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초 유감
20대 중 후반 거의 전부를 일본에서 지냈다. 가난하고 육체적으로 힘겨웠던 유학생 시절, 자주 갈 수는 없었지만 슬리퍼 신고 동네 저렴한 술집에서 올망졸망 작달막한 안주에 맥주나 청주 잔 술을 마시며 외국 살이의 시름을 잊고는 했다. 그런 면에서 일본은 천국이었다. 소위 슬세권(슬리퍼 신고 가도 되는 거리에 있는 곳)에 언제 방문해도 푸근한 술집이 있다는 건 위로에 다름 아니었다. 슬플 때, 외로울 때, 지갑이 빈곤해 비싼 곳에 갈 엄두가 나지 않을 때, 동네 선술집은 든든한 내 편이 되어주었다
길다면 긴 시간을 외국에서 보내다 서울로 돌아오니 그게 제일 아쉬웠다. 동네 술집. 노 메이크업에 슬리퍼 신고 가도 창피하지 않고, 비싸지 않으면서도 주인장 인심이 넉넉한, 혼자 가도 눈치 안 주는 그런 곳이. 서울엔 일본 촌 동네보다 힙하고 근사한 맛집은 월등하게 많았지만 내가 원하는 동네의 그런 술집은 참 드물었다. 예전보다야 혼술족이 늘었다고는 하나, 혼술이 가능한 장소도 소위 SNS에 올릴만한, 요샛말로 ‘인스타그래머블’한 가게들이 대부분이었다. 일본과 우리나라는 상황과 성향이 다른 나라기 때문에 아담한 동네 혼술 가게가 일본만큼 흥할 수 없음을 이해는 하고 있지만 그래도 아쉬웠다.
동네 혼술 가능 가게 찾기 미션은 오래 이어졌음에도 쉽지 않았다. 설령 괜찮은 곳을 발견했다 치더라도 오래 지나지 않아 폐업을 하는 바람에 어느 날 닫힌 가게 문 앞에 부착된 ‘임대’ 푯말 앞에서 망연자실 서성이다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오고는 했다. 서운한 마음에 편의점에서 만원에 4캔을 주는 맥주를 사 들고 귀가한 적도 부지기수. 집에서 맘 편히 마시는 혼술도 좋지. 허나 동네 선술집을 향한 나의 로망은 쉽게 가실 줄을 몰랐다.
약 1년 전 지금 사는 동네로 이사오면서 가장 반가웠던 건, 집 바로 앞에 편의점이 두 곳이나 있다는 것과 슬세권, 그러니까 집에서 슬리퍼 신고 도보 2분컷 거리에 프랜차이즈 치킨 집이 우리의 이사 시기와 비슷하게 개업을 했다는 점이었다. 비록 이런저런 안주가 다양한 술집은 아니었지만 매장은 청결했고, 언제라도 신선한 생맥주를 마실 수 있다는 건 복지였다. 게다가 그 가게는 맥주를 시키면 서비스 안주로 흔한 뻥튀기 과자가 아닌 나초와 살사소스를 소량이긴 해도 예쁘게 담아 내주는 것이 아닌가! 동네 치킨 집이라고는 유일하게 그 곳뿐인 것도 있지만 배달료도 아낄 수 있어 치킨을 좋아하는 딸 아이를 위해 테이크 아웃으로 종종 주문도 했다.
한 동안 업무가 많아 늦은 시간에 퇴근하는 일이 잦다 보니 혼술 할 기회가 좀처럼 생기지 않다가, 얼마 전 드물게 이른 퇴근에 딱히 약속도 없길래 귀가 전에 치맥이라도 해야지, 신나는 마음으로 동네 치킨 집에 들렀다. 시간이 애매해 그런지 나 외에 손님은 두 테이블 밖에 없었다. 평소엔 혼술 때 매장에서 가장 작은 좌석에 앉지만 그 날은 그 좌석 옆에 아이 둘을 데리고 온 손님이 있길래 서로 방해되면 안되겠다 싶어 떨어진 자리에 앉았다. 그곳은 4인석이었다.
앉자마자 여긴 4인석이니 작은 좌석으로 옮겨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생맥주 한 두잔 정도만 마실 거라 오래 앉아있지 않을 거라고, 혹시나 손님이 몰리면 그 때 옮기겠다고 전했지만 사실 이미 그 단계에서 나는 기분이 조금 상했다. 손님이 와글와글한 때라면 몰라도 빈 테이블이 여러 곳 있는데 굳이 그랬어야 했을까? 라는 의문이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미 앉았으니 그냥 나가기도 그래서 치킨 반 마리와 생맥주 한 잔을 주문했다. 맥주를 먼저 가져다 주길래 시원하게 한 잔 마시고 기분 풀자 싶었다. 하지만 뭔가 허전해 살펴보니 다른 테이블에는 놓인 서비스 나초 안주가 내게는 없는 것.
저기요 여기 나초 안 주셨는데요?
아, 반 마리 손님에게는 나초가 제공되지 않습니다.
너무도 당당하게 그렇게 말하는 모습에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 지 잠시 멍해졌다. 언제부터 그런 룰이 있었던 걸까? 횟수야 많지 않았어도 약 일년을 다녔는데 처음 들어보는 말이었다. 물론 그 가게에서 치킨 반 마리를 시킨 것도 처음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치킨 반 마리 주문 고객에게는 나초가 제공되지 않는다는 건 미리 안내해야 할 정보가 아닐까? 무엇보다 그게 뭐라고 차별을 하나 싶은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부끄러움은 왜 나의 몫이어야 하는지, 한 마디로 ‘거지 같은’ 기분이 되고 말았다. 퇴근 길 맥주 한 잔의 소확행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모냥 빠지게 고작 나초 한 줌 가지고 그런 생각을 하냐고? 이건 나초의 문제가 아닌 기분의 문제니까. 혼자 술 마시는 고객은 단가가 낮으니 별 볼일 없다 여기고 있음을 자리를 옮겨달라는 때부터 이미 눈치채고 말았으니까. 그 가게에서 테이크 아웃으로 치킨과 사이드 메뉴를 대거 주문한 지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았던 터라 내 기분이 더 상했는지도 모르겠다. 업주 입장에선 매장에서 매출을 많이 올려주는 고객이 반가운 거야 사실임을 모르지 않는다. 그러나 오늘 하루만 장사할 건 아니지 않은가? 심지어 뜨내기 고객이 많이 오가는 번화가가 아니라 말 그대로 동네 장사, 단골 장사 하는 데서 대놓고 혼술 고객을 거부(나는 이걸 고객을 거부하는 행위라 본다) 하는 것이 과연 현명한 일일까.
우리 동네 ‘그’ 치킨 집은 얼마 전 치킨 가격을 크게 올려 사람들 사이에서 갑론을박이 오갔던 프랜차이즈 브랜드다. 물가상승, 지대상승, 게다가 프랜차이즈 업주들의 고충을 알기 때문에 가격을 올리는 것에 크게 불만은 없다. 어쩌니 저쩌니 해도 치킨만큼 가성비와 가심(心)비 좋은 메뉴가 잘 없기도 하고. 그런데 문제의 나초를 같은 브랜드라 해도 어떤 매장은 셀프바에 두고 고객이 원하는 만큼 가져다 먹을 수 있게 하는 매장이 있는 반면 우리 동네 K치킨처럼 치킨 반 마리 고객에게는 제공하지 않겠다는 곳도 있다는 것이 기묘한 지점이 아닐 수 없다. 동일 브랜드니 치킨 가격은 똑같을 텐데 말이다. 동네에 생맥주를 마실 수 있는 치킨 가게가 그 곳이 유일하다 보니 그 정도 배짱은 부려도 좋다고 여기기라도 했을까? 글쎄.
그로부터 얼마 후 마찬가지로 우리 집에서 슬세권 도보 2분컷 자리에 새 치킨 가게가 오픈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반가운 마음에 오픈 한지 며칠 되지 않았을 때 일부러 혼자 그 가게에 들러 보았다. 꽤 늦은 시간이었는데도 매장엔 손님이 많아 빈 자리가 4인용 테이블 하나뿐이었다. 살짝 미안한 마음에 혼잔데 이 자리 앉아도 되냐고 물었더니 당연히 앉으셔도 된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맥주를 주문하자 나초는 아니지만 그릇 가득 마카로니 과자와 시원한 생맥주를 찰랑찰랑 담아 가져다 주었다. 치킨 반 마리가 메뉴에 있었음에도 한 마리를 주문하고 맥주는 도합 세 잔을 비웠다. 그 가게에서 머물렀던 40분간 맥주를 들이키며 생각했다. 반 마리 혼술 손님을 차별하는 ‘그’ 치킨 가게에 다시 갈 일도, 주문할 일도 없겠구나, 라고.
고백 하나 하자면 사실 나초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그럼 뭐가 문제냐고? 아까도 말했다시피 그건 기분의 문제고, 유감스럽게도 나는 뒤끝이 제법 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