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홀로 길을 걷네. 6] 용장골 삼층석탑과 삼륜대좌불, 하늘의 우박세례
다음날 탐방은 일찍 시작되었다. 6시 50분에 아침 식사를 해야해서 새벽에 깼다. 한옥으로 지어진 숙소의 창밖에는 서까래 아래로 소나무 가지가 뻗어나와 있고, 들판 건너 낮은산에는 어제부터 몰려온 운무가 포근하고 촉촉한 목도리를 둘러놓았다. 그 풍경은 내게 익숙한 도시풍경과는 다른 위안의 메시지를 주는 듯했다. ’나, 비구름은 높은 하늘에만 있지는 않아. 언제나 너의 주변에 내려온단다.’
식사를 마치고 우리가 버스에 오르자 차는 배동(또는 배리)으로 향했다. 오늘은 경주남산의 서남쪽 배동으로 올라가 금오산 정상(468m)을 넘어 용장골로 내려오는 코스다. 늦게 핀 겹벚꽃 분홍 물결이 배동 입구에서 우릴 맞는다. 아름다웠던 나라 신라의 고도 경주와 봄비에 얼굴을 부비는 겹벚꽃은 참 잘 어울린다. 입구에서 200여 미터 걸었을까? 서낭당 같은 지붕 아래 모셔진 석조여래삼존입상을 보았다. 세 구의 불상은 두툼한 몸체에 얼굴과의 비례는 4등신에 가까운 인자한 모습인데, 그 표정이 한국인의 원초적 미소를 띠고 있어서 놀라웠다.
완성된 부처의 모습이라기보다는 시골 할머니와 같은 푸근하고 자애로운 여성적인 모습이었다. 돌 속에 박힌 흰 무늬도 덜 다듬어진 몸체의 윤곽선도 편안하고 투박한데 그래서 더 따뜻하였다. 가운데 자리잡은 불상은 코가 깨어진 채로 서 있었는데도 미소는 어찌나 깊고 온화한지 처음 온 숲길을 환히 밝힌다. 삼존석불을 보고, 삼릉으로 가는 길에는 이름없는 사람들의 공동묘지가 남아있었는데. 그들은 숨소리가 들릴 듯이 가까이 모여 있었다. 그런가하면 소나무 숲 사이로 잔디를 덮고 누워있는 8대 아달라왕과 53대 신덕왕, 54대 경명왕의 무덤이 한줄로 나란히 나타났다.
세월의 차이가 많이 나는 세 위의 왕릉을 한곳에 나란히 배치한 일도 고려나 조선의 왕릉과는 다르다. 살아 만나지 못한 조상과 후손이 시간을 건너 한곳에 모여있는 것이 이채로웠다. 우리 조상은 저렇듯 아련한 능선을 타고 미끄러지듯 저승길을 떠난 것일까. 그 둘레에는 소나무 가지가 아래로 내려와 능의 곡선을 쓰다듬고 있어 그윽함을 더해 주었다.
삼릉계곡을 따라 올라가 제1절터에서 깨어진 석탑 조각을 보았고, 제2절터에서 머리 없는 석조여래좌상을 만났다. 머리는 결실되었고 몸체만 1964년에 계곡 옆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대좌도 깨어지고 머리도 없이, 양손도 훼손되고 마모된 상태이나 가사자락의 끈과 매듭은 외쪽 가슴에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깨어진 탑신과 불상을 보면서 천 년의 시간을 거슬러 신라인의 꿈과 생활을 잠시 상상해 보았다. 옷자락 아래 연화대좌도 깨어져 사람들이 작은 돌멩이를 모아 괴었다.
조금더 올라가면 넓은 바위 위에 길쭉한 바위들이 2층으로 쌓여있고 한가운데 높은 바위에 마애관음보살입상이 보인다. 바위를 크게 다듬지 않은 채로 얼굴과 상반신은 도드라지게 깎아냈으나 다리 아래 발치까지는 낮게 깎아 바위 속에 그대로 둔 듯한 모습이다. 바위에서 찾아낸 부처의 상을 이렇듯 내외로 걸쳐두는 미완성의 편안함과 마모의 자국들이 경주남산을 불교박물관이 되게하는 또 하나의 요소들이라고 느껴본다. 좀더 올라가니 크게 흘러내린 두 개의 바위에 자유로운 선(그림)으로 처리한 선각육존불이 병풍처럼 새겨져 있다. 바위 위로 올라가 보면 지붕을 덮었던 흔적이 보이고, 바위를 타고 빗물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물길을 만들어 놓았다.
거기서 또 몇 걸음 더 올라가면 소나무 사이로 단정하게 앉은 석조여래좌상이 보인다. 그야말로 발길 닿는 곳마다 부처상이요, 눈길 주는 곳마다 탑 조각이 흩어져 있으니, 경주남산은 불교미술의 노천박물관이다. 빼어난 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온통 깨어지고 흩어진 상태로 산길에 서 있으니 그것이 경주남산만의 특별함이다. 자세히 보면 이 석조여래좌상도 지금은 연꽃 모양의 광배와 몸체, 연화대좌를 온전히 갖추었으나 모두 따로 흩어졌던 것을 찾아 복원한 것이며, 광배 바위도 잇고 복원한 흔적이 뚜렷하다.
또 10여분 동안 앞으로 나아가 왼쪽 언덕을 보면 삼릉곡 제6절터 선각마애불과 석조여래좌상터가 있다는데 설명만 듣고 지나친다. 더 올라가서 신선이 내려와 바둑을 두었다는 평평한 바둑바위에 이르렀다. 거기서 잠시 숨을 고르면서 경주시내를 둘러보고 방향을 바꾸어 뒤쪽으로 내려갔다. 건너편 절벽에 남산에서 두 번째로 큰 마애석가여래좌상이 보였다. 그곳은 탐방객의 접근을 허용치 않는데, 먼발치에서 바라보면 산허리가 툭 터져 경주시내도 나란히 내려다 보였다.
산을 하나 넘었으니 허기가 졌다. 금오산 정상에서 살짝 비켜난 바위 절벽 위에 두 그루의 소나무가 지키고 있는 널찍한 바위가 나왔다. 우리는 거기서 삼삼오오 자리를 잡고 김밥을 먹었다. 맞은편 고위봉을 바라보는 절벽 위에서, 멀리 마애석불과 가까이 소나무의 그늘을 받으며 점심을 먹으니, 세상에서 가장 높은 노천식당이었다.
점심과 휴식을 마치고 내려오는 길, 탁 트인 절벽 위에서 용장사곡 삼층석탑을 만났다. 이 석탑은 자연 암반을 깎아 세울 자리를 마련하고, 1층으로 된 바닥돌 위에 3층의 몸과 지붕돌을 얹었다. 이것도 역시 무너져 아래쪽 계곡에 흩어져 있던 것을 1922년에 복원하였다고 한다. 탑의 꼭대기 뾰족한 머리장식은 모두 없어졌고, 2층 기단부터 급격히 작아졌으며 2층 지붕도 한쪽이 날아간 채 얹혀 있다. 자세히 보면 상처가 많으나 훼손된 모습 그대로 절벽 위에 다시 우뚝 서서 구름을 맞이하고 있어 호연한 느낌을 더해준다.
이 순간 절벽 위에 선 우리들의 모습도 우주로 열린 작은 탑신이 아닐까. 언제 다시 오랴! 산 아래로 내려가고 싶지 않은 마음이 간절하나 시간은 한정되어 있기에 아래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쉬운 마음을 접고 옆으로 내려오니 아담한 바위벽에 마애좌상불이 새겨져 있었는데, 머물고 싶은 속인의 마음을 대신하는 듯했다. 다시 보니, 이 마애불상은 아직도 젊은 수행자의 느낌이 있어 그 눈을 오래 쳐다보았다.
드디어 삼륜대좌불이라고도 하는 용장사곡 석조여래좌상을 만났다. 절벽 위에서 본 삼층석탑에 부처님과 고승의 사리를 모셨다면, 이곳에는 해탈을 이룬 부처의 법신을 모시고자 했을 것이다. 단단한 바위 위에 자리를 잡고 3층으로 원반을 올린 후 그 꼭대기에 불상을 모셨다. 얼굴 아래로 몸체를 살펴본다. 왼쪽 어깨 밑에 매듭을 묶은 옷주름은 한없이 부드럽고 옷자락은 연화대좌를 덮으며 물결친다. 저 부처의 얼굴은 어떤 깨우침을 보여 주려 했을까? 그러나, 긴 세월 속에 머리를 잃고 몸체만 남았으니 아득한 경지를 짐작만 할 뿐이다.
엄마 얼굴 살피는 어린아이처럼 부처의 표정에서 답을 얻고자 했으나, “네 나름의 경지를 열어 그리 찾아가라” 이르는 듯, 얼굴 자리는 텅 비어있고 어두운 구름만 머물러 있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신라의 고승 대현스님이 기도하면서 이 불상을 돌 때에, 불상도 따라서 고개를 돌려 그를 보살폈다는 기록이 있다. 저 늠름한 석불에 그토록 인간적인 마음이 깃들다니……
용장사곡 삼층석탑과 얼굴 없는 삼륜대좌불을 보고 내려오면서, 오늘 이 산을 오르는 나의 생각이랄지 영혼은 어디에서 비롯되어 어디로 흘러갈지 생각에 젖어들었다. 더 내려오면 용장사터, 김시습이 6년간을 머물면서 금오신화를 집필했던 절이다. 아무런 흔적도 없는 길쭉한 절 마당을 이리저리 거닐면서 김시습을 생각했다. 촉망받는 천재였으나, 어지러운 정치현실을 겪으며 생육신이 되어 전국을 떠돌았다.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 다섯 편을 남겼다. 목숨은 무상하고 기록만이 남는구나. 경주남산연구소의 김구석 선생님과 지역 사람들은 계곡을 건너기 위해 새로 만든 다리를 놓고 김시습의 법명인 설잠교란 이름을 붙여 두었다.
이제 본격적으로 계곡을 따라 아래로 내려간다. 삼층석탑과 삼륜대좌불을 바라볼 때, 하늘 위에 어리던 구름이 드디어 비가 되어 떨어지기 시작한다. 우산을 폈다. 빗방울이 무거워서 소나기로구나 했더니, 하얀 방울이 되어 통통 쏟아지기도 하고 튀어오르기도 했다. 앗, 우, 우박이구나. 우박은 비구름 속에서 태어나지만 빗방울과 달랐다. 둥글지가 않고 모가 나 있는 것을 보았다. 각설탕보다 약간 작은 듯한 모난 구슬이 촤르르 톡톡 계곡으로 쏟아졌다. 발밑으로 떨어지는 얼음별이다.
돌멩이와 부딪쳐 한번 튕겨져 나오는 우박이 정강이에 부딪치니 그 힘이 자못 세차서 앗 소리가 터져나왔다. 얼마 안 지나지 않아서 금새 오솔길에 흰구슬이 자갈돌마냥 차르르 덮히고 있다. 우박을 따라 비도 함께 내려서 신발이 젖어든다. 이 놀라운 하늘의 선물을 기록하려고 나는 한 손으로 우산을 받치고, 다른 손으로 핸드폰을 꺼냈다. 사진 몇 장과 동영상을 찍어보았다. 영상은 사정없이 흔들렸지만 생생한 놀라움이 있어서 힘들면서도 신이 났다. 어어, 와, 흥분된 내 목소리도 몇 마디 끼어들었다.
구름도 비도 우박도 우리는 어쩌지 못한다. 기후는 하늘과 땅을 잇는 힘이며, 불가항력이라서 우리는 고스란히 겪거나 피할 수밖에 없다. 오늘 용장골의 우박 세례가 신기해서 신이 났지만, 내려가는 길이 만만치 않다는 걸 직감했다. 방수코트 안주머니에 핸드폰을 집어넣었다. 신발은 점점 젖어오는데, 흙바닥에는 물이 고였고 돌멩이는 미끄러웠다. 점점 발을 내딛기가 쉽지 않아졌다. ’조심해야지!‘ 하며 한참 내려오다가 발 디딜 곳을 고른 바로 그 순간, 왼발로 짚었던 바윗돌에서 신발이 미끄러져 길을 벗어나 버렸다. 잇달아 오른무릎이 따라가고, 전신이 휘청 풀숲으로 딸려가 뒹굴고 말았다. 아차, 이게 무슨 상황이람? 나는 길 아래 풀숲에 우산을 거꾸로 내리고 그 위에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닌가. 이런, 어쩌지? 다친 건가? 잠깐 내 몸을 감각해 보았다. 특별히 아픈 데는 느껴지지는 않았다. 풀숲의 쿠션 위에 우산이 받쳐주고, 그 위에 내가 배낭을 멘 채로 누워서 버둥거리고 있었다. 낭떠러지가 아니어서 얼마나 다행인가!
배냥이 무겁고 기운도 딸려서 엉덩이를 내리고 윗몸을 일으키는데 시간이 걸렸다. 에구에구 큰 벌레가 따로 없구나. 몸을 꿈틀거리다 보니 조금씩 머리를 들고 엉덩이를 바닥에 놓을 수가 있었다. 그때 일행 중의 두 사람이 나를 따라오다가 이 사태를 발견했다. 한 분이 손을 잡아 주어서 완전히 일어났다. 다행히 다친 데는 없었지만 민망하고 창피스러웠다. 경주남산은 높지 않다기에 트레킹화를 신고 왔는데, 내 트레킹화는 바닥의 요철이 깊어서 날씨가 좋을 때는 등산화로 신어도 무리가 없지만, 재질이 딱딱하여 수분을 머금은 바윗돌의 곡면을 제대로 잡아주지 못했던 것이다.
아무도 넘어지지 않는 길을 나혼자 넘어져 뒹굴고 나니, 한편 장난스럽고 한편으론 이상스런 감정이 북받쳤다. 경주 남산 용장골에 찾아온 나에게 하늘이 각설탕만한 우박 세례를 퍼부었으니, 넘어진 일도 나쁘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다치지도 않았으니 말이다. 하늘과 구름이 저리 격한데, 나도 온몸으로 받은 선물에 대해서 인사를 해야하지 않겠는가?
금오산 삼층석탑에 반하고, 삼륜대좌불에 반하고, 최초의 한문소설가 김시습의 생애에 반했던 나, 거기에다 종일 흐르던 구름이 우박을 뭉쳐 나를 두드리니 어찌 안 넘어질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나동그라진 것입니다. 용장골 하느님, 부처님, 김시습 선생님, 당신들의 가피와 격한 포옹을 받고 잘 다녀갑니다. 푹 꺼져들어 하늘과 바로 이어지는 용장골, 날랜 우박 구름의 기습을 평생 잊지 못할 것 같아요.
진달래 진 계곡에서 연달래와 수달래가 멀찌감치 나를 보고 헤헤헤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