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in Movie] ‘웃는 남자’ – 아동 인신매매단 콤프라치코스의 진실

《웃는 남자 (L’Homme qui rit)》(2012), 출처: wikipedia

 
《웃는 남자 (L’Homme qui rit)》는 2012년 개봉된 프랑스의 영화로, 빅토르 위고의 소설이 원작이다. 배트맨 시리즈의 악당 조커가 이 소설의 캐릭터에서 유래했다고 해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 영화에서 가장 강렬하게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것은 콤프라치코스(Comprachicos)의 존재일 것이다. 너무 충격적이고 사악하기 때문이다. 콤프라치코스는 ‘아이 상인’이라는 뜻을 가진 스페인어로, 아이들을 납치해서 기형으로 만든 뒤 팔아넘기는 인신매매단이다. 콤프라치코스는 정말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범죄조직일까?
 


 
그는 왜 영원히 웃는 남자가 되었을까?

17세기 영국, 눈보라 치는 겨울 어느 날, 한 소년이 혹독한 추위와 배고픔에 떨며 들판을 헤맨다. 그의 이름은 그윈플렌이다. 악명 높은 콤프라치코스에 의해 납치돼 입이 찢긴 그윈플렌은 눈 폭풍 속에 버려졌다. 콤프라치코스 일당 중 한 명이 경찰에 잡히자 자신들의 정체가 드러날 것을 우려한 조직원들이 급히 배를 타고 도주하면서 어린 소년 그윈플렌을 홀로 놓아둔 것이다.

정처 없이 눈벌판을 걸어가던 소년은 딸을 안은 채 얼어 죽어 있는 여자를 발견한다. 그녀의 품속에서 아직 숨이 붙어 있는 어린 소녀를 꺼내 안은 그윈플렌은 걷고 또 걷다가 유랑극단을 운영하는 우르수스의 집에 이르게 된다. 우르수스는 흉하고 기괴한 얼굴을 가진 남자아이 그윈플렌과 시각장애인 소녀 데아를 받아들인다. 훗날 극단에서 일하게 된 그윈플렌은 자신의 기형적 외모와 연기력을 바탕으로 최고의 광대가 된다. 그리고 그윈플렌은 ‘웃는 남자’ 역을, 데아는 그를 사랑하는 연인 역을 맡으며 자연스럽게 연인 사이가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콤프라치코스 일당이 일망타진되어 범죄행위가 낱낱이 조사되던 중, 그윈플렌이 지위가 높은 후작 가문의 자제였다는 것이 밝혀진다. 공화주의자였던 그의 부친 클랜찰리 후작은 왕권에 도전한 죄로 유배지에서 최후를 맞았다. 왕은 후작에 대한 보복으로 그의 어린 아들을 콤프라치코스에게 넘겨 얼굴에 몹쓸 짓을 하게 만든 장본인이었다. 그윈플렌이 왕과 귀족에게 원한을 가진 이유다. 어쨌든, 이제 그는 호사스러운 성과 영지, 대농장을 소유한 고귀한 신분과 권력을 가진 귀족으로서 새 삶을 살게 된다.
 
그윈플렌은 백성의 빈곤에 대해 여왕과 상원의원들에게 알리려고 의회에서 연설도 하게 된다. 그는 사실 광대 시절부터 특권계급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말을 하곤 했다. 귀족이나 왕실에 소속된 광대는 원래 박식하고 말재주가 뛰어난 자들이었다. 관습적으로 그들은 왕을 포함한 어떤 누구에 대해서도 비꼬고 풍자하는 것이 허용되었다. 권력자는 올바른 충언 대신 아첨을 해대는 사람들로 둘러싸이게 마련이므로, 왕이 독선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광대에게 이런 역할을 맡긴 것이다. 그들은 익살과 해학으로 사람들을 웃기는 동시에 날카롭게 현실을 비판했다.
 
그윈플렌 역시 의회에서 귀족들의 특권과 착취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퍼붓는다. “나는 당신들 귀족계급에게 경고하려고 오늘 이 자리에 섰다”라고 서두를 꺼낸 뒤 격렬한 어조를 이어간다. “부자의 낙원은 빈민의 지옥으로 이루어진다. 빈민은 착취당하고 배고픔과 멸시, 가난과 추위, 실업으로 고통받고 있다. 백성의 권리와 정의는 내 얼굴처럼 기형으로 뒤틀어졌다. 그러나 곧 백성의 시간이 온다. 그들은 자유인이 될 것이며 더 이상 굴욕과 비천함, 무지는 없다. 불안에 떨어라. 그들은 당신들의 살을 발라 먹고 심장을 물어뜯을 것이며 창자를 끄집어낼 것이다.”
 
한편, 그윈플렌의 호화로운 성의 파티에 초대된 데아는 그윈플렌과 여공작이 사랑을 나누는 장면을 보고 충격을 받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윈플렌이 죽었다는 헛소문을 듣고 건강이 악화된다. 한편, 귀족으로서의 삶에 환멸을 느낀 그윈플렌은 공작 작위를 포기하고 우르수스와 데아 곁으로 돌아가기를 결심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데아는 그의 품에 안겨 죽고 그윈플렌도 강물로 걸어 들어가 스스로 생명을 버린다.
 
영화에서 그윈플렌은 외모는 비록 기괴하지만 이른바 ‘영혼이 아름다운 괴물’이다. 눈으로 세상을 보지 못하는 데아는 그윈플렌의 추한 얼굴 대신 아름답고 친절한 영혼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윈플렌은 자신의 따뜻하고 훌륭한 내면세계로 인해 천사같이 아름다운 얼굴을 가진 데아의 마음을 얻었다. 여공작 조시아나가 그윈플렌에게 ‘당신은 얼굴의 괴물, 나는 영혼의 괴물’이라는 말을 했듯이, 실제로 세상에는 얼굴이 아름답지만 영혼이 추한 사람이 있고 정반대의 사람도 있다.
 
그런데 영화《웃는 남자》에서 그윈플렌은 전혀 입이 흉하게 찢긴 추한 괴물의 모습이 아니다. 오히려 수려한 얼굴에 입 주변에 약간의 분장만 한 듯한 느낌이다. 심지어 여공작 조시아나와 사랑을 나누는 장면에서 보여준 그의 벗은 몸은 관능적이기까지 하다. 위고의 의도와는 달리 영화는 그윈플렌의 모습을 왜곡한다. 추한 얼굴이지만 아름다운 영혼을 가질 수 있다는 훈훈한 메시지는 공허한 메아리가 되고 만다.
 
그윈플렌은 기형으로 인해 오히려 서커스단의 인기배우로 명성을 얻었고 자신감도 갖게 되었다. 또한, 데아와의 사랑으로 행복하고 만족스러운 생활을 했다. 그러나 매혹적인 여공작의 구애와 갑자기 얻은 귀족신분은 그 모든 것을 망가뜨린다. 얼핏 보면, 행운이 시작된 것 같지만 사실은 불행의 시작이었다. 인생이 그렇다.
 
남 부러울 것 없는 부와 명예를 가진 것 같은 사람들이 마약을 하고 우울증에 걸리며 생명을 버리는 건 왜일까? 그윈플렌도 많은 것을 얻은 순간 모든 것을 잃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결국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우리의 삶에 행복과 불행은 미묘하게 혼재해 있다. 극 속의 철학적인 캐릭터인 우르수스는 말한다. “때로는 행복을 위해 불행이 필요하지.” 위고가 말했듯이, ‘궁핍은 영혼과 정신을 낳고 불행은 위대한 인물을 낳는’ 것일까.
 


 

일러스트=토끼풀

 
콤프라치코스는 역사적 사실일까?

역사소설의 성격이 강한 원작에서는 콤프라치코스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17세기 귀족들 사이에서 오락을 위해 특이한 기괴한 외모를 가진 아이들을 사고파는 일이 성행했는데, 콤프라치코스는 그런 일을 하는 사악한 사람들이었다. 밧줄로 신체를 묶거나 좁은 상자 안에 가둬 아이가 성장하지 못하도록 했고, 척추뼈에 물리적 충격을 가해 장애인으로 만들었다. 눈을 훼손하거나 입을 찢거나 약물을 주입해서 얼굴 기형을 만들었고, 관절을 탈구시키기도 했다. 이렇게 기형이 된 아이들은 귀족들의 오락을 위해 팔려나갔다. 아이들은 귀족들의 일종의 애완동물로 살았고, 늙으면 서커스단에 팔아넘겨져 괴물쇼를 하며 죽을 때까지 평생 남들의 구경거리로 살아야 했다.
 
콤프라치코스는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범죄단일까? 아니다. 콤프라치코스를 증명하는 역사적인 기록물(사료)은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위고의 소설로 인해, 콤프라치코스이란 이름을 가진 인신매매단이 실제로 있었다고 제멋대로 곡해되었을 뿐이다. 따라서 콤프라치코스 이야기 자체는 허구다. 워낙 흥미로운 이야기여서 그런지 많은 이들이 너무 쉽게 콤프라치코스를 역사적 사실로 믿어버렸다.
 
단, 오해할만한 역사적 현상은 있었다. 일부러 장애인으로 만들어 사람을 사고파는 일은 간혹 없지 않아 있었다. 사실 18세기 말까지 유럽의 왕실과 귀족들은 장애인이나 기형적 외모를 지닌 사람들을 소장품 또는 사유재산으로 가지고 있었다. 19세기에서 20세기 초에는 왜소증 장애인(난쟁이)이나 거인, 수염 달린 여성, 샴쌍둥이 등 특이한 신체를 가진 사람들을 전시하거나 이들을 이용해 온갖 오락거리를 보여주는 괴물쇼(Freak Show)가 성행했다. 질병이나 신체의 결함을 가진 사람들은 흥미로운 구경거리였다. 당시에는 이들에 대한 연민과 공감, 배려라는 현대적인 인도주의 윤리가치가 없었다.
 
그러나 콤프라치코스는 위고의 문학적 상상력이 이러한 거칠고 야만적인 시대를 자양분으로 하여 탄생한 가상의 범죄조직이다. 소설적 허구인 콤프라치코스의 존재가 역사적 ‘팩트’로 둔갑해 버렸을 뿐이다. 요즘 언론기사나 블로그 등에서는 아예 기정사실로 취급한다. 사실 잘못된 역사적 정보가 진실 같은 가짜뉴스가 되어 안착하는 경우는 적지 않다.
 
지금은 장애인에 대한 이해와 인권개념이 발달해 괴물쇼 같은 것은 사라진 지 오래다. 그러나 온갖 자극적이고 엽기적인 것을 즐기는 우리가 그 시대의 사람들을 비난할 자격이 있을까? 온라인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N번방 사건들, 사지절단과 내장노출 같은 잔인한 장면을 보여주는 하드 고어물(hard gore), 이태원 참사 때 죽어가는 사람의 모습을 촬영해 유튜브에 올리는 이들과 득달같이 몰려들어 이를 돌려보는 사람들. 정말 무서운 것은 소설이 꾸며낸 콤프라치코스의 악행이 아니라 이런 것들에 대한 우리의 무감각이다. 콤프라치코스에 분노하는 ‘선량한’ 사람들이 왜 이런 것들에는 매료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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