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절 특집] 노동자도 조국이 필요하다

일러스트=토끼풀

 
우리나라 노동자에게는 조국이 없다. 노동자에게 국가보다 계급이 중요하다는 뜻이 아니다. 우리나라 노동자는 태어난 나라를 사랑할 수 없다는 뜻이다. 국가가 단순히 여권에 찍힌 출신지가 아니라 사랑받는 조국이 되려면, 국가는 내 집처럼 편하고 따뜻한 곳이 되어야 한다. 우리나라는 노동자에게 남의 집처럼 불편하고 추운 곳이다. 노동자가 월급을 받지 못했을 때, 자녀의 학비를 지원해 줄 수 없을 때, 하루종일 일하고도 생활고에서 갇힐 때, 국가는 노동자 곁에 없다. 우리나라는 노동자를 위기 속에 방치하고 있다. 그런 나라에 소속감을 느끼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사랑받을 수 없는 나라는 누군가의 조국일 수 없다.
 
노동자가 방치된 데에는 잘못된 국가관 탓이 크다. 흔히 우리나라는 처음부터 자유민주주의를 채택했다고 이야기한다. 맞는 말이지만, 자유민주주의의 의미가 너무 좁게 받아들여졌다. 많은 사람이 자유민주주의를 자유방임주의와 동일시한다. 자유민주주의 국가라면 안보와 질서를 지키는 데에 전념하고, 사회정의를 명분으로 경제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런 작은 국가관 탓에, 우리나라는 군사정부가 경제개발을 지도할 때에도 정부재정으로 노동자를 적절히 지원하지 않았다. 민주화가 된 이후에도, 노동자를 위한 사회정책은 자유민주주의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여겨졌다.

이건 가혹한 오해다. 우리나라는 그런 자유민주주의를 채택한 적이 없다. 대한민국헌법이 꿈꾼 나라는 노동자를 방치하는 나라가 아니었다. 제1호부터 현행 제10호까지, 대한민국헌법은 국가가 노동자를 지켜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특히, 헌법 제1호는 선명하게 ‘사회국가’를 가리켰다. 다시 말해, 우리나라가 채택한 자유민주주의는 사회국가를 포함하는 넓은 자유민주주의였다.
 


 
1. 사회국가란 무엇일까

‘사회국가’는 야경국가의 반대말이다. 야경국가가 치안과 국방 같은 최소한의 기능만 담당한다면, 사회국가는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고 사회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사회경제 전반에 개입한다. 우리나라 헌법재판소는 사회국가를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사회국가란 한마디로, 사회정의의 이념을 헌법에 수용한 국가, 사회현상에 대해서 방관적인 국가가 아니라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영역에서 정의로운 사회질서의 형성을 위하여 사회현상에 관여하고 간섭하고 분배하거 저정하국 국가이며, 궁극적으로는 국민 각자가 실제로 자유를 행사할 수 있는 그 실질적 조건를 마련해 줄 의무가 있는 국가이다.”1)
 
사회국가는 과도한 불평등이 자유를 위협하는 생각에 기반한다. 모든 국민이 평등한 권리를 누려야 한다는 원칙은 자유로운 국가의 기본이다. 문제는 빈곤이나 실직, 장애 등 개인의 행동을 가로막는 요소 때문에 사람마다 실질적으로 누릴 수 있는 자유가 불평등하다는 점이다. 부유하고 건강한 사람은 유능한 변호사를 고용하거나 좋은 학교와 가까운 곳에서 살면서 더 많은 자유를 누릴 수 있지만, 빈곤하고 아픈 사람은 옆 동네로 놀러 갈 권리조차 누리기 힘들다. 이런 불균형은 사회적 분열과 갈등으로 이어질 것이다. 혼란을 막고 자유를 보장하려면, 국가가 나서야 한다. 국가가 사회 곳곳에 개입해서 사회적 약자를 지원하고 사회정의를 구현해야 한다. 그런 의무를 수행하는 국가가 바로 사회국가다.
 
선진적인 사회국가는 노동자를 보호하는 일에 상당한 예산을 지출한다. 2022년 OECD 국가들의 GDP 대비 공공사회복지지출을 보면, 프랑스는 GDP의 31%, 독일은 26%, 영국은 22%를 각종 사회보장제도에 지출한다. 물론 규모가 크다고 해서 전부는 아니다. 이탈리아는 OECD 평균보다 높은 비율을 지출하지만, 예산이 노인 복지에 편중되어 있다. 그만큼 한창 일하는 노동자는 적절히 보호받지 못하고 있다.2) 선진적인 사회국가는 적절한 실업급여를 지급하며 노동자에게 이직할 기회를 보장하는 ‘적극적 노동시장정책’에 많은 예산을 지출한다. 어떤 식이든, 서구의 사회국가는 노동자의 소득수준을 보호하기 위해 여러 정책을 활용한다.
 
서구의 사회국가는 노동자의 소득 뿐만 아니라 협상력도 적극 보호한다. 사회국가는 노동자가 도구로 전락하지 않도록 기업인과 대등하게 협상할 방법을 제도로 마련했다. 노동이사제와 공동결정제가 대표적이다. 이렇게 국민에게 참정권를 보장하듯이 노동자에게 경영참여권을 보장하는 정책을 ‘산업민주주의’라고 부르기도 한다. 산업민주주의가 발달한 스웨덴에서, 노동자는 자신들이 선출한 대표를 이사진에 포함시킬 수 있고, 기업인에게 경영 상황에 대한 정보나 임금 협상을 요구할 수 있다. 덕분에 스웨덴 기업은 매우 투명하고 민주적으로 경영된다.3)
 
선진적인 사회국가의 노동자는 높은 임금과 적은 근로시간, 수평적인 기업 문화라는 훌륭한 조건 속에서 일한다. 그덕에 서구 사회국가는 전반적으로 생산성과 행복지수가 높다. 물론, 서구 사회국가에서도 갈등은 있고 파업도 일어난다. 하지만, 전반적인 생활수준이 비교적 우수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서구 노동자는 무려 3세기 전부터 평등한 권리를 보장받기 위해 싸웠고, 꾸준히 성과를 창출했다. 그 결과가 오늘날 주요 지표에서 전부 상위권을 차지하는 서구 사회국가들이다. 사회국가는 모두가 행복한 곳은 아니지만, 모두가 좀 더 행복할 수 있는 조건이 갖춰진 곳이다.
 


 

아담 스미스. 일러스트=File:Adam Smith D8.jpg – Wikimedia Commons

 
2. 사회국가와 자유민주주의는 친구다

많은 사람이 사회국가가 자유민주주의에 어긋난다고 여긴다. 이는 자유민주주의에서 ‘자유’ 부분을 좁게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치학자들도 자유민주주의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합의하지 못했지만, 흔히 자유민주주의는 자유주의적 가치를 침범하지 않는 선에서 선출된 대표자가 권력을 행사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통한다. 여기서 오해를 일으키는 부분은 ‘자유주의’다. 우리나라 보수는 자유주의를 국가로부터 간섭받지 않는 시장경제로 이해한다. 여느 해외 보수주의자들처럼 퀴어퍼레이드나 개방적인 성행위 등을 인정하지는 않지만, 경제활동의 자유에는 엄격하다.
 
하지만 자유주의는 경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국가와 충돌하지 않는다. 자유주의하면 떠오르는 사람인 애덤 스미스는 작은 정부와 자유방임주의의 화신으로 통하지만, 이는 잘못된 통념이다. 애덤 스미스는 단 한 번도 개인의 자유가 공공이익보다 우선시된다고 이야기하지 않았다.4) 애덤 스미스는 국가 없이는 자유도 없다고 분명히 지적했다. 애덤 스미스는 국가가 안보를 위한 무역 규제와 부의 집중을 막기 위한 세금을 지지했고,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한 공교육을 요구했다. 도덕감정론과 국부론 두 명저에서, 애덤 스미스는 수도 없이 국가가 도덕적인 경제를 실현해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다시 말해, 애덤 스미스가 생각한 국가는 야경국가보다는 사회국가에 가까웠다.
 

“스미스는 그의 사후에 얻은 절대적 자유방임주의자라는 평판과 달리 국가가 분배적 정의 차원에서 해야 할 일을 제시했다.”

– 장경덕5)

 
자유민주주의의 승리를 선고한 정치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도 자유주의가 자유방임주의를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단언했다. 개인의 책임을 극단적으로 강조하는 신자유주의자를 비판하면서,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자유주의가 얼마든지 사회적 보호와 양립할 수 있다고 이야기했다.6)
 

“자유주의의 기본 원칙은 각 개인들이 자신만의 행복과 삶의 결과에 대해 스스로 책임질 수 있기를 기대하지만, 개인이 스스로의 통제를 넘어선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될 때는 국가가 그들을 돕기 위해 개입하는 것을 얼마든지 정당화할 수 있다.”

– 프랜시스 후쿠야마7)

 
서구의 선진적인 자유민주주의 국가들은 사회국가를 헌법에 명시하고 있다. 프랑스 헌법 제1조 제1항은 이렇다. “프랑스는 불가분적, 비종교적, 민주적, 사회적 공화국이다.” 여기서 ‘사회적’ 공화국이 사회국가원리를 의미한다. 독일 헌법(기본법) 제2장 제20조는 이렇다. “독일연방공화국은 민주적, 사회적 연방국가이다.” 사회국가 개념이 태어난 곳 답게, 독일은 한 세기 넘게 튼튼한 사회국가를 지향해 왔다. 이 외에도 영국, 스웨덴, 덴마크 등이 선진적인 자유민주주의 국가이자 사회국가로 여겨진다.8)
 
심지어 자유방임주의 국가의 대명사로 통하는 미국도 자유방임주의를 온전히 수용한 적이 없다. 건국 아버지로 통하는 조지 워싱턴과 알렉산더 해밀턴은 강력한 연방정부를 꿈꿨지만, 행정력과 외교 분쟁 탓에 온전히 실현하지 못했다.9) 미국 초기 대통령들은 자유방임주의적인 영국과 다른, 정부가 산업화를 지원하는 경제제도를 원했고, 이를 ‘아메리칸 시스템’이라고 불렀다.10) 시어도어 루즈벨트나 우드로 윌슨, 프랭클린 루즈벨트 등 개혁가는 대기업과 부유층을 견제하고 민주주의를 보호하는, 적극적인 연방정부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11) 300년 마국사에서 연방정부가 자유방임주의 쪽으로 기운 것은 1980 – 1990년대 잠깐 뿐이다. 그 시기에도 연방정부의 규모는 꾸준히 늘어났다.
 
자유민주주의는 줄곧 사회국가를 품어 왔다. 자유민주주의는 사회국가와 함께 발전했다고 말할 수 있어 보인다. 자유민주주의 선구자들은 우리나라 보수처럼 작은 정부를 맹목적으로 고집하지 않았다. 자유민주주의 선구자들은 상당히 적극적인 정부를 원했고, 필요하다면 온건한 사회주의도 수용했다. 자유민주주의의 이름으로 반노동 정책을 정당화하는 사람들에게는 정치철학적 근거가 없는 셈이다.
 

“자유주의적 정부는 사치와 빈곤 사이의 불균형이 계급 적대로 확대되어 사회의 안정과 사적 재산 자체의 지배를 위협할 정도로 이르지 않도록 해야 한다.”

– 스티븐 홈즈12)

 


 
3. 우리나라도 사회국가였다

우리나라도 처음에는 우리 식 자유민주주의가 아니라, 서구적인 자유민주주의를 따랐다. 대한민국헌법 제1호는 프랑스나 독일 헌법처럼 사회국가를 명시하고 있지는 않지만, 해방된 대한민국이 사회국가가 될 것을 명령하는 조항을 포함하고 있다. 특히, 헌법 제1호 제84조는 우리나라 독립 영웅과 제헌의회 의원들이 꿈꾼 목표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대한민국의 경제질서는 모든 국민에게 생활의 기본적 수요를 충족할 수 있게 하는 사회정의의 실현과 균형있는 국민경제의 발전을 기함을 기본으로 삼는다. 각인의 경제상 자유는 이 한계내에서 보장된다.”

– 대한민국헌법 제1호 제84조

 
이것이 첫번째 헌법에서 우리나라의 경제질서를 규정하는 조항이다. 제헌 의회가 이 조항을 통과시켰고, 당시 국회의장이었던 이승만 대통령이 최종 서명했다. 현행 헌법 제10호는 사회정의 실현보다 재산권 보호를 조금 더 우선시하는데, 헌법 제1호는 국가가 사회정의 실현을 우선시해야 한다고 보다 명확하게 강조한다. 우리나라도 원칙적으로는 사회국가였던 셈이다.
 
헌법 제1호에는 서구보다 앞선 조항도 있다.
 

“근로자의 단결, 단체교섭과 단체행동의 자유는 법률의 범위 내에서 보장된다.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사기업에 있어서는 근로자는 법률의 정하는 바에 의하여 이익의 분배에 균점할 권리가 있다.”

– 대한민국헌법 제1호 제18조

 
흔히 제18조는 ‘이익균점권’ 조항이라고 불린다. 제18조는 노동자가 고정된 월급만 받는 게 아니라, 기업이 창출하는 이익의 일부를 나눠가질 권리를 갖는다고 명시하고 있다. 노동자의 이익균점권은 19세기 유럽에서도 거론되던 생각이었다. 프랑스의 사회주의자 샤를 푸리에가 비슷한 분배 제도를 가진 소규모 공동체를 고안했고, 영국의 대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이 노동자에게 기본급여와 함께 일정 비율로 이익을 나눠주는 기업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13) 하지만, 헌법으로 이익균점권을 보장하는 사례는 흔하지 않다. 당장 선진적인 사회국가의 헌법에서 이익균점권을 명시하는 조항은 찾기 힘들다. 이익균점권을 헌법에 명시했다는 점 만큼은 우리나라가 앞서간 셈이다.
 
이러한 헌법 제1호의 사회국가 조항은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는 임시정부 시절부터 사회국가원리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1919년 4월 임시정부에서 재정한 임시헌장에는 사회주의로 보일 만큼 엄격한 경제균등 사상이 명시되어 있다. “제3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남녀귀천 급 빈부의 계급이 무하고 일체 평등함.” 이는 1941년에 채택된 건국강령에도 나타나 있고, 헌법 제1호는 임시정부가 추구한 사회국가원리를 이어받았다.14)
 
만약 우리나라가 헌법 제1호의 사회국가원리를 고스란히 이어받았더라면, 노동자의 처지도 지금보다 나았을지도 모른다. 현행 헌법 제10호도 자유와 평등, 사익과 공익 사이에서 균형을 잡을 것을 요구하고 있지만, 헌법 제1호는 정부가 보다 적극적으로 사회정의를 실현할 것을 명령했다. 우리나라는 임시정부를 수립할 때부터 기업인과 노동자가 함께 사는, 조화로운 공동체를 꿈꿨다. 이 정신을 이어받은 첫번째 헌법은 노동자가 일하는 기계로 전락하지 않은 대한민국, 다시 말해 ‘사회국가 대한민국’을 명령했다. 우리도 사회국가로 출발한 것이다.
 


 
4. 노동절에 기억해야 할 유산

6.25 전쟁과 냉전이 남긴 트라우마 탓에, 우리는 귀중한 유산도 알아보지 못했다. 우리나라도 1960년대부터 지금까지 4대 보험과 근로장려금 같은 여러 사회정책을 도입했지만, 그 속도가 너무 느렸고 규모도 턱없이 작았다. 문재인 대통령이 정부 규모를 크게 확대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우리나라 복지지출은 OECD 최하위다. 그나마도 비효율적인 정책에 예산이 지출되는 바람에, 다수 노동자의 위태로움은 전혀 해소되지 못했다. 이런 와중에 일부 운 좋은 고소득 노동자들의 행패 탓에 노동운동 전체가 비난받고 있으니, 우리나라 노동자는 계속 나라 없는 국민으로 살 예정이다.
 
물론, 사회국가가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지는 않을 것이다. 아무리 사회정의를 구현할 의무가 있다고 해도, 국가가 해도 되는 일과 해서는 안 되는 일은 구분해야 한다. 국가는 더 나은 토대와 사다리를 만들어 줄 수 있지만, 내부 인터리어까지 책임져 줄 수는 없다. 실제로, 선진적인 사회국가에도 해결되지 않은 사회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이민자와 내국인의 갈등, 세대 간 갈등, 이념 갈등 등, 사회국가도 여러 갈등을 겪는다. 세상에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완벽한 해법이란 존재할 수 없고, 사회국가도 완벽한 해법일 수 없다.
 
하지만, 완벽하지 않다는 점이 문제가 될 수는 없다. 원래 완벽은 인간의 영역이 아니다. 완벽하지 않으니 사회국가를 도입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려면,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제도를 내쳐야 한다.
 
대한민국이 노동자에게도 조국으로서 사랑받으려면, 독립영웅들의 꿈을 되새겨야 한다. 독립영웅들은 노동자를 버리려 하지 않았다. 중국이나 북한이 따르는 것 같은 전체주의적 공산주의에는 단호히 반대했지만, 노동자에게도 사랑받을 수 있는 나라, 즉 사회국가는 공산주의가 아니라고 여겼다. 조소앙의 삼균주의로부터 영향받은 임시 헌장부터 헌법 제1호의 사회국가 조항들까지, 우리나라가 추구하던 가치는 노동자가 고립감을 느끼지 않는 나라였다. 우리나라는 노동자를 포함한 국민 모두의 조국을 꿈꿨고, 이 꿈을 기억한다면 앞으로 그렇게 될 수 있을 것이다.
 
누군가가 자유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사회국가에 반대한다면, 이승만 대통령의 서명이 뚜렷하게 남아 있는 헌법 제1조를 읊어주자. 듣지 않을 테지만 말이다.
 


 
주석.
1) 헌재 2002. 12. 18. 2002헌마52.
2) 알베르토 알레시나 등, 복지국가의 정치학, 전용범 옮김, 생각의 힘, 2012, 89p.
3) 김인춘, 자유민주주의 사회민주주의 시민민주주의, 백산서당, 2022, 157p.
4) 이황희, 애덤 스미스와 국가, 경인문화사, 2019, 213p.
5) 장경덕, 애덤 스미스 함께 읽기, 글항아리, 2023, 123p.
6) 프랜시스 후쿠야마, 자유주의와 그 불만, 이상원 옮김, 아르테, 2023, 53p.
7) 프랜시스 후쿠야마, 자유주의와 그 불만, 이상원 옮김, 아르테, 2023, 54p.
8) 프랜시스 후쿠야마, 자유주의와 그 불만, 이상원 옮김, 아르테, 2023, 54p.
9) 하성호, 아메리칸 시스템의 흥망사, 양홍석 옮김, 학고방, 2014, 63p.
10) 하성호, 아메리칸 시스템의 흥망사, 양홍석 옮김, 학고방, 2014, 37p.
11) 헬레나 로젠블랫, 자유주의의 잃어버린 역사, 김승진 옮김, 니케북스, 2023, 351p – 369p.
12) 스티븐 홈즈 등, 권리의 대가, 박병권 역, 박영books, 2012, 261p.
13) 서병훈, 자유의 본질과 유토피아, 사회비평사, 1995, 343p.
14) 김광재, 대한민국헌법의 탄생과 기원, 윌비스, 2018, 19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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