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복을 벗고 세상을 입다] 가장 싱그러운 마음

일러스트=토끼풀

 
내가 자주 가는 빌딩의 주차장 한구석에는 작은 부스가 있다. 발렛파킹을 담당하는 반장님의 자리다. 빌딩 입구를 오갈 때마다 꾸벅 인사를 하면 반갑게 받아주신다. 가끔은 한참을 서서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그렇게 마주친 지도 벌써 몇 달이 되었다.
 
어느 날, 평소처럼 꾸벅 인사를 하고 빌딩으로 들어가려는데 기사님이 급하게 나를 불러세웠다. “잠시만 기다려 봐요!” 입구에 멀뚱히 서서 기다리는 내게 두 손을 모아쥔 기사님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내 손에는 이내 귤 두 개가 쥐어졌다. 과일을 잘 모르는 내가 보아도, 진한 주황색의 귤은 한눈에 봐도 맛있을 것이 분명한 자태였다.

“지금 하나 까서 먹어봐요! 진짜 맛있다니까!” 기사님의 반짝거리는 눈빛에 가방을 내려놓고 귤을 하나 깠다. 내 시식 후기가 궁금하신 모양이었다. 기사님은 귤을 까는 내 옆에 서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사실, 그 귤 우리 가족이 재배한 거예요. 내가 제주도 사람이거든.” 입안에 귤 한 조각을 넣자마자 상큼하고 달콤한 맛이 입안에 퍼졌다. 괜한 자부심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농약을 쳐서 겉이 반질반질하고 예쁜 귤도 있긴 하지만, 우리 집 귤은 안 그래. 그래도 농약 친 것보다 훨씬 맛있어요. 그쵸?” 빈말할 필요도 없었다. 절로 고개가 끄덕여질 정도로 귤은 맛있었다.
 
“원래는 나도 이맘때쯤이면 매년 내려가서 귤 농사를 도와요. 나만 그런 게 아니고, 온 가족이 다 하지. 그런데 올해는 이 주차 일 하느라 못 갔어. 그래도 우리 가족이 귤을 이렇게 보내줬지. 정말 맛있지요?” 나는 이렇게 맛있는 귤은 오랜만이라고 칭찬하며 답했다. “고향에 못 내려가셔서 마음이 쓰이시겠어요.” 내 말에 반장님은 가족을 떠올리는 듯 잠시 허공을 바라보았다. 올해는 일 때문에 못 내려간다고 이야기하는 마음도 귤 몇 박스를 진 듯 무거울 터였다.
 
“내가 이 일을 왜 하는 줄 알아요?” 갑작스러운 화제 전환에 반장님을 쳐다보았다. 하루 종일 냉난방도 제대로 되지 않는 좁은 부스에 앉아있어야 하는 일. 휴일에도 명절에도 고향에 내려가지 못하게 만든 일. 나 역시 반장님을 향한 빌딩 주인의 처우를 보며 분노한 적이 몇 번 있었다. 그러나 반장님의 표정은 항상 밝았다.
 
반장님은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하듯 갑자기 목소리를 낮췄다. “사실은 내가 우리 부인이랑 스위스에 가려고 하거든.” 그리고 생각만 해도 행복하다는 듯 함박웃음을 지었다. 잔뜩 신난 그 얼굴을 보며 나도 스위스에 한 번 가 봤는데 정말 좋았노라고, 풍경이 예술이었다고 답했다. 그러자 반장님은 좋은 대화 상대를 찾았다는 듯이 이야기를 계속했다.
 
“둘이 스위스에 가려면, 못해도 500만 원은 든대요. 나이 육십이 넘도록 한 번도 못 가봤어. 그래서 고향에 못 가도 이 일은 계속하는 거예요. 500만 원 모아서 한번 가보려고. 우리 부인은 내가 여기서 무슨 일하는 줄도 몰라! 나중에 놀래켜주려고,”
 
깜짝 놀랄 아내의 표정을 상상하는 듯, 반장님은 키득키득 웃었다. 예순이 넘은 어른도 이렇게 아이처럼 웃을 수 있구나. 보기만 해도 행복해지는 웃음이었다. “저도 스위스가 가장 좋았어요. 사모님도 분명 좋아하실 거예요.” 그렇게 말하고 인사를 하며 돌아섰다.
 
그 미소를 곱씹어 보면서, 내가 이전에 비슷한 표정을 본 적이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파리 샤를 드골 공항에서 길을 잃은 노부부를 마주친 적이 있었다. 당연하게도 공항은 외국인으로 가득했다. 한국인 노부부는 그 복잡한 공항에서 나를 발견하고는 멀리서부터 달려와 길을 물었다.
 
“마침 저랑 같은 버스를 타시네요. 정류장까지 같이 가면 되겠어요.” 내 대답에 아주머니는 한시름 놓았다는 듯 숨을 내뱉었다. 버스정류장을 향해 걸어가면서 두 분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사실 우리가 해외여행이 처음이에요. 딸내미가 티켓은 끊어줬는데, 길이 복잡해서 알 수가 있어야지.” 아주머니는 “그쵸?”하며 남편을 쳐다보았다. 길을 몰라 그 자리에 오래 서 있었다고 했다.
 
“딸이 길을 모르면 한국인한테 물어보라고 했어요. 그런데 지나가는 족족 외국인뿐이고 동양 사람이 지나가도 누가 한국인인지도 알 수가 없잖아요. 그러다 멀리서 아가씨가 보이는 거예요. 손에 출력해 온 티켓을 들고 있는 걸 봤는데, 내가 우리 남편한테 그랬어. 저렇게 꼼꼼하게 서류를 챙겨온 걸 보면 한국인이다! 얼른 가서 붙잡고 물어보자고요.”
 
그 말에 웃음이 터졌다. 홀로 낯선 땅에 내려 긴장한 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는데, 웃음과 동시에 마음이 풀리며 즐거움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버스를 타는 곳에 도착하자, 아주머니는 신이 나서 여행지에서 하고 싶은 일을 남편에게 털어놓기 시작했다. 버스에서 내리며 짧은 눈인사를 했다. 비록 오늘 처음 만난 데다 다시는 마주칠 일이 없는 인연이겠지만, 즐거운 여행을 하시기를 진심으로 빌었다.
 
그날 아주머니의 얼굴에 띈 미소는 빌딩 1층에서 마주친 반장님과 참 닮아있었다. 반장님도 스위스의 공항에 내리면서 다시 이런 미소를 짓지 않을까. 하나 남은 귤을 손안에 꼭 쥐면서, 내가 받은 싱그러운 마음에 대해 생각했다. 이렇게 맛있는 귤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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