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6일을 기억하는 법

일러스트=토끼풀

 
“쿠데타면 어떻고 혁명이면 어떠냐 말이야. 5·16은 우리 정치·경제·사회 모든 분야에서 본질적 변화를 이끌고 실적을 남겼어. 그게 바로 혁명이야.” ([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 5·16으로 세상을 뒤집었고 ‘박정희의 진실’에 다가섰다, 중앙일보, 2015년 3월 2일) 
 
故 김종필 전 총리가 2015년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남겼던 말이다. 그는 5.16 당시 주요 가담자이자 故 박정희 전 대통령의 동료로서 격동하던 한국 현대사의 중심부를 떠나지 않았던 인물이었다. 그런 그의 발언이라 그런지는 몰라도, 발언의 진실 여부를 떠나 노회한 정치인의 울림만큼은 분명히 느껴진다. 
 
그렇다면 5.16은 혁명이었을까? 아니면 쿠데타였을까? 그 질문에 관해 대답할 주체는 후대인 우리의 몫일 테다. 하지만 나는 쉽게 답을 내릴 수 없다고 본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성급히 답을 내리는 게 과연 얼마나 큰 효용이 있는지 의문이다. 5.16을 단 하나의 시각으로 정의내리기에는, 5.16을 둘러싼 시대가 워낙 여러 가지의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면체에서 한 면 만을 보고 그 다면체의 전부를 안다고는 할 수 없지 않은가. 이번 칼럼은 그 다면체를 조금이나마 넓게 더듬어 보는 작업 중 하나라고 볼 수 있겠다.  


 
5.16 이전 한국 사회상은 어떠했나

먼저 5.16이 일어나기 전의 국내 정세를 잠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5.16이 일어나기 전 한국 사회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4.19 혁명을 거치며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고, 그 이후에 대통령제가 아닌 내각제를 새로운 정치권력 기반으로 삼은 장면 정권이 들어섰다. 그렇다면 장면 정권은 5.16 이전까지 어떤 행보를 보여줬을까? 이승만 정권 말기에 나타났던 여러 시위와 파동, 논란 등을 수습하고 새로운 사회상을 제시했을까? 권위주의와 독재를 말끔히 청산하고 한국의 ‘민주주의’가 기지개를 피고 있었을까? 안타깝지만 딱히 그런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던 듯 싶다.
 
우선 국민들이 장면 정권의 시책보다 각계각층의 과잉된 목소리가 사회 분위기를 크게 주도하고 있었다. 당시 정권은 ‘경제제일주의’를 내세우며 경제개발계획 입안·국토건설단 계획 등을 추진했다. 하지만 한국 전쟁 이후 미국의 원조를 제외하면 이렇다 할 경제적 기반조차 없던 것이 당시 한국의 경제력 수준이었다. 결국 관건은 미국의 지원 여부였다. 이에 관해 한미 양측의 논의가 시작되자, 당시 혁신계를 비롯한 원내외 정당·시민단체들이 “한국의 항구적 예속화와 조국의 민족통일에 배역(背逆)” 된다며 강도 높게 비판하기 시작했다. 서울 시내 11개 대학에선 ‘전국학생반미경제협정 반미투쟁 성토대회’를 개최했고, 16개 정당·사회단체가 조직한 ‘한미경제협정반대 공정투쟁위원회’가 출범하기도 했다. (정무용, 「1961년 한미경제기술원조협정을 둘러싼 정치,사회적 갈등」, 「인문과학연구」 21호, 덕성여자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15, 16~17쪽) 바야흐로 ‘반미(反美)’의 시간이었던가.
 
당시 휘몰아치던 반미 투쟁에 통일운동의 움직임마저 더해지자, 장면 정권은 ‘반공법’과 ‘집회 시위에 관한 법’ 제정을 시도한다. 당시 운동권과 야당에서 ‘2대 악법’에서 불리기도 했던 두 법 제정에 또 다시 정국이 요동쳤다. 당시 민주당의 우당이던 신민당마저 2대 악법 반대 대열에 합류했을 뿐만 아니라, 7.29 총선 이후 흩어졌던 혁신계 정당·단체들이 다시 모여 ‘반민주악법반대공동투쟁위원회’를 결성했고, 1961년 5월 3일에는 17개 대학 주도로 만들어진 ‘민통련(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은 아예 북한에 ‘남북학생회담’을 제의하고자 했다. (국사편찬위원회, 4월혁명과 혁신세력에 관한 연구, Ⅵ. 2대 악법반대 공동투쟁과 민족통일운동) 이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는 ‘억눌렸던 자유를 만끽하는 대중’에 가까웠을까? 아니면 불과 8년 전만 해도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치른 분단국가의 ‘무질서와 혼란’에 가까웠을까?
 


 
냉전(冷戰)이란 시퍼런 세계질서가 번뜩이던 1960년대

그렇다면 국내정세만 요란했던 것일까. 사실 당대 세계정세에 비하면 한국의 실상은 귀여운 것일지도 모르겠다. 박정희가 한때 존경했던 이집트의 나세르에 의해 촉발된 제2차 중동전쟁은 세계 패권을 움직이는 주체가 영국·프랑스 등에서 미국과 소련으로 재편됐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한국을 식민지 삼고 한때 동아시아 제국으로 군림했던 일본은 패전 이후 미국의 ‘군사 동맹’으로 탈바꿈했을 뿐만 아니라, ‘한국 전쟁 특수’를 겪고 경제대국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여기에 5.16 1년 뒤에는 인류 역사상 핵전쟁의 공포가 가장 크게 드리웠던 ‘쿠바 미사일 위기’가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세계정세의 성격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과 같았다.
 
당시 미국의 케네디 정권은 공산주의 진영이 제3세계의 혼란을 틈타 내부 침투와 전복 시도를 일삼는 것을 매우 경계했다. 따라서 정권 차원에서 미국의 패권과 국익을 위해 그런 시도 자체를 차단하는 것을 주요 과제로 설정했고, ‘반미 혁명 억제전략(Counter-Insurgency)’와 ‘대미 우호적 국가발전 전략(nation-buliding)’을 대외 전략 기반으로 채택하고 있었다. (정창윤, 「5.16 쿠데타와 미국의 대한정책」, 「신아세아」 20호, 신아시아연구소, 2013, 138쪽)
 
그러한 세계정세와 자유 진영의 최전방 보루였던 한국이 관계없을 리 만무했다. 그렇다면 당시 미국의 대한정책은 구체적으로 어떤 형태를 띄고 있었을까. 이에 관해 1960년 11월 28일에 작성된 미국의 NSC 6018 문서 내용은 이렇게 밝히고 있다.
 
“사회적 문제를 효과적으로 처리하고, 대중의 요구에 부응하는 독립적이고 대표할 만한 정부로서, 외부의 공격에 대해 강력한 대응은 물론 내부적인 안보를 유지할 수 있는 미국과 자유진영에 속한 통일된 한국” (정창윤, 「5.16 쿠데타와 미국의 대한정책」, 「신아세아」 20호, 신아시아연구소, 2013, 140쪽)
 
이런 대한정책 방향에 미국 정부는 과연 한국의 장면 내각이 적합하다고 판단하고 있었을까. 거기까진 더 자세한 사료를 찾지 못했으나, 5.16 직후 마샬 그린 주한 대사 등이 쿠데타군에 대한 진압 의사를 밝히지 않고 차분하게 상황을 지켜봤다는 정황이나, 초기에는 쿠데타에 호의적이지 않았던 매그루더 사령관도 김종필과의 대담에서 ‘산업을 일으켜 가난을 없애고 민주화를 이룩할 것’, ‘’한국이 일본과 외교관계를 개선하면 미국의 태평양 방위에도 도움이 되지 않겠냐” 등의 메세지를 듣고 놀랐다는([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美사령관 “허락도 없이 혁명을?”…JP “혁명을 누가 미리 신고하나”, 중앙일보, 2015년 3월 30일) 반응으로 보건대… 어쩌면 미국은 장면 정권을 대체할 정치세력으로 5.16 쿠데타 세력을 주시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박정희 대통령과 린든 B. 존슨 미국 대통령. 사진=PICRYL

 


 
홀대·부정부패·인사적체 등에 시달리던 한국 최고의 엘리트 집단

오늘날 한국 정치권은 고학력과 화려한 스펙을 겸비한 관료·학자·법조인들이 다수를 구성하고 있다. 하지만, 5.16 당시만 하더라도 해외 유학 경험을 갖춘 고학력자가 가장 많이 모여있던 집단은 군대였다. 정부 수립 이후에 한국군 창설 업무를 관장하던 주한미군사고문단(Korean Military Advisory Group, KMAG)은 한국군 장교를 대상으로 한 특별 교육 실시를 위해 한 적이 있는데, 이때 파견된 6명의 장교 중 한 명은 5.16을 반대했던 이한림 前 중장도 포함(그렉 브라진스키, 「대한민국 만들기 1945-1987」, 책과 함께, 2011, 137쪽)됐었다. 김종필도 한국전쟁 도중에 미8군 및 UN군 사령관으로 취임했던 밴플리트 장군의 장교 양성 방침에 따라 제1차 도미(渡美)장교단에 참여(JP “삼천만이 다 흙이 되더라도 민족의 역사와 강토 지켜야 한다”, 영남일보, 2018년 7월 2일)했었으며, 박정희와 긴밀한 인연을 이어오다 대통령에 자리에 오른 전두환·노태우 역시 육사 장교로서 미국 유학을 다녀온 바 있다. 당시 한국 군대는 한국 사회의 최고이자 최대 규모의 ‘엘리트’ 집단이었다.
 
그러나 그런 엘리트 집단에 대한 사회적 대우는 빈약했고, 대우의 정도만큼이나 군의 기강도 적잖이 무너져 있던 듯 하다. 5.16 당시 육군 중령이었던 이석제의 회고를 살펴보자.
 
“4.19가 일어난 1960년, 내 월급으로는 네 식구가 보름을 겨우 버티면 다행이었다. 때문에 장교들은 사병들에게 지급해야 할 각종 부식과 보금품을 빼돌려 생활에 보태곤 했다. ··· 상황이 이럴 지경인데, 군대 내에서는 매관매직이 공공연하게 성행하고 있었다. 진급을 위해 집을 팔았다는 장교도 있었다. ··· 양식이 끊겨 맹물로 허기를 달래고 있을때.. 마누라는 보리쌀이라도 구해보겠다며 나갔다가 그날 저녁 빈손으로 돌아와 눈물을 훔쳤다. 그리고 그날 밤 나는 결심했다. 더 이상 이따위 군에 충성을 바치기 않기로..” (이석제, 「각하 우리 혁명합시다」, 서적포, 1995년, 14쪽)
 
여기에 기수 별로 누적된 장교의 인사적체 문제, 정권과 군 사이의 관계 소홀 등의 요소가 겹쳤고, 그렇게 군 내부의 여러 불만은 해소되지 못한 채 응축되어 갔다. 야권과 사회단체의 강한 반발에 휘둘리던 장면 정권은 그런 군의 불만에 대해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러던 와중에 미국의 동아시아 전문가들이 5.16 5개월 전에 한국을 시찰하고 작성한 보고서가 한국군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바로 당시 한국 잡지 「사상계」 1960년 1월호에 실린 《콜론보고서》였다. 미국 측 인사들은 이 보고서에서 한국군의 미래에 대해 이렇게 예측했다.
 
“한국군이 정권을 잡는 일은 당분간 불가능할 것이다” (젊은 장교들을 흥분시킨 콜론 보고서, 조갑제닷컴, 2011년 1월 16일)
 
5.16 당시 한강을 가장 먼저 건넜던 김포 해병 1여단의 김윤근 준장은 《콜론보고서》 발간 직후 친구 아우인 한 해병 중위로부터 이런 말까지 들었다고 한다. “나라가 이렇게 어수선하고 어지러운데 군부가 방관만 하고 있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군부가 구국(救國)을 위해서 궐기할 때입니다.” (젊은 장교들을 흥분시킨 콜론 보고서, 조갑제닷컴, 2011년 1월 16일) 해병 중위의 분노에서 군 전반에 적체된 불만이 터질 명분을 찾고 있다는 것을 읽을 수 있다. 그리고 그 불만은 5.16이라는 이름으로 결국 터져 나오고 말았다.
 


 
5.16은 오늘날 한국 사회에 무엇을 시사하고 있는가

1. 반공을 국시의 제일의로 삼고 지금까지 형식적이고 구호에만 그친 반공태세를 재정비 강화한다.
 
2. 유엔 헌장을 준수하고 국제협약을 충실히 이행할 것이며 미국을 위시한 자유우방과의 유대를 더욱 공고히 한다.
 
3. 이 나라 사회의 모든 부패와 구악을 일소하고 퇴폐한 국민도의와 민족정기를 다시 바로 잡기 위하여 청신한 기풍을 진작시킨다.
 
4.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자주경제 재건에 총력을 경주한다.
 
5. 민족적 숙원인 국토통일을 위하여 공산주의와 대결할 수 있는 실력배양에 전력을 집중한다.
 
6. (군인) 이와 같은 우리의 과업이 성취되면 참신하고도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언제든지 정권을 이양하고 우리들 본연의 임무에 복귀할 준비를 갖춘다. (민간)이와 같은 우리의 과업을 조속히 성취하고 새로운 민주공화국의 굳건한 토대를 이룩하기 위하여 우리는 몸과 마음을 바쳐 최선의 노력을 경주한다. (국사편찬위원회, 사료로 본 한국사, 5·16 군사 정변시 내세운 혁명 공약)
 
5.16 직후 호외로 발표된 당시 군사정부의 혁명공약 내용이다. 오늘날 한국 정부와 군이 추구하는 노선과는 차이가 크지만, 놀랍게도 1번과 2번 항목은 오늘날 한국의 전략적 방향성과 매우 유사하다. 그런 맥락에서 <5.16 혁명공약>은 한국의 국제정치적·지정학적 상황이 예나 지금이나 풀어내기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알려주는 사료 중 하나라고 할 수 있겠다. 특히 5.16을 거쳐 탄생한 박정희 정권이 한-미-일 삼각 공조를 최초로 실현했던 집권 세력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작금의 한-미-일 관계에도 시사하는 바가 작지 않다.
 
한편으로 5.16은 4.19 이후 과잉된 자유가 만연했던 한국의 정치사회문화를 크게 바꿔놓았다. 대한민국 정부·의회 대신에 ‘국가재건최고회의’가 입법·사법·행정을 장악했고, 의회는 해산됐으며, 자유민주주의사회의 근간인 언론·출판·집회의 자유는 제한됐다. 그리고 수직적인 위계질서와 상명하복을 내세우는 군사정부의 체질이 사회 전반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민주화 이후 정치제도의 외형적 측면에선 대부분 복원이 이뤄졌으나, 여전히 개인의 영향력을 집단의 그것이 가볍게 압도하는 사회문화적 환경 또한 5.16으로부터 파생된 산물일지도 모르겠다.
 
5.16은 오늘날에는 그 구체적인 형태와 향취는 대부분 휘발된 것 처럼 보이지만, 여전히 한국의 외교안보지형과 정치사회적 토대를 규정하는 무형적 배경으로 분명히 남아있다. 그리고 그 지점을 인식하지 않으면 5.16이란 다면체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한국 사회를 이해하는 작업 역시 5.16을 종합적으로 분석하는데서 출발해야 한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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