마을 가까이에서 남산동 염불사지 삼층석탑을 보고, 신라 불교의 흔적이 얼마나 오랫동안 방치되고 훼손되어 왔는지 설명을 들었다. 미륵곡 선각마애불과 탑곡에서도 마애불상군을 만났다. 큰 바위는 큰 바위대로 작은 바위에는 작은 바위대로 바위마다 저마다의 부처를 그리고 새겼다. ‘신라인들은 바위에 부처를 새긴 것이 아니라 바위 속에 있는 부처를 보고 정을 들고 그 속에 숨어계신 부처님을 찾아낸 것’이라는 김구석 선생님의 설명을 들으니, 신라 사회에 불교가 얼마나 깊이 스며들었는지 느낄 수 있었다. 부처는 신이 아니고, 누구나 마음 속에 불성이 있다지 않는가.
마을에 내려오니 저녁이었다. 늦은 오후까지 농부 한 사람이 벼논을 일구는 트랙터를 부리고 있었는데, 백로 두 마리가 탈탈거리는 트랙터 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진지한 자세로 논 가운데에 서서 농사일에 참견을 하고 있다니…… 후손들이 지키지 않는 벼농사를 백로가 지키고 있구나. 그 모습이 아름다워 봄 저녁의 무논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혹시 들판 너머 어디선가 ‘에밀레~’ 종소리가 들리는지 나는 귀를 기울여 소리를 찾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