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바라지 않는 세상

일러스트=토끼풀

 
누군가에게 깨끗한 거리에 살고 싶냐고 묻는다면 대부분 ‘그렇다’고 답할 것이다. 하지만 길에서 쓰레기를 주워본 적이 있거나, 혹은 그럴 생각이 있냐고 물어보면 민망한 웃음을 짓는 이들이 더 많을 것이다. 나는 그게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좋은 일을 직접 실천하지 않았다고 비판받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단지 나는 하나의 질문을 더해보고자 한다. 만약 길에서 쓰레기를 줍는 사람을 본다면, 당신은 어떤 생각이 들 것 같은가?
 
최근에는 조깅을 하면서 쓰레기를 줍는 ‘플로깅(plogging)’이 유행할 정도로 길에서 쓰레기를 줍는 사람을 흔히 볼 수 있다. ‘흔히 보인다’는 건 별 생각이 들지 않는다는 것과 같은 의미일 것이다. 딱히 특별지도 않고, 때로는 당연해 보이기까지 한 풍경일 것이다.
 
그런데 기억을 더듬어보면 10년 정도 전에는 당연하다는 듯 쓰레기를 버리는 사람이 훨씬 많았다. 색색의 비닐이나 찢어진 전단지가 흔하게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고, 버스 정류장이나 돌출된 구조물에는 플라스틱 컵이 산처럼 쌓였다. 그런 분위기에서 반대로 누군가 쓰레기를 주웠다면 어땠을까? 어떤 시선을 받고 어떤 말을 들었을까?

중학생 시절 한동안 길에서 쓰레기를 주운 적이 있다. 무슨 봉사활동이나 행사에 참여한 건 아니고, 그냥 혼자서 주웠다. 당시 다니던 학교에서 집까지는 대략 3km 정도 떨어져 있었는데, 아침에는 버스를 탔지만 하교할 때는 걸어서 돌아왔다. 빨리 걸으면 30분, 느긋이 걸으면 50분 정도 걸리는 거리였다.
 
몇 년 동안 같은 길을 걸으니 좀 심심했던 것 같다. 하교 길에 책을 읽기도 하고, 작은 형이 쓰던 오래된 mp3에 노래를 담아 듣기도 했지만 한계가 있었다. 멍하니 걷다가 때마침 눈에 들어온 게 거리 가득한 쓰레기였다. 저거나 주울까. 대단한 정의감이나 포부 같은 건 없었다. 어차피 심심해서 하는 일, 나쁜 짓만 아니면 다 상관없는 거 아닌가 싶었다.
 
그런데 별 생각 없이 시작했던 것치고는, 그 과정에서 예상치 못하게 보고 들은 게 많았다. 가장 낯선 경험은 나쁜 짓이 아니라도 누군가를 불편하게 할 수 있다는 거였다. 심지어 그건 남들이 볼 때 ‘좋은 일’이나 ‘착한 일’인 경우가 많았다. 가장 먼저 반응을 보인 건 같은 학교 친구들이었다.
 
몇몇은 함께 쓰레기를 주워주기도 했지만, ‘착한 어린이’라면 노골적으로 비아냥대는 이들도 있었다. 특히 내가 쓰레기를 줍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학교 선생님의 표정이 기억에 남는다. 분명 좋은 일이긴 한데, 적극적으로 칭찬해줄 수도 없어 곤란한 표정이, 혹시나 내가 실망하거나 상처받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베여있었다.
 
선생님이 무엇을 걱정했는지는 금방 알 수 있었다. 거리에서 마주하는 반응은 학교에서보다 훨씬 날 것에 가까웠으니까. 그중에는 눈을 흘기며 괜스레 더 과장되게 쓰레기를 버리는 사람도 있었고, 어차피 돈 받고 줍는 사람들이 있다며 걱정인지 핀잔인지 모를 말을 건네는 이들도 있었다. 딱 한 번이지만, 왜 쓸데없는 짓해서 가만히 있는 사람 죄인 취급하냐는 말을 듣기도 했다.
 
사람이 그런 식으로 위축될 수도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공기처럼 떠도는 분위기에 반대되는 이가 얼마나 많은 눈총을 받는지도, 그 분위기를 바꾸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이지도 말이다. 처음에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는 한 번도 주변에 같이 쓰레기를 줍자거나, 거리를 깨끗하게 만들자는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내가 환경미화 조끼를 입거나 일종을 캠페인을 벌였다면 사람들은 더 쉽게 나를 무시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유와 목표가 분명히 보였을 테니까. 하지만 교복을 입고 혼자 쓰레기를 줍던 나에게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건 이질적인 존재였다. 당연해 보이는 거리의 분위기를 헤치는 존재였다. 그들은 내 행동의 이유를 각자 생각했을 것이고, 그게 그들을 불편하게 하지 않았을까. 떠올린 이유가 타당하다면 왜 당신은 쓰레기를 줍지 않는가? 따지는 기분이 들지 않았을까.
 
물론 날선 말만 들었던 것은 아니었다. 좋은 일을 한다고 응원을 보내거나, 두유나 떡을 건네주는 어르신도 있었다. 그럴 때면 감사하면서도 동시에 민망했다. 처음부터 칭찬을 받으려 시작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왜 사람들이 쓰레기를 줍지 않는지, 오히려 버리는 것을 더 당당하게 여기는지도 알 것 같았다. 의무감과 정의감이 있는 사람을 상처를 받을 것이고, 별 생각 없는 사람은 따가운 눈총에 놀랄 것 같았다. 이질적인 존재가 되는 경험은 유쾌하지 않았다. 분명 나서서 그런 기분을 느끼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미지=Pixabay

 
여러 생각과 감정 속에서 3개월 정도 이어지던 나의 쓰레기 줍기는 방학을 기점으로 멈추었다. 분하거나 안타깝지는 않았다. 처음부터 큰 의미를 두고 시작한 일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후회가 아예 없냐고 물어본다면, 그렇지는 않았다.
 
방학식이 끝나고 돌아가는 길이었다. 내 손에 평소처럼 쓰레기봉투가 들려 있지 않았다. 그걸 보고 평소에 자주 비아냥대던 친구 하나가 다가와 물었다. 이제 안 하나? 정말로 궁금해서 묻는다기보다는, 묘한 기대감을 담고 있는 그의 표정을 보며 문득 불안했다. 나의 체념이 그에게 어떤 확신을 줘버린 게 아닐까. 그럴 줄 알았다고. 쓸데없는 짓 할 필요 없다고. 어차피 세상은 변하지 않으니 우리는 불편하지 않아도 되고, 노력하지 않아도 되고, 눈치보지 않아도 된다고. 앞으로 그가 살아갈 세상에서 내가 참으로 못된 증거가 되어버린 건 아닐까 싶어 서글펐다.
 
내가 포기하지 않았다면 그는 다르게 생각할 수 있었을까.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라도 계속 쓰레기를 주웠다면 분명 다른 변화가 있었을 것이다. 모두가 함께하는 장밋빛 미래가 같은 건 애초에 기대하지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누군가의 체념에 만족스러운 웃음을 짓는 일은 줄어들지 않았을까. 그건 실망과 상처보다도 더 확실하게 삶을 훼손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는 평생 거리에 쓰레기를 버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자신을 둘러싼 너무 다양한 문제들 때문에 그런 것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처음부터 옮고 그름을 판단한 적 없다고 항변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는 확실하게 편향된 방향으로 힘을 실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분위기에 동참했다.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는 확신으로 ‘변하지 않는 세상’으로 삶을 끌어당겼다. 아무런 세상도 꿈꾸지 않았던 나는 주웠던 쓰레기보다 더 무거운 냉소를 거리에 남겼을지도 모른다.
 
일련의 과정을 겪어서인지, 2015년에 있었던 부산진구 ‘청소 파업’은 나의 뇌리에 깊게 박혀있다. 당시 부산진구는 서면 시내에 무단투기 되는 쓰레기들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고, 결국 사흘간 환경미화원 투입과 쓰레기 수거를 하지 않는 ‘청소 파업’을 선포했다. 파업 날짜에는 주말이 포함되어 있었다. 밤낮없이 인파가 가득하던 서면 거리는 며칠 사이 그야말로 난장판이 됐다.
 
개인이 할 수 없는 일을 공공의 영역이 할 수 있다는 사실도 인상 깊었지만, 많은 이들을 충격으로 몰아넣은 건 뉴스 화면에 그대로 담긴 거리의 이미지였다. 넘쳐나는 쓰레기들로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그 모습이 수많은 언론사를 통해 전국에 비쳤다. 실제로 청소 파업 이후 쓰레기 무단 투기에 대한 인식이 많이 개선되었다고 한다. 부산진구의 실험은 성공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당시 뉴스를 보던 나는 다른 종류의 충격을 받았다. 저게, 어떤 세상도 제대로 꿈꾸지 않았던 결과구나. 나도 모르게 기여했던 세상의 모습이구나. 내가 놀랐던 건 그 세상이 도저히 ‘선택’이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했기 때문이었다. 저런 거리에 살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누구도 저런 세상을 바라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두 눈으로 결과를 보기 전까지 그 세상을 만드는 데에 거리낌 없이 힘을 보탰을 것이다.
 
요즘에도 나는 멍하니 주변을 둘러본다. 쓰레기가 없는데도, 이 거리는 여전히 처참하다. 무리한 수사를 받던 노동자가 억울함에 분신하는 세상,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한 전세 세입자가 목을 매는 세상, 매년 수능 날 고층 아파트에서 학생들이 뛰어내리는 세상, 더 이상 생명이 태어나지 않는 세상. 그런 세상을 꿈꾼 적 없다는 당신의 항변을 이해한다. 하지만 ‘아무도 바라지 않았던 세상’에 대한 책임은, 결국 오늘을 살아갈 우리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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